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이순신-(22) 시호] 12명의 충무공들

2012. 11. 3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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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을 호칭할 때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 혹은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불경스럽게 여겨 시호(諡號)인 충무(忠武)를 이용해 '충무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충무' 시호를 받은 사람들은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많다. 중국에서는 제갈공명,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 송나라의 명장 악비가 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제갈공명은 중원 회복 어떻게 했던가(恢復思諸葛). 적을 몰아낸 곽자의 그립구나(長驅慕子儀)"라며 충무공들인 그들의 지혜와 삶을 닮고자 했다. 이순신도 전사하고 난 후 그들처럼 충무공이 되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이순신 외에 진주대첩의 명장 김시민(金時敏)을 포함해 여덟 분의 충무공이 있다. 양력 12월 1일은 김시민 장군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끝내고 전사한 날이다. 그의 삶도 이순신과 비슷하다. 유학자 집안 출신임에도 무과에 급제했고, 여진족 니탕개가 두만강을 넘어와 침략했을 때 이순신 등과 함께 참전해 격퇴했다. 임진왜란 직전 진주통판(晋州通判)에 임명돼 일본군 침략을 방어할 준비를 했고, 임진왜란 발발 뒤에는 진주목사로 활약했다. 1592년 10월, 3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불과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7일 동안의 파상공격을 막아냈다. 그 마지막 날 적탄에 맞아 일주일 후 39세의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김시민은 육상에서 일본군에게 최대의 패배를 안겨주면서 전라도 진출을 저지했다. 이순신이 같은 해 7월 바다에서 한산대첩으로 바닷길을 장악한 것과 같은 역할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에서의 참패에 경악했다. 이듬해 설욕하기 위해 다시 진주성 공격 명령을 내릴 때는 김시민의 목을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릴 정도였다.

1차 진주대첩 이후 김시민은 일본군들에게 '모쿠소(木曾)'로 불리며 공포 그 자체였다. 모쿠소는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牧使)의 음을 일본식으로 쓴 것이다. 일본에서도 진주대첩이 널리 알려져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 고전 연극인 가부키(歌舞伎)에 '모쿠소'란 캐릭터가 생길 정도였다.

다음은 이순신, 김시민 외의 충무공들이다. 조영무(趙英茂), 이준(李浚), 남이(南怡), 이수일(李守一), 김응하(金應河), 정충신(鄭忠信), 구인후(具仁逅) 장군. 이순신도 다른 충무공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잊혀지거나, 자신만이 유일한 충무공이라고 독점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박종평(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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