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안 묻고 전세금 80% 대출..혜택은 집 주인이?
[오마이뉴스 김동환 기자]
"신용등급 관계 없이 전세금 80%까지 대출을 해준다니까 저도 좀 이상하긴 한데 일단 당장 전세집 구하려면 급하니까요."
서울시 마포구에 사는 30대 직장인 박주호(가명)씨는 최근 이사갈 전세집을 구하느라 분주하다. 아직 전세 기한이 5개월여 남은 박씨가 급하게 부동산을 도는 이유는 지난 3일 정부에서 출시한 '전세금 안심대출' 제도 때문이다.
1인 가구인 박씨는 현재 40㎡ 정도 크기의 주택에 살고 있다. 1년 반 전에는 6500만 원이던 주변 전세 시세가 요즘 8000만 원 이상으로 오르면서 고민에 빠져있던 차에 전세금 안심대출 제도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너도나도 대출 많이 받아서 전세집 구하면 전세가격이 더 뛰지 않겠느냐"면서 "빨리 집을 알아보고 내년 1월에 상품이 출시되자마자 계약할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정부가 8·28대책 후속으로 내놓은 전세금 안심대출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신용등급과 큰 관계없이도 거액의 전세금을 빌릴 수 있어 호응이 좋지만 거꾸로 전세 상승을 더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서민층의 부채를 늘려서 주택 소유자들의 빚을 줄여주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빚 없는 주택'만 구하면 신용등급 관계없이 전세금 80% 대출
전세금 안심대출은 전세 임대차 계약에서 세입자가 갖는 '전세금 반환청구권'을 담보화시킨 상품이다. 대한주택보증은 세입자에게 보증료와 전세금 반환채권을 건네받는 대신 전세금 반환 보증을 서고, 은행은 대한주택보증의 보증을 근거로 세입자에게 저리에 전세자금 대출을 공급한다는 게 상품의 주요 뼈대다.
세입자 입장에서 이 상품의 가장 확실한 장점은 일단 보증 계약이 체결되면 집주인의 사정과 무관하게 안전하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세 계약이 끝났는데 집주인이 전세금을 반환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한주택보증이 은행과 세입자에게 각각 전세 대출액과 잔여 보증금을 반환하고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게 된다. 연간 보증료 부담은 전세금의 0.212~0.232% 정도다.
보증 대상은 수도권에 위치한 보증금 3억 원 이하(지방은 2억 원 이하)의 소액전세다. 향후 추가 주택가격 하락으로 인해 '서민 전세'들이 겪을 수 있는 '깡통전세' 위협을 막아준다는 취지다. 국토부는 지난 3일 이 상품을 소개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세보증금을 전액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증과 동시에 전세자금 대출도 받을 수 있다. 주로 신용대출로 취급되던 전세자금대출이 담보대출이 되는 격이라 대출 조건이 파격적이다. 보증신청인은 해당 주택 전세보증금의 80%까지 신용등급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돈을 빌릴 수 있다. 대출금이 '보증신청인 연간 소득의 4배 이하', '연간소득 대비 대출이자 비율이 40%이하'라는 조건만 만족하면 된다.
금리 조건도 기존에 비해 유리하다. 현행 일반 전세대출의 대출금리가 평균 4.1% 선인데 반해 전세금 안심대출의 경우 3.7%가 적용된다. 전세대출 1억 5000만 원을 끼고 3억 원 보증금의 전세계약을 체결하는 세입자는 2년간 107~225만 원의 금융비용 절감이 가능해지는 셈이다.
▲ 전세금 안심대출 구조 설명 |
ⓒ 국토교통부 |
다만 현재 '깡통' 상태인 주택에 전세 세입자로 들어가는 사람은 이 상품을 이용할 수 없다. 국토부가 정한 상품 적용 주택의 기준을 보면 아파트의 경우 선순위채권액이 집값의 60%를 넘지 않아야 하고 선순위채권액과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은 집값의 90% 이하(오피스텔은 80% 이하, 기타 주택은 70% 이하)여야 전세보증금에 대한 보증과 대출이 가능하다.
"서울시내 아파트는 거의 해당사항 없어"
'수도권 전세금 3억 원 이내'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최근 전세시장 상황과 연계시켜서 따져보면 실제로 이 상품을 적용할 수 있는 주택군은 그보다 훨씬 협소하다. 일선 부동산 중개업자들은 "일단 서울시내 아파트는 거의 적용 대상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마포구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최아무개씨는 "서울 아파트 전세보증금은 못 받아도 집값의 60%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KB국민은행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매매가 대비 전세가율은 지방이 71.7%, 수도권이 59.1%다.
동대문구의 한 부동산 중개사는 "결국 전세보증금을 빼고 주택담보대출 등 선순위채권이 집값의 30% 이하여야 한다는 건데 요즘 그정도 대출은 다들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6월 기준으로 KB국민, 우리, 신한, 하나 등 9개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을 종합해보면 수도권택담보대출비율(LTV)가 50%에 달한다. 결국 '빚 없는 아파트'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은평구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김종률(가명)씨는 "한 두명 사는 소형 주택 정도는 조건이 맞을 수 있다"고 짚었다. 아파트 보다는 오히려 지은 지 20년이 지난 오래된 주택이나 최근 지어진 소규모 오피스텔 중에 융자가 없거나 적은 '깨끗한' 물건이 많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실제로 현재 이런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세입자들은 내년 1월 2일에 출시되는 이 상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은 다른 부분을 떠나 일단 목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동대문구 이문동의 5500만원 원룸 전세에 살고 있는 유진기(29)씨는 "이 동네는 서울에서도 전세가 저렴한 편이지만, 월급과 저축만으로는 올라가는 보증금 맞춰주면서 계속 살기가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는 "전세가 만료되는 내년 3월에 재계약할 때 (이 상품을) 이용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은평구 불광동에 사는 정아무개(33)씨는 "목돈이 없어서 반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대출을 받으면 교통이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소형주택 전세 매물이 많지 않은데다 상품이 출시되면 가격이 더 오를 것 같아서 연말에는 휴가를 쓰고 찾아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집있는 사람들 위한 정책... 전세금도 당연히 더 크게 오를 것"
들뜬 반응을 보인 세입자들과는 달리 전문가들은 전세금 안심대출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세입자들이 대출을 통해 부담할 수 있는 전세보증금 한도가 늘어난 셈"이라며 "집주인이 전세금을 더 올려도 된다는 의미이고 결코 반가운 얘기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제 대표는 "당연히 전세금 인상과 가계부채 총량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특히 사회적 약자의 부채가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근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집주인들이 전세금 올려받아서 평균 3000만 원 가량의 빚 상환을 한 반면, 세입자들은 그를 위해 평균 5000만 원의 돈을 빌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금의 전세가격 상승이 집주인 부채는 줄이고 사회적 약자 부채를 늘리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전세금 안심대출이 이 흐름을 더욱 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제 대표는 "정부가 이런 방식으로 어차피 시장을 왜곡시키는 개입을 할 바에는 전세 가격을 통제하고 4년에서 6년까지 세입자에게 주거권을 우선 보장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전세금 안심대출이 LTV 규제(주택담보인정비율)를 약화시키거나 우회하는 내용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현재 주택을 담보삼아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은 현재 집값의 60%(수도권 50%)로 제한되어 있는데 안심대출의 경우 대한주택보증을 이용해 집값의 최대 90%까지를 집주인에게 빌려주는 꼴이라는 것이다.
이 상품을 통해 부실 채권이 발생할 경우 그 몫은 전적으로 공공기관인 대한주택보증의 몫으로 돌아간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집값이 떨어져서 집주인이 전세금을 못 돌려주면 집을 경매해야 하는데 요즘 아파트도 경매하면 100원짜리 80원도 못 받는다"면서 "LTV 올려서 위험한 대출을 해주고 뒷감당은 주택보증이 다 하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부동산 경기 악화로 집값이 하락중인데 대한주택보증에서 향후 '깡통화' 되는 주택에 대한 부실을 떠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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