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29) 뷔르츠부르크의 '에케 호모'

2012. 7. 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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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관 쓰신 예수님 그림 19세 청년의 영성 불지펴

루터를 잇는 독일 경건주의의 발자취를 더듬을 때 반드시 거쳐야 할 도시가 프랑크푸르트(스페너)와 할레(프랑케)이다. 그리고 스페너와 프랑케에 이어 경건주의를 꽃피운 진젤도르프(1700∼1760)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뷔르츠부르크이다.

도메니코 페티, 에케 호모

뷔르츠부르크는 프랑크푸르트 밑에 위치한 아름다운 마인 강의 도시다. 이곳은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가 "내가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바로 이곳에 있는 한 작은 그림이 독일의 평범한 젊은이의 영성에 불을 질렀다. 그가 진젤도르프다.

마인 강을 가로지르는 알테마인 교를 건넜다. 분위기는 마치 프라하의 카를 교 같았다. 강 주변에 늘어선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이 도시의 역사성을 보여 주었다. 다리를 건너자 대성당이 나왔고 대성당을 지나자 '레지덴츠'라는 옛날 대주교의 집이 나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대주교의 부와 명성이 얼마나 화려했으면 그 많은 그림들과 화려한 가구들이 남았을까. 2층으로 올라가자 한쪽 구석에 그 유명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 도메니코 페티(1589∼1624)가 그린 '에케 호모(Ecce Homo)'라는 그림이다. 그림의 내용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에케 호모)" 하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도 이 그림에 주목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그 앞에 무릎 꿇게 하여 교회의 역사를 새롭게 했다.

이 그림을 그린 도메니코 페티는 이탈리아 출신의 무명 화가였다. 사실 그는 '에케 호모'를 두 장 그렸는데 하나는 뷔르츠부르크에 있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오래 정성을 기울여 그린 우피치 미술관의 '에케 호모'보다 뷔르츠부르크의 그림이 더 유명하다는 점이다. 아마 진젤도르프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다

진젤도르프가 이 그림 앞에 선 것은 1719년 19세 때였다. 당시 진젤도르프는 많은 가능성을 가졌지만 아직은 어린 젊은이였다. 그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고관의 아들로 태어나 슈페너의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할머니의 신앙교육 아래 자랐다. 할레 학교를 통해서는(1710∼1716) 프랑케로부터 많은 교훈과 감동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자란 그는 할레 학교 시절 소년단을 조직해 사랑의 실천에 힘쓰고 할레 출신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선교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가 4세 때 경건주의의 아버지 슈페너로부터 머리에 손을 얹는 축복기도를 받은 것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영적 추억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리라는 예약은 없었다. 그는 그저 그 시대 여느 젊은이와 다름없는 19세의 젊은이였을 뿐이었다. 열심은 있었으나 아직은 어리고, 추진력은 있었으나 아직은 감정에 휘둘리는 젊은이였다. 그렇다. 누구나 어릴 때 총명하다고 장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어릴 때 착했다고 해서 끝까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타고난 태생과 교육 못지않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한다.

진젤도르프가 그날 그 그림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부어졌다. 그가 그 그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영혼에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너를 위하여 이 일을 하였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이 글이 당시 그림 앞에 쓰여 있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고, 다만 음성이 진젤도르프에게 들렸던 것이라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 글이 있었든 없었든 그에게 하나님의 감동이 임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을 바꾼 다메섹 체험, 루터를 부른 벼락 사건이 진젤도르프에도 임한 것이다.

나도 그 그림 앞에 섰다. 오래전 독일의 한 젊은이를 불렀던 그림은 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십자가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요, 그 주제로 그려진 그림도 한두 점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은 특별했다. 그림이 특별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림의 주인공이 특별해서 특별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가시가 머리를 눌러 이미 이마에는 피가 흐르고 예수님의 얼굴은 창백했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 외칠 때 빌라도는 무슨 의도였을까? "이 사람을 보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때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그 그림은 나에게도 묻고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 피 흘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 음성은 나에게 조용한 책망으로 그리고 영혼의 깊은 울림으로 들려왔다.

진젤도르프의 변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진젤도르프는 그 후 고향인 드레스덴으로 돌아가 오로지 하나님께만 집중했다고 한다. 백작으로서 태생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편안하고 호화로운 삶을 모두 포기하고 자기 집도 예배와 모임의 장소로 내놓았다. 그러던 중 체코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동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다. 모라비안 교도는 체코의 개혁자 존 후스를 따르는 루터 이전의 개신교도들이었다. 진젤도르프는 그들을 자신의 영지인 헤른후트로 피신하게 해 그곳에 정착하게 했다. 그리고 모라비안 형제회를 조직해 본격적인 경건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그 모라비안 운동이 할레대학과 함께 근대 선교의 불을 일으켰고 1832년 7월,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귀츨라프(1803∼1851)를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보냈으며, 고아원의 아버지 조지 뮐러를 회심시켜 영국으로 보냈고, 그리고 감리교를 탄생시켰다. 지금도 헤른후트에 있는 모라비안 교회에 가면 진젤도르프와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의 흉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당시 개신교 신자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옥스퍼드 출신의 웨슬리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가 1729년, 미국 선교를 위해 배에 올랐다가 풍랑을 만나 두려워할 때 뜻밖에 평화롭게 찬양하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났다. 두려움에 떨던 웨슬리는 그들에게서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주님을 뵙게 될 텐데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온 후 영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1738년 5월, 런던 올더스게이트의 모라비안 교도 집회에서 웨슬리의 영혼이 거듭났다. 감리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사람을 보라

한 사람 진젤도르프를 불러 경건주의 운동의 기수로 쓰신 하나님이 그 뿌리에서 또다시 요한 웨슬리를 불러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게 하시고 한국 최초의 선교사까지 보내게 했으니, 그 장한 역사의 뿌리가 한 작은 무명 화가의 그림이었다는 것이 신비하기만 하다.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우리는 누구를 보는가. 우리는 누구를 바라보는가.

이 그림은 그 뒤 또 한 사람을 감동시켰다. 영국의 프란시스 하버갈이다. 그가 독일에 유학할 때 이 그림을 보고 찬송가를 작사했다. '내 너를 위하여'(찬송가 311장)가 그것이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그렇다. 영성은 우리 앞에 십자가 지고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서는 것이다. 당신도 오늘 예수님을 바라보는가.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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