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중산층] 좌담회 | 한국 거주 외국인이 본 '한국의 중산층'..아이 낳는 순간 삶의 질 '뚝'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140만명을 넘는다. 나름대로 한국에 거주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모국보다 행복한 생활을 원하는 건 공통분모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국에서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까. 모국에서 중산층으로 살았다면 한국에서도 그 이상 여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을까. 한국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열었다. 메튜 하빌 한미글로벌 이사(미국·44), 박매화 한화투자증권 애널리스트(중국·31), 스즈키 시호 주부(일본·33)가 패널로 참여했다. 국가와 성별, 직업이 다양한 3인은 모두 본인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Q.
한국에 살아보니 한국 중산층과 모국 중산층이 다른 점이 있나.
메튜 하빌
: 한국은 계층별로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이 사는 지역도 다르고 소비하는 장소도 다르다. 예를 들어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은 대부분 상류층이다. 끼리끼리 살다 보니 다른 지역에 사는 중산층이 이들을 무작정 부러워하는 것 같다. 미국에도 부유층이 몰려 사는 지역은 있지만, 한국처럼 심하게 비교하지는 않는다. 미국인들은 무엇을 가졌는지 중시한다면, 한국인들은 무엇을 못 가졌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박매화
: 한국 중산층은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피곤하게 살고 매일 쫓기는 느낌이다. 소득이 중국보다 낮은 것도 아닌데 여가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메튜 이사 말처럼 남과 비교하는 태도가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중요한 원인이다.
스즈키 시호
: 동감한다. 한국 중산층은 너무 일만 열심히 한다. 우리 남편도 한국인이지만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압박이 심하다. 일본 중산층도 일은 많이 하지만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여행을 즐기는 시간은 한국보다 훨씬 많다.
Q.
최근 한국에서는 각국 '중산층의 조건'이란 내용이 화제가 됐다. 미국, 일본, 중국의 중산층 기준이 어떤지 궁금하다.
메튜 하빌
: 미국 중산층은 상위중산계층(upper middle class)과 하위중산계층(lower middle class)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위중산계층은 의사, 변호사, 중소기업 임원 등 좋은 직업을 갖고 있지만 크게 부유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하위중산계층은 기능공 등 교육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돈을 많이 버는 숙련노동계층이다.
스즈키 시호
: 일본에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진정한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의식주로 고민하면 아무리 다른 요소를 고루 갖춰도 중산층 자격이 없다. 잘 곳이 없거나 밥 굶는 일이 없고, 여유가 생기면 종종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중산층이다.
박매화
: 중국은 일본처럼 문화생활을 중시하진 않는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재산이 가장 중요한 중산층의 기준이다. 중국어로 중산층의 '산(産)' 자는 재산을 의미한다. 소득이 어느 정도인지가 중요하다.
Q.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계층 이동에 성공하는 경우도 종종 있나.
메튜 하빌
: 미국에선 중산층이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드물다. 부자와 결혼하거나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계층 이동이 쉽지 않다(웃음). 그래도 한국보다는 미국이 더 쉽다. 미국은 한국보다 시장이 훨씬 크기 때문에 사업을 하면 성공 확률이 높다. 반면 한국은 직장에서 퇴직하면 생계형 자영업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경쟁도 치열해 성공률이 매우 낮다.
박매화
: 중국에서는 한국만큼 계층 상승이 어렵진 않다. 실업자가 되더라도 눈을 조금만 낮추면 일자리는 손쉽게 구한다. 중국 임금상승률은 연평균 10% 이상이고 꾸준히 경력을 쌓으면 승진도 빠르다. 중국 대기업에서는 빠르면 30대 중후반 임원이 돼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다. 한국에서 증권사 애널리스트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고액 연봉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보다 늦게 일을 시작한 중국 친구들 연봉을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스즈키 시호
: 일본은 중국보다 역동성이 부족하다. 중산층이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대부분 중산층이라고 보는데 일본 중산층은 한국과 달리 일확천금 꿈을 꾸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본인들은 갑자기 창업을 하거나 도박성으로 투자를 하지 않는 편이다. 직장인은 계속 직장에 다니길 원하고, 자영업을 하면 몇 대째 같은 사업을 한다. 위험한 모험을 하지 않는 만큼 계층 이동 역시 적다.
Q.
반대로 하류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어떤가.
박매화
: 한국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하는 중산층은 주로 하우스푸어(house poor)다. 나 역시 통계학적으로 보나 소득으로 보나 중산층이지만, 집값이 너무 비싸서 불만이다. 집을 사기는 엄두가 안 나고 전셋집은 2년마다 몇천만원씩 오르니 아무리 저축을 많이 해도 감당하기 어렵다. 반면 중국은 부동산 가격이 계속 오르는 추세기 때문에 하우스푸어가 많지 않다. 중산층이 하층민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한국보다 적은 편이다.
스즈키 시호
: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하류층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거의 없다. 한국처럼 집값이 오르지는 않지만, 투자 목적보다는 거주 목적으로 집을 사기 때문에 하우스푸어가 많지 않다. 이에 비해 한국에선 자칫 잘못하면 하류층으로 떨어진다. 너무 쉽게 점포를 창업하고 너무 쉽게 망한다. 시어머니도 광주시에 죽집을 열었는데 장사가 안돼 2년 만에 그만뒀다. 서울 대표 상권에서조차 옷 가게나 음식점이 두어 달 만에 간판을 바꿔 다는 걸 보면 일본과 차이를 크게 느낀다. 일본에선 준비 없이 무리하게 점포를 여는 사례는 보기 힘들다. 가족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메튜 하빌
: 한국, 미국 모두 오랫동안 큰 병을 앓거나 한순간에 직장을 잃으면 중산층이 종종 하류층으로 전락한다. 다만 차이점은 한국 실업자는 취업 시장에 재진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국은 한국보다 임시직이 많지만, 재취업이 한국만큼 어렵지는 않다.
Q.
전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다고 난리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박매화
: 한국에선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삶의 질이 나빠진다. 한국 중산층이 어느 정도 소비 수준을 유지하려면 맞벌이가 필수인데, 한국은 맞벌이가 너무 어려운 사회다. 보육 시설이 부족하고 육아휴직 사용하기도 어려워 여성이 직장생활 하기 어렵다. 반면 중국은 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눈치 보지 않고 자리를 비울 수 있다. 근무시간도 상대적으로 짧아 얼마든지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한다.
스즈키 시호
: 전적으로 동감한다. 맞벌이 부부 중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면 소득이 반으로 줄어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정부 지원이 부족한 것도 중산층이 줄어드는 이유다. 예를 들어 한국은 출산지원금이 기껏해야 50만원인데 일본은 500만원가량 된다. 아동지원금이나 학비 지원 역시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Q.
중산층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을 것 같다.
메튜 하빌
: 주택 정책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도 주택 시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중산층이 급감했다. 한국도 미국만큼 주택 정책이 중산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경제의 허리인 중산층을 탄탄하게 만들려면 안정적인 주택 정책이 필요하다. 가계부채도 줄여야 한다. 이 역시 주택 정책과 관련이 있다. 가계부채 상당 부분이 모기지론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한국도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가계부채를 해결하지 않는 한 중산층 문제 해결은 어렵다.
스즈키 시호
: 중산층이 어느 정도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생활물가를 잡아야 한다. 한국의 생활물가는 일본보다도 높다. 일단 소득 대비 집값이 높아 중산층이 살기 어렵다. 육아에 필요한 비용도 정부가 정책적으로 줄였으면 한다. 백화점에서 아이 옷 한 벌 사려면 최소 5만~10만원은 든다. 일본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 일본 친정집에 가면 아기용품 사오는 게 일이다. 육아뿐 아니라 교육비도 많이 드는 만큼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중산층을 늘리는 건 불가능하다.
[·사회 : 김경민 기자 ·정리 : 문희철 기자 / 사진 : 박정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688호(12.12.26~12.31 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