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적 서정 '한국의 고갱'.. 천재화가 이인성 탄생 100주년 회고전

2012. 5. 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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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냐?"

"이인성이요."

"이인성이 누구냐?"

"아니, 천하의 이인성을 모른다는 말이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4일 늦은 밤. 대구에서 활동하던 화가 이인성은 술에 취해 귀가하다 검문 중이던 경찰관에게 자신을 몰라보느냐고 큰소리를 쳤다. 경찰관은 거물급 인사인줄 알고 통과시켰다가 조금 지나 동료로부터 그가 화가라는 얘기를 듣고 이인성의 집으로 달려가 총을 쐈다. '한국의 고갱'이라 불리던 천재화가 이인성은 38세의 나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1912년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인성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화가 서동진에게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29년 수채화 '그늘'로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입선하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는 '세모가경'으로 특선에 올랐다. 이후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출품해 입선과 6회 연속 특선을 차지했다.

1932년에는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 '여름 어느 날'을 출품해 입선했다. 가난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관 주도의 전람회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기 원했고, 잇단 수상으로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라는 수식어를 달며 당대 제일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1932년부터 3년간 일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에서 데생 등 미술 전문 수업도 쌓았다.

1935년 귀국한 그는 일본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한 김옥순과 결혼했다. 아내는 서울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한 김재명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이었다. 이인성은 이 병원 3층에 양화연구소를 열었다. 미술학교 하나 없던 시절에 지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양화연구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1944년부터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고 광복 이후에는 한때 이화여자대학 미술과 강사로 활동했다. 1948년 국화회(國畵會) 회화연구소를 개설해 수채화와 유화를 지도하고, 대구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49년 제1회 국전에서는 추천작가로 서양화부 심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인성은 한국 근대미술의 도입기에 수채화를 통해 독특한 표현양식을 확립했다. 수채화로 보여주기 힘든 강렬한 원색의 사용과 뚜렷한 명암법, 짧고 촘촘한 붓 터치로 수채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했다. 또한 일본 유학 시절에 접한 서구의 인상주의와 야수파, 표현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한국적 토속성과 결합시켜 향토적 서정주의를 구현했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친일논란도 있었다. 동시대 작가인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등이 대중들로부터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의 예술세계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인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회고전이 8월 26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 '카이유' '가을 어느 날' '여름 실내에서' '아리랑 고개' '모자 쓴 자화상' 등 대표작과 드로잉 등 190여점을 선보인다. 미술관 측은 "이인성은 일제강점기 관제 전람회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나 한국의 정서를 상징적인 조형언어로 담아낸 점은 높이 살만하다"고 설명했다.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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