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의원실에 배달된 근조 화분

2012. 8. 2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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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의원회관 333호. 시인 출신 민주통합당 도종환 의원 사무실이다. 사무실 곳곳에 눈길이 가는 그림과 판화, 많은 양의 책 등 문화적 향기가 넘친다. 친구인 판화가 이철수의 작품이 특히 많고, 시인 윤동주의 육필원고 복사본도 귀중히 진열돼 있다.

하지만 볼거리 많은 그곳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화분 2개다. 도 의원이 지난 4·11 총선 때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자 배달된 것인데 23일 지금까지도 수십 개 화분 중 가장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한 화분에는 상갓집에 보낼 때 쓰는 문구인 한자로 '謹弔'(근조)라고 쓰여진 흰색 리본이 달려 있다. 아주 친한 친구가 보낸 것인데, 고고한 시인으로 잘 지내던 친구가 이전투구의 장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으니 "시인으로선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며 근조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국회 면회실에 처음 배달됐을 때 경비들이 "돌려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쩔 줄 몰라했다는 후문이다.

다른 화분에는 '시인에서 의원으로 강등되셨습니다'라는 글씨가 적힌 리본이 달려 있다. 가깝게 지내는 서울대 조국 교수가 보낸 것이다. 문인들 사이에서 시인은 '우주기관'으로 불리는데, 도 의원이 '헌법기관'으로 격하됐다는 의미다. 두 화분 모두 친구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근조'와 '강등'. 두 벗들의 걱정은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준다. 실제 정치를 해서 점수를 깎아먹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권력도 누리지만, 무수히 많은 욕을 듣는 자리이기도 하다. 신념과 철학에 따라 법과 제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고, 자연스레 반대 진영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 이해가 엇갈린 당사자들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하거나, 지지자들을 대변해 편을 들거나 반대하고 나서는 것도 정치인의 역할이다.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그 과정에서 충돌도 다반사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사회변화 흐름이 가장 빠른 편이고, 국민의 정치적 감정도 격정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정치인들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갖고 있는 불만도 이와 관련돼 있다. 안 원장은 기회 있을 때마다 제3자적 관점에서 기성 정치권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가치기준으로 대립하기 일쑤고, 종종은 진흙탕 싸움도 벌여야 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 원장은 진흙탕에 발을 담그지 않아 깨끗할지 모르지만, 그 진흙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벽돌을 찍어낸 진흙이라면 한사코 "일꾼들의 발이 더럽다"고만 할 수는 없다는 불만이다.

정치인들은 모범답안만 내는 '안철수식 해법'에도 불만이 있다. 안 원장은 자신의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정치권의 보편적복지(국민 다수에 돌아가는 복지혜택)와 선별적복지(취약계층에 집중한 복지) 논란에 대해 "취약계층 복지를 우선 강화하고, 동시에 중산층도 혜택을 볼 수 있는 보편적 시스템을 사회적 합의와 재정 여건에 맞춰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아주 이상적 답변이지만, 현실은 결코 모범답안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안 원장의 출마를 반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의 반대도 도 의원의 두 벗들과 마찬가지로 안 원장을 아끼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안 원장은 '강등'을 무릅쓰고 진흙탕으로 들어갈 모양이다. 그는 진흙을 묻히지 않고 벽돌을 빚어낼 수 있을까.

손병호 정치부 차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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