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병록] 5000명에게 신발 선물 감사·믿음 두 발로 힘차게 걷겠죠

2013. 12. 14.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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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전하는 구두수선공 김병록

'뒤차의 통행요금을 대신 내드리는 차량입니다. 행복릴레이운동본부.' 앞차 뒷유리창에 붙은 이런 문구에 긴가민가하며 톨게이트에 통행료를 내려던 순간, "앞차에서 내셨어요"란 말을 듣는다면 생각지도 않던 대접에 종일 행복할 것이다. 그는 이렇게 행복을 실어 나른다. 가진 게 많아 통행료를 대신 내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웃고 좋아하니까, 행복해하니까 한다.

서울 상암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구두를 수선하는 김병록(54)씨.

2002년식 흰색 카렌스 차량 뒷유리창에 이 문구를 붙이고 자신이 자주 다니는 일산대교나 외곽순환도로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뒤차의 통행요금을 내준다. 1000원, 2000원 얼마 되지 않지만 파급력은 작지 않다. 끝까지 자신의 차를 따라와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분이 좋아 양보운전을 하게 된다고 운동본부로 연락해오는 이도 있다.

그는 이것을 '행복릴레이'라고 부른다. 또 자신의 사역이라고 한다. 경기도 고양시 행신동 예수인교회(담임 민창기 목사)를 섬기는 그는 "목회자는 목회를 하고, 나는 내가 있는 현장에서 사역한다"고 말했다. 올해로 4년째. 자신의 행동에 행복했던 이들이 어딘가에서 동참해 행복릴레이가 잔잔히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12일 행복한 구두수선공을 만났다.

구두닦이·수선은 부업

구두닦이 일은 1996년 4월부터 했다. 고양시 행신동 3.3㎡도 안 되는 작은 공간에 '구두센터'를 차렸다. 참 많은 구두를 닦고 수선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각 가정 신발장에 자리만 차지하고 신지 않는 헌 구두가 얼마나 많을까를 생각했다.

"안 신는 구두를 수선하면 어려운 이웃에게 선물할 수도 있겠다, 버려지는 아까운 자원도 재활용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가게 앞에 '신지 않거나 버리는 구두가 있으면 구두병원으로 가져다주세요'란 방을 붙였다. 헌 구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97년 4월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동네 공원에서 경로잔치를 열고 수선한 깨끗한 구두 500켤레를 전달했다. 이렇게 시작된 구두 나누기는 5년간 5000켤레에 달했다. 노인·장애인·생활보호대상자뿐 아니라 이재민, 외국인노동자들에게도 전달됐다. 다른 구두수선공 3명과 같이 했다.

97년 5월부터는 버려진 우산을 수선해 비 오는 날 무료로 빌려줬다. 장마철에는 고장난 우산을 무료로 수선해줬다.

이뿐 아니다. 이발 봉사를 위해 97년 4월부터 퇴근길에 이용학원을 다녀 3개월 과정을 수료했다. 뜻을 같이하는 봉사자들과 매주 일요일 양로원, 장애인시설, 치매센터 등을 찾아가 무료 이발 봉사도 했다.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다.

"제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봉사 현장에서 전도된 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드러나지 않게 은혜로 채워집니다. 그 일을 어찌 멈추겠습니까. 구두를 수선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발 봉사를 하기 위해 일주일 열심히 일하는 거죠."

그는 봉사가 주업인 행복한 구두닦이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한쪽 폐까지 잃어

김씨는 광주광역시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때 어머니가 개가했다. 친척집에 맡겨져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신문팔이, 껌팔이를 했다.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됐지만 단칸방에서 새아버지도 함께 지냈다. 그러나 새아버지의 폭력으로 11세 때 집을 나왔다. 광주 직업보도원에서 생활하며 구두닦는 기술을 배웠다. 17세에 서울로 올라왔다. 다방 주방장, 유흥업소 웨이터 등 먹고살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유혹도 많았다.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은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살아보겠다는 목표가 있어서였다.

"늘 마음속에 주문처럼 외웠습니다. 돈 벌어 나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자고. 그래서 세상의 온갖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서울 명동의 고급 음식점 책임자로 일했다. 사장을 '누님'이라고 불렀다. 누님은 당시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매주 토요일 가게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직원들과 예배를 드렸다. 그때마다 김씨는 참석하기 싫어 도망다녔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손님이 직원을 못살게 굴어 김씨가 손님을 흠씬 패줬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 잠을 자고 있었다. 누님이 절대 싸우지 말라고 누누이 타일렀는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었다. 새벽에 김씨는 잠자는 자기를 붙잡고 우는 누님을 보게 됐다.

"어렸을 때 버림받은 저는 사회에서도 버려진 사람처럼 살았어요. 그런데 부모의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저를 누님이 걱정하면서 울고 계셨던 겁니다. 누님은 '어떻게 하면 사람 될래'라면서 주일날 교회에 가라고 말씀하셨지요. 성경을 사주고 1000원짜리 한 장 주시면서 말입니다."

그때 처음 교회를 갔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억지로 영락교회를 나간 지 한 달.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란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1절에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란 노랫말이 제 이야기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 그분의 은혜로 제가 다시 살아난 겁니다."

그렇게 주님을 영접하고 영락교회 기도원에도 찾아갔다. 어머니 같은 권사님들이 얼마나 잘해주시는지, 더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하지만 좋았던 것도 잠시, 이내 시련이 찾아왔다.

"목 쉰 상태가 이상하다며 가게 단골이었던 의사 선생님이 바로 병원에 오라고 하셨어요. 모든 검사를 마친 선생님은 '이 몸으로 어떻게 살았느냐. 당장 모든 걸 그만두고 치료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폐결핵 3기였던 겁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겁니다."

한얼산기도원에 올랐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신학교에도 들어갔다. 폐결핵이 완치되지 않았는데도 29세에 전도사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구두닦이, 과일행상을 했다. 구두닦이 일을 하면서 밥을 못 먹을 때가 많았다. 잘 먹어도 모자랄 판에 굶기를 밥 먹듯 했는데, 그는 깨끗하게 나았다.

"비록 한쪽 폐는 잃었지만 8년 만에 완치될 수 있었던 건 하나님이 치유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것은 하나님께, 마지막 것은 이웃에게

그에겐 1남2녀의 자녀가 있다. 어렸을 땐 혹시라도 폐결핵이 전염될까 안아주지도 못했다. 사춘기 자녀들은 구두닦이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했다. 친구와 길을 가다가도 구두 닦는 아버지를 만나면 창피하다고 멀리 돌아갔다. 자녀들을 위해 구두 닦는 일을 접었다. 그리고 모은 돈으로 작은 식당을 차렸지만 3개월 만에 날려 버렸다. 몇 년간 '외도'를 했지만 다시 구두닦이로 돌아왔다.

6년 전부터는 서울 상암동 두 곳에서 구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한 곳은 아내가 가방 수선을 하면서 지인이 구두 수선을 한다. 김씨가 일하는 센터에는 두 개의 모금함이 놓여 있다. 그가 다시 구두닦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하루에 1000원, 2000원씩 돈을 넣고 있다.

사실 그는 넉넉지 않다. 빠듯한 살림인데도 나눔을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을 한 차례도 거른 적이 없다. 물질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웃을 돕겠다고 결심한 순간엔 담뱃값이 아까워 담배를 끊었다. 3년 전부터는 술까지 끊고 모금 액수를 더 늘렸다. 돈을 모을 때 꼭 지키는 원칙이 있다. '하루에 처음 것은 하나님께, 마지막 수입은 강도 만난 이웃에게'.

이렇게 떼어낸 돈은 결식아동, 소년소녀가장, 은퇴 목사, 수술비가 모자라 어려움에 빠진 이웃에게 전했다. 지난 6월에는 셋방에서 쫓겨난 목회자에게 300만원을 전달했다.

"모금통에 들어간 돈은 이미 제 것이 아닙니다. 저 같은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덤으로 사는 인생들이에요. 그러니 욕심 부릴 게 없지요. 다 주고 가야지요. 저는 장기기증도 서약했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

남은 생애 이루고 싶은 것은 동산 만들기다. 산상교회를 세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작은 교회가 연합해 예배를 드렸으면 한다. 또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은퇴 후 이곳에서 텃밭을 가꾸며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터전으로 가꾸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구상 중이다. 그의 아들이 장애 1급 다운증후군이다. "다니엘은 지능이 5, 6세밖에 안되지만 구두센터 두 곳을 왔다갔다하며 심부름을 얼마나 잘하는데요. 행복하게 웃는 천사예요. 취직을 하려고도 해봤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어 이곳에서 일합니다. 바보가 아닌데도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게 안타까워요. 아들을 위해서라도 동산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그 동산에서 오갈 데 없는 장애인과 함께 지내려고 한다. 정부 지원 없이 시설을 운영할 계획이다. 정부 지원을 받게 되면 욕심이 생기고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두 닦는 아빠를 부끄러워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그 누구보다 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먼저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들에게 참된 신앙의 유산을 물려줘야 하는데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봉사'를 제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습니다."

봉사는 어려서부터 몸에 배야 한다. 그래서 봉사 현장에는 꼭 세 자녀를 데리고 다닌다. 특히 이발봉사에는 아들이 동행한다. 단소를 잘 부는 아들은 아버지 옆에서 단소를 불며 흥을 돋우기도 하고 청소를 하며 돕는다.

지난해 4·11총선 때는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 물망에도 올랐었다. 조동성 비대위 인재영입분과위원장은 당시 "서민의 삶을 잘 알고 있으니 그 목소리를 대변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권면했다.

"제가 정치를 뭘 알겠습니까. 그러나 앞으로도 정치든 뭐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민을 섬기는 작은 빛이 되고 싶습니다." 그의 생활신조는 '있는 대로 만족하고 둘 있으면 하나를 주라'이다. 작은 키에 작은 공간에서 작은 일, 구두닦이를 하고 있지만 마음만큼은 넉넉하고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행복한 구두수선공'이라 부른다.

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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