[한국의 성읍교회-홍성제일교회] 저항의 영성, 기독교 시민운동이 되다

홍성 2015. 1. 3.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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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충남 홍주성 홍성제일교회

충남 홍성군 홍성읍 홍주역사관 전시실에는 옛 홍주성을 재현한 모형이 눈길을 끈다.

이 모형의 실제는 1906년 무렵까지도 온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5월 민종식이 이끄는 항일 의병 1100여명이 홍주읍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1894년 동학혁명 진압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조선 침략을 노골화한 직후 이 땅을 떠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 수백명이 전사했고 결국 일본군은 퇴각했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성읍은 몰락했다. 일제는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냈다. 근대 시가지 조성이라는 명분이었으나 실상은 민족정기 말살 책략의 일환이었다. 성 안 동헌은 우편국 사무실, 내아는 우편국 숙소, 교련청과 집사청은 우편국 숙소가 됐다. 서문과 북문도 어느 날인가 헐렸다. 동문인 조양문과 홍주아문, 성곽 810m 등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건 행운이었다.

1900년 시작한 내포문화의 중심교회

'서문밖교회'

이 정겨운 교회 이름을 홍성 9만여 군민은 잘 모른다. 홍성 크리스천이라고 해도 자신의 고장 모교회 옛 명칭인지 아는 이가 드물다. 홍성제일교회의 옛 이름이 서문밖교회다.

지난달 28일 홍주역사관 전시실 모형 성곽에서 서문을 찾았다. 서문은 홍예문 위에 문루를 올린 모습이었다. 그 서문을 나서면 옹성이 반월 형태로 감싸 안았다. 적이 곧바로 성문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옹성을 벗어나면 서문교가 있다. 자연 하천을 해자로 삼은 성읍 건축임을 알 수 있다. 그 다리를 건너면 큰 언덕이다.

서문밖교회는 이 언덕에 1920년 헌당됐다. 1900년 홍성 고암리기도처로 출발해 1903년 교동에 20칸 한옥식 교회에 이은 세 번째 터였다. 남문은 1900년 전후로 철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 자리엔 소학교가 들어섰다. 오늘의 홍주초교이다. 이 홍주초교 담 일부가 옛 홍주성벽이다.

"교회 문 앞까지가 냇가였어요. 지금이야 제방 사업을 해서 금마천이 좁아졌지만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폭이 넓었어요. 장마 지면 서문교가 떠내려가 다시 나무다리를 놓곤 했으니까요. 서문 밖 서문교 나무다리를 건너면 석조 건물 교회당이 있었고, 교회 마당에 종탑과 십자가가 읍내를 굽어 봤어요. 참 멋졌어요."

홍성제일교회 표기식(80) 은퇴장로의 회고다. 이웃한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가 고향인 10대 표기식은 예산읍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홍성읍으로 고교 진학을 했다. 20리(8㎞) 길이었다. 그는 홍성제일교회가 1950년 대동리에 개척한 나박소교회를 통해 신앙을 접했다. 고교 진학과 함께 홍성읍으로 오게 됐고 자연스럽게 모교회인 홍성제일교회를 섬기게 됐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어요. 당시엔 이상한 일도 아니었지요. 한데 신혼 6개월 무렵 아내(김종숙 권사·82)가 이유 없이 아팠어요. 전도사님이 교회에 다니면 치유가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대로 교회에 다니게 됐지요. 씻은 듯이 낫더라고요. 하나님 일이라면 무조건 따르겠다고 결심했어요."

표 장로는 "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장에 취업시켜 주겠다'다는 인민군의 반강제에 끌려가다가 간신히 탈출해 살아남은 것도 돌이켜 보니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상의 포로가 되어 잡혀 가다 자신의 집 앞을 지나자 "어머니에게 잠깐 인사드리고 오겠다"고 했다. 현명한 그 어머니는 바로 표 장로를 도망치게 했다.

개신교 전래 이후 적어도 표 장로 세대까지는 '시절이 하 수상해' 목숨이 위협받았다. 그럼에도 한용운 김좌진 등 홍성의 인물들은 그 위험에 굴하지 않고 의를 위해 싸웠다. 기독교 인물들도 그러했다.

일제강점기 홍성제일교회는 청년운동의 본산이었다. 민족계몽운동을 펼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7대 김병제 목사는 기독교청년조직 '홍성 엡워스청년회'를 출범시켜 복음을 전했다. 장날이면 금주단연운동도 펼쳤다. 또 교계 명강사를 초청, 강연회도 가졌다. 소년절제회도 청년들 못지않게 활동했다.

'홍성 구역엔 신령상 은혜가 풍부하며…'

1931년 감리교 연회록엔 '홍성 구역엔 신령상 은혜가 풍부하여 가며 열심 전도하여 팔쾌리와 신곡리에 기도소를 정하고 남녀 청년들이 6∼7인, 8∼9인씩 나가서 열심 전도하여 지금은 50∼60명 70∼80명씩 집회가 됩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도 전도와 민족의식 계몽에 힘쓰는 기독 청소년 및 청년들의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 목사는 3차례나 부임할 만큼 신망이 두터운 목회자였다. 재임 시 홍성유치원 설립, 성전건축 등도 이뤄냈다. 그에 앞선 목회자 이상만은 임시정부 의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기독교 민족운동 정신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것이 아니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문화의 중심 홍성이 갖는 영성과 역사성이 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백제부흥운동으로 시작된 저항의식은 최영과 성삼문으로 이어졌고 한용운과 김좌진을 낳았다. 동학전쟁 격전지였고 신유박해 피해의 영성의 땅이기도 했다. 내포지역의 1895년 을미의병과 1906년 병오의병은 영성과 민족의식이 합쳐진 결과였다.

또 일제 및 해방공간에서 중도적 민족운동과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가야동지회는 이러한 내포의 역사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영성은 기독교 사회운동으로도 흐르고 있다.

고광성(64·고광성치과원장) 시무장로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홍성YMCA 이사장, 예산·홍성 환경운동연합 출범추진위원 등을 역임한 그는 내포지역 대표적 크리스천 시민운동가이다. 그의 주도로 창간한 '홍성신문'은 한국 최초의 지역신문으로 지역언론사를 다시 쓰게 한 미디어운동의 한 예였다.

"저는 모태신앙입니다. 할머니(서공의 권사·작고) 신앙으로부터 시작됐어요. 새벽기도를 할머니 품안에서 다녔으니까요. 홍성유치원 56회 졸업생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가서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홍성에 정착해 교회를 섬겼어요. 장항선 비둘기호 열차타고 4시간 걸리던 시절이었지요."

그는 젊은 시절 중고등부 교사로 활동했다. 대학입학시험이 끝나면 그의 지도로 '시온의 향연'과 같은 발표회가 홍성군내 축제처럼 진행됐다.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할 것 없이 지역 내 모든 교단 학생부가 연합해 예수를 찬양했다.

내포문화의 정신적 발전소

"단순한 교회 행사가 아니었어요. 왜냐면 홍성군내 학생들이 발표회를 보러 예배당을 꽉 채웠으니까요. 우리는 봄부터 행사를 준비했어요. 복음송을 연습하고 기타를 배우고…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도를 했지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를 통해 성경공부를 많이 한 것이 교회 생활에 큰 도움이 됐지요."

표기식·고광성 장로는 신앙의 선후배다. 한국전쟁 이후 전도 열기가 뜨거웠고 이들은 그 열기를 곳곳에 미치게 하는 풍로 역할을 했다. 20리 산길을 걸어서 주일성수하고, 서울에서 고향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돌아와 교사의 직분을 행했다. 예수 제자로서 묵묵히 길을 걷던 그 무렵의 200여명은 오늘 600여명이 출석하는 교회의 인도자였다.

표 장로는 '신앙 반세기 회고' 요청에 "예수는 생명이니 철저히 믿어야 한다"고 했다. 시무 지도자인 고 장로는 "교회 개혁이 너무나 시급한 데도 한국 교회가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내포문화 모교회 홍성제일교회 600여명은 내포문화의 정신적 발전소인 교회를 섬긴다. 그들의 공감하는 영성은 생명사상으로 살아온 내포지역 선대 역사인물들이 후대에 준 선물이기도 하다.

홍성제일교회 김대경 목사지교회 '내포제일교회' 건립 위해 전 교인 기도 중

김대경(68) 목사는 홍성제일교회 설립 100주년이던 2000년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음악학교(현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했고 노인대학을 재설립했다. 주차장을 주민에게 개방하는 등 지역사회 기여를 최우선으로 하는 목회 방침을 세웠다. 노인대학 학생 80%가 비신자들로 구성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최근 감리교본부로부터 우수 노인대학 프로그램으로 꼽혀 사례 발표를 하기도 했다. 주일 600여명 출석한다. 갈수록 출석 교인이 줄어드는 농어촌 읍 단위 교회에 모범적 선교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달 28일 주일에도 부부 1쌍 및 중국동포 등 4명이 등록했다. "홍성·예산 경계에 도청이 자리 잡은 내포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지교회 '내포제일교회'를 위해 전 교인이 수년 전부터 기도하고 있어요. 330㎡ 부지에 500㎡ 예배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목원대 신학과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마쳤다.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다.

홍성=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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