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김 대사 외삼촌 임택근, 5.16을 중계하며..

2012. 5. 1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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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김인만 작가]

◇ 임택근 아나운서는 육사생도들의 시가행진과 연도에 몰려나온 시민들의 모습을 전국에 중계방송했다. ⓒ KBS 동우회 이장춘 ⓒ

미지(未知)의 그늘이 드리운 검은 안경과 별 두개가 달린 군모. 야전 점퍼 차림에 다림질 자국이 칼날처럼 지나간 오래된 군복 바지. 지휘봉 잡은 손으론 뒷짐을 지고, 차갑고 무뚝뚝 결연한 의지를 꽉 다문 입. 착 가라앉은 냉엄한 표정엔 주위를 제압하는 위엄이 서려 있다.

5월 16일의 거사 이후 숨가쁜 순간순간을 넘어 18일 오전 10시, 서울시청 앞에 나타난 낯익지 않은 인물, 대한민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45세 박정희 소장의 첫 모습이다.

군사혁명!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빅뱅과도 같은 파장을 일으키며 그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불안과 혼돈을 쓸어버리고. 엄격한 질서가 부여되었다. 겪어 보지 못한 군사혁명에 대한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 뭇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AP통신은 한국에 등장한 새로운 권력자를 "검은 안경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의 인물"이라며 "미군이나 유엔군 장교들과 골프를 한번도 치지 않은 이 '전형적인 한국인'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극동의 얼굴"이라고 했다.

18일 그날 오전 10시 15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혁명기념식에서 처음 국가와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검은 안경 속 눈길로 지켜본 것은 육사생도들의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그날 불암산 기슭 태릉의 배움터를 박차고 나온 육사생도들은 장교단의 인솔하에 오전 9시 동대문에 집결해 종로로 행진, 화신백화점과 광화문, 세종로 국회의사당, 시청 앞을 지나 남대문, 미도파백화점을 거쳐 다시 시청 앞에 모여 혁명기념식에 참석했다.

연도에 몰려나온 시민들의 호기심에 찬 표정과 거기서 터져나오는 박수 소리, 그리고 반도호텔 앞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군 장성들이 회심의 미소로 손을 흔드는 모습들은 군사혁명에 대한 반응 장면으로 체크되기도 했다.

이때 HLKA(서울방송국) 가두방송 차는 동대문에서부터 행렬의 앞장에 서서 시가행진을 중계방송했으며, 아나운서는 차에 타지 않고 시종 생도들과 함께 걸으며 마이크를 손에 들고 연신 땀이 흐르는 얼굴을 훔쳐댔다.

그는 1950~196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스타 아나운서 임택근.

56년 호주 멜버른올림픽을 처음으로 중계하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이라는 멘트를 최초로 날렸으며, 66년 김기수의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매치를 독점 중계하는 등 스포츠 중계로 명성을 떨쳤다.

◇ 태평로를 지나는 육사생도들과 이를 지켜보는 연도의 시민들.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

◇ 임택근 아나운서가 시청 앞에서 열린 혁명기념식에서 육사 연대장 생도의 결의문 낭독을 중계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

그가 5.16군사혁명을 지지하는 18일의 육사생도 시가행진과 시청 앞 혁명기념식을 중계방송한 그때 그 장면을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1961년 5월 18일 하루를 혁명지지 중계방송으로 보냈다.그 전날인 5월 16일 밤은 숙직을 하다 혁명을 맞아 밤을 세웠다. 이튿날인 17일엔 세수도 못하고 아침 식사도 못한 채 중계방송 차를 탔다.오전 8시 우리 중계방송차는 동대문에서부터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기사행진을 뒤따르며 약 4시간 동안을 계속 이들과 함께 행진하면서 방송했었다. 그날 잠시도 중계차엔 타지 않고 걸으면서 방송을 했던 것이다.당시 나는 육사생들의 지지행진에 공감을 하고 나도 혁명을 완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인 중계방송을 맡았다는 중책감에서 피곤한 것도 배고픔도 잊은 채 일에 몰두했었다.마지막 코스인 시청앞에 도착해서 내 임무를 마쳤을 때는 12시가 훨씬 넘은 때였다.박정희 장군이 손수 담당 아나운서인 내게로 와서 손을 힘차게 흔들며 '수고했습니다. 이 혁명을 범국민적 혁명으로 만드는 데 크나큰 공을 세웠습니다'라고 말씀할 때 나는 나 스스로의 보람에 도취되어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날같이 바쁘고 보람을 느꼈던 일은 나의 아나운서 생활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리라." (출처 : KBS 동우회 이장춘)

이날 임택근은 혁명기념식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는 육사 연대장 생도 앞에 마이크를 대고 "조국아, 민족아 상기하라. 부패와 무능에 감연히 항거하여 일어난 국민의 군대는 새로운 조국건설의 역군이 될 것"이라는 그 생생한 음성을 전국에 띄워보냈다.

"부패와 굶주림 속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우리들은 궐기했다. 이것은 오로지 군인 자신이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여러분을 위한 것이다. 공산당이 날뛰는 속에서 우리는 어이상 무력한 정치인들을 믿을 수 없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더이상 가난과 굶주림과 절망속에서 살 수 없어 일어섰습니다. 굶주림과 부패에서, 공산당의 압력 속에서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아나운서 임택근은 가수 임재범의 아버지로 알려져 화제를 모았고, 성김 주한 미대사의 외삼촌으로 밝혀져 다시 한번 세인의 관심을 받았다.

성김(한국명 김성용) 대사는 임택근 아나운서의 손위 누나인 임현자 씨의 둘째아들이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은석초등학교를 다녔고 중학교 1학년 때인 1974년 부모를 따라 미국 이민을 떠나 80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 검사 행활을 거쳐 외교관으로 변신, 한미 외교사상 최초로 한국계 주한 미대사로 돌아온 것.

이에 앞서 그는 주한 미 대사관에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바 있고, 특히 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대표단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지금의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과 수차례 비공개 면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1년 5.16혁명의 역사적 장면을 중계방송하면서 "내 일생에 가장 바쁘고 보람 느꼈던 그날"이라고 회고하는 임택근씨와, 그 한해 전 1960년 출생한 소년이 주한 미대사로 돌아온 모습 등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흐름이 압축돼 있음을 보게 된다.

글/김인만 작가(http://www.5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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