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4> 창사(長沙)

신경진 2013. 7. 18.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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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태어난 후난의 심장 .. 혁명의 DNA가 흐른다

신경진중국연구소 연구원"후난(湖南) 사람은 매운 것이 두렵지 않고, 구이저우(貴州) 사람은 매워도 두렵지 않고, 쓰촨(四川) 사람은 맵지 않을까 두렵고, 후베이(湖北) 사람은 맵지 않은 것이 두렵다." 중국에서 매운 요리 즐긴다는 지역을 묘사한 말이다. 음식 맵기론 후난이 첫째다. 후난 출신 마오쩌둥(毛澤東)은 "고추를 먹지 않으면 혁명이 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혁명의 고장 후난의 중심 창사(長沙)로 안내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xiaokangjoongang.co.kr >

후난은 우국지사(憂國之士)의 고향이다. 시조는 굴원(屈原, BC 340~BC 278)이다. 굴원과 가의(賈誼, BC 200~BC 168)의 고장인 창사는 '굴가지향(屈賈之鄕)'으로도 불린다.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재상 굴원은 모함으로 쫓겨난 뒤 울분을 담은 '이소(離騷)'를 지었다. 초나라의 노래 초사(楚辭)를 처음으로 집대성한 후한(後漢)의 왕일(王逸)은 '이소'를 '이(離)는 별(別·헤어지다), 소(騷)는 수(愁·시름겨움)'라며 '시름겨움에서 벗어나기'로 풀이했다.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는 '근심을 만나다'로 해석했다. 굴원은 이후 충언을 여러 차례 올렸으나 왕으로부터 답이 없자 '바위를 안고(懷沙)'란 시를 남기고 강에 몸을 던졌다.

황제에 버림받은 신하들 유배지

창사를 관통해 북으로 흐르는 귤자주에 있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석두상. 마오쩌둥은 이곳에서 '누가 천하의 흥망을 주지하느냐(誰主沈浮)'라는 유명한 구절을 담은 '심원춘 창사'를 지었다. [중앙포토]

 창사를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는 샹강(湘江) 인근에 태평가(太平街)라는 전통거리가 있다. 한(漢) 문제(文帝)의 총애를 받았으나 대신들의 시기로 장사왕태부(長沙王太傅)로 좌천당한 가의의 고거(故居)가 위치한 거리다. 창사에 이르러 굴원과 동병상련을 느낀 가의는 그를 애도하는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다.

 창사는 시구 '낙화시절(落花時節)'로 유명한 두보(杜甫)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江南逢李龜年)'의 무대이기도 하다. 770년 두보는 당(唐) 현종(玄宗)의 총애를 받던 당대 최고의 음악가이자 명창인 이구년을 창사에서 만났다. "기왕의 저택 안에서 자주 보았고(岐王宅裏尋常見), 최구의 전당 앞에서 여러 번 들었는데(崔九堂前幾度聞), 정말 강남은 풍경이 좋지요(正是江南好風景). 꽃잎 떨어지는 시절에 또 그대를 만났군요(落花時節又逢君)." 두 예인(藝人)의 만남이 낳은 명시다. '꽃잎 떨어지다'라는 구절 때문이었을까. 두보는 그해 창사 인근 샹강의 배 위에서 객사했다.

 후난과 후베이(湖北)를 나누는 호수가 둥팅호(洞庭湖)다. 샹강과 샤오수이(瀟水)가 흘러들어간다. 두 줄기 강의 첫 글자를 딴 '샤오샹팔경(瀟湘八景)'은 후난의 8대 절경이다. 산시청람(山市晴嵐·푸르고 흐릿한 아침나절의 산마을), 연사모종(煙寺暮鐘·안개에 싸여 저녁 종소리 울리는 산사), 원포귀범(遠浦歸帆·먼바다에서 돌아오는 돛단배), 어촌석조(漁村夕照·저녁 노을 비친 어촌), 소상야우(瀟湘夜雨·샤오수이와 샹강이 만나는 곳의 밤비 풍경), 동정추일(洞庭秋月·달이 비친 둥팅호의 가을 정취), 평사낙안'(平沙落雁·기러기 날고 있는 모래사장), 강천모설(江天暮雪·저녁 눈 내리는 강과 하늘)이다.

 중원의 남녘이던 샤오샹은 황제의 눈밖에 난 신하들의 유배지로 자주 쓰였다. '평사낙안'의 정서다. '멜랑콜리(우울)'는 창사의 이미지였다.

 창사란 이름은 모래톱(沙洲·사주)에서 유래했다. 창사를 가로지르는 샹강 한가운데 귤자주(橘子洲)란 이름의 모래톱이 있다. 길이 5㎞, 폭 100m다. 섬의 귤나무가 유명해 붙은 이름으로 '강천모설'의 현장이다. 갈매기의 쉼터는 불세출의 혁명가인 마오쩌둥의 성지로 바뀌었다. 2007년 공산당 중앙은 높이 32m, 길이 83m, 폭 41m로 청년 마오쩌둥의 초대형 흉상 건립을 허가했다. 문인의 우수는 혁명의 기백으로 창사의 이미지 변신이다. 올해 12월 26일은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이다.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준비 중이란 소식이 전한다.

 역사가 오랜 중국 도시에는 별명이 있다. 산둥(山東)의 지난(濟南)은 샘이 많아 천성(泉城), 윈난(雲南)의 쿤밍(昆明)은 사시사철 봄날씨여서 춘성(春城), 다섯 양의 전설이 깃든 광저우(廣州)는 양성(羊城)이다. 창사는 별의 도시 성성(星城)이다. 고대 중국인은 하늘의 별자리를 28수(宿)로 나눴다. 그중 하나인 진수(軫宿)는 남방 주작(朱雀)에 속하는 일곱 별자리 중 마지막 별로 장사(長沙)를 품는다. 별자리 장사는 장수(長壽)를 관장한다. 장사는 지상에서 산으로는 남악인 헝산(衡山)과 도시로는 창사시에 대응한다. 창사는 이처럼 별과 모래가 반짝이는 빛나는 도시다.

 양두(楊度, 1875~1931)는 청(淸)나라 말기부터 민국시대를 살았던 풍운아다. 그는 1903년 10월 '호남소년가(湖南少年歌)'를 지었다. 후난성 샹탄(湘潭) 출신인 양두는 후난성에서 거행된 과거에 합격해 거인(擧人) 타이틀을 땄다. 제왕학의 전문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참모이자 일본 유학을 다녀온 헌법전문가였다. 상하이 마피아 두웨성(杜月笙)의 문객이자 중국공산당의 비밀당원으로 활약한 양두는 후난을 중화의 마지막 보루로 여겼다.

 "중국이 지금 그리스라면, 후난은 스파르타다. 중국이 독일이라면 후난은 프로이센이다. 여러분들은 진실로 이와 같다. 말과 일을 급히 해 쓸데 없이 눈물 흘리지 말라. 후난 사람이 모두 죽지 않고서는 중화국가가 진실로 망했다고 말할 수 없다(若道中華國果亡, 除非湖南人盡死)." 양두의 눈은 정확했다. 쇠락한 중국을 구하기 위해 후난 출신 영웅들이 활약했다.

올해 12월 26일 마오 탄생 120주년

 매운 고추의 힘일까.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지어 변법을 주창한 위원(魏源, 1794~1857), 후난의 자제를 상군(湘軍)으로 조직해 태평천국을 진압한 증국번(曾國藩, 1811~1872)과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후난이 배출한 청말의 변혁가였다. 신해혁명기에는 황싱(黃興), 쑹자오런(宋敎仁)이, 공산혁명기에는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 펑더화이(彭德懷), 허룽(賀龍)이 활약했다. 후난의 혁명 DNA는 걸출한 지도자 후야오방(胡耀邦), 주룽지(朱鎔基)로 이어졌다.

 마오쩌둥은 혁명가인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는 창사에 위치한 후난 제1사범대학을 다녔다. "모든 혁명 당파, 혁명 동지는 장차 그들(농민) 앞에서 그들의 검증을 받고, 취사선택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영도할 것인가? 그들의 뒤에 서서 손짓 발짓 하며 그들을 비판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맞서 반대할 것인가? 모든 중국인은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다. 단 시국은 당신에게 빠른 선택을 강요한다." 1927년 3월 마오가 집필한 『후난농민운동고찰보고』의 내용이다. 마오 특유의 농민혁명론은 창사에서 탄생했다.

 마오와 중국공산당에 창사는 혁명의 심장이었다. 귤자주 석벽에 새겨진 '심원춘·창사(沁園春·長沙)'에는 혁명의 기개가 가득하다.

 몇 해전 죽은 마오가 산 오바마를 이긴 에피소드가 있었다. '심원춘 창사'의 마지막 문장 '중류격수(中流擊水)'가 2009년 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1기 취임사의 번역문에 사용되면서다. 오바마는 "희망과 원칙을 간직한 채 다시 한번 차가운 격류를 헤치고 언제 불어 닥칠지 모를 폭풍을 견뎌냅시다(With hope and virtue, let us brave once more the icy currents, and endure what storms may come)"라며 취임사를 마무리했다. 백악관의 공식 중국어 번역에 언론들은 오바마가 마오쩌둥의 시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당황한 백악관은 다음날 '중류지주(中流砥柱)'로 공식 번역을 바꿨다. 이 단어 역시 다작의 마오가 『연합정부론』에서 사용했던 용어다. 취임사부터 오바마는 창사의 마오와 다퉜던 셈이다.

 창사는 방송산업의 메카다. 후난방송국은 현재 중국 31개 성·시(省·市) 방송국 중 최고 인기를 구가 중이다. 특히 후난방송국이 제작한 연예오락 프로그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미국 오디션 프로 '아메리칸 아이돌'의 포맷을 빌린 '수퍼걸(超級女聲)'로 전 중국을 강타한 뒤 이영애의 '대장금'을 방영해 중국 내 한류(韓流) 확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최근에는 '아빠 어디가'란 포맷을 수입했다.

귀신 두려워 않는 샤먼의 본거지

 초나라는 무속이 번창했다. 귀신·도깨비 이야기가 유독 많았다. 창사 사람들은 매운 음식만이 아니라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귀신을 퇴치하는 방법을 다룬 민간 전설이 많다. 창사는 이처럼 신기(神氣) 넘치는 귀신의 고장이자 무속의 고향, 샤먼의 본거지였다.

 연예의 도시라고 해서 창사가 학문의 불모지는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천년학부(千年學府)'로 불리는 악록서원(嶽麓書院)이 그 증거다. 악록서원은 오대(五代) 승려 지선(智璿)이 열었다. 황제로부터 일곱 차례 편액과 책, 땅과 돈을 받았다. 주희(朱熹)가 여기서 강학했다. 주자학만 아니다. 양명학의 대가 왕수인(王守仁)도 이곳에서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가르쳤다. "천여 년 초나라 땅 인재는 바로 이 악록서원에서 낳고 길러졌으며, 근세기 이곳에서 길러진 상학의 영광은 태양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千百年楚材導源于此, 近世紀湘學與日爭光)." 악록서원 양 기둥에 새겨진 대련(對聯)의 문구가 이곳이 인재의 산실이었음을 웅변한다. 빛나는 별의 도시 창사의 최고 경쟁력은 바로 인재를 길러내는 악록의 정신이다.

신경진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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