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 칼럼] 시험대 오른 대한민국의 복원력

2014. 5. 2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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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서 서울로 향하는 제2자유로엔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오전 8시30분쯤이었을까. 습관처럼 켜놓은 차내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왔다.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이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만으로 천천히, 애잔하게 이어지는 곡을 들으며 바깥 풍경이랑 딱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도착해 몇몇 지인에게 카카오톡으로 곡을 돌렸다. '오늘 같은 날씨에 듣기 좋은 곡'이라며. 4월 16일 아침이었다. 잠시 후 TV에서 세월호 참사 소식이 방영되기 시작했다. 아연했다. 패르트의 슬픈 음악이 무슨 전주(前奏)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패르트의 조국은 20년 전 850여 명이 숨진 에스토니아호 침몰 참사를 겪은 에스토니아였다.

 앞으로 그 곡이 들릴 때마다 가위눌린 듯한 자책감이 찾아들 것이다. 변함없는 내 일상이 죄스러워서다. 얼마전 만난 한 퇴직 공직자는 "길이나 버스에서 젊은 애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난감하다"고 고백했다. 60대 중반인 그는 "연금 받는다는 게 이렇게 부끄럽기는 처음"이라고도 했다. 희생자 유가족은 물론, 또래 자식을 둔 어머니들의 심정은 또 어떨까. 대한민국 모든 시민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렸다.

 그 충격에 비하면 그제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 내용들은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다. 가슴이 시큰할 정도로 진정성은 보여 주었지만, 구체적인 대책에서는 저렇게 큰 조치들을 34일 만에 과연 얼마나 숙성시켰을지 의문이 들었다.

정부기관을 없애거나 쪼개고 합치겠다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모든 신속이 곧 졸속(拙速)인 것은 아니지만, 행정부 주도로 대한민국을 개조하겠다는 것은 반쪽짜리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진정성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야 한다. 세월호는 복원력을 잃었지만 대한민국호마저 뒤집힌 채로 남을 수는 없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작년에 내놓은 '글로벌 리스크 2013' 보고서는 139개국의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해놓았다. 국가별 복원력(resilience)에 순위를 매긴 것이다. 경제개발이 이루어진 국가들(stage 3) 중에서 복원력 1위는 싱가포르였다. 아랍에미리트·캐나다·스웨덴·뉴질랜드·핀란드 등이 뒤를 이었다. 139개국 중 홍콩은 15위, 미국 29위, 한국은 41위였다. 의외인 것은 재난 대비 선진국으로 알려진 일본이 겨우 67위라는 점이다. 왜? 아사히신문 주필을 지낸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재건 이니셔티브 이사장은 "일본의 국제경쟁력은 높지만 복원력은 낮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리더십, 즉 정치가의 통치 능력에 대한 평가가 낮기 때문이다"고 진단한다.

 후나바시가 이끄는 싱크탱크인 일본재건 이니셔티브는 2012년 5월 센카쿠 충돌, 국채 폭락, 사이버테러, 수도권 대지진 등 9가지 사태를 상정한 위기관리 과제에 착수해 작년 3월 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국내에도 번역돼 나왔다(『일본 최악의 시나리오-9개의 사각지대』, 조진구 역). 전문가와 전·현직 정치인, 관료들이 참여한 이 연구가 눈길을 끄는 것은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설치,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등 책이 제안한 것들을 실제로 아베 신조 정부가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센카쿠 열도와 가까운 섬들에 자위대를 주둔시킨다는 최근의 방침(19일 요미우리신문 보도)도 책에 언급돼 있다. 후나바시 이사장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게 바로 정치가의 리더십이다. "위기관리 거버넌스의 재구축은 정치가 해야 할 일이다. 행정에 그런 일을 맡길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한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제 발생하지 않도록 정치가 '제도설계 책임'을 다하라는 주문이다.

 세계경제포럼 보고서가 지적한 '복원력의 5대 요소'는 리스크에 대한 강한 흡수·저항력(Robustness), 인프라·전략적 여력(Redundancy), 사회적·인적 자원(Resourcefulness), 즉각적 반응 능력(Response), 일상으로의 회복 능력(Recovery)이었다.

우리는 이런 요소를 얼마만큼이나 갖추고 있는가. 더구나 세월호 비극은 생소한 글로벌 리스크라기보다는 있어선 안 될 재래식 참사에 속한다. 관료에게 수습을 맡기는 '셀프 개혁'은 아무래도 미덥지 않다.

대통령이 챙기니 한동안 난리를 벌이겠지만 속으로는 어느 자리에 누가 가느냐를 셈하기 십상일 것이다. 이럴 때 나서라고 정치가 있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책에는 국회가 협조해야 될 일도 많으니, 이번에야말로 진정 애국심을 발휘해주기 바란다. 대한민국의 복원력은 지금 절체절명의 시험대에 올라 있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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