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이헌재 위기를 쏘다 (60) 신불자 <2> 지혈 성공

이정재 2012. 3. 1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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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 신불자 출발점인 은행 창구부터 틀어막다

2004년 2월 25일, 취임 보름 만에 이헌재 부총리는 명동 은행회관으로 은행장들을 불러모아 "직접 은행 창구를 챙겨 신용불량자 확산을 막아 달라"고 당부한다. 사진 왼쪽부터 이헌재 당시 부총리와 유지창 한국산업은행 총재,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보, 김석동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중앙포토]

응급처치의 기본은 지혈이다. 신용불량자 사태도 마찬가지다. 2004년 2월, 부총리로 취임할 당시 신불자는 400만 명에 가까웠다. 신불자 낙인이 찍히면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다. 돈을 못 빌릴 뿐 아니라 직장 구하기도 어려웠다. 돈을 벌 수 없으니 빚은 더더욱 갚을 수 없다. 사채를 내 이자를 돌려 막다 구렁텅이에 빠지곤 했다. 네 가구 중 하나가 이런 처지였다. 경제가 쇼크에 빠질 수 있는 수준이다.

 지혈을 하려면 피 나는 곳을 찾아야 한다. 신용불량자 사태의 출발은 어디였나. 나는 취임 전부터 그곳을 "은행 창구"라고 지목했다. 1월 한 세미나에서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가계 신용대출 줄이기에 나서면 대란이 온다"고 경고했다. 취임 보름 만에 은행장들을 불러모은 건 그래서였다. 2월 25일, 명동 은행회관. 17명의 시중 은행장이 모였다. 나는 이들에게 "신용불량자들을 직접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3년 전 금융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을 늘렸고 최근에는 급격히 회수하고 있습니다. 주택 가격이 대출 시점에 비해 하락하지 않아 문제가 될 여지가 크지 않은 만큼 은행들이 만기 연장을 좀 해 주십시오."

 웬만하면 신불자를 늘리지 말아달라는 얘기다. 각 은행의 대출 관리에 개입하려는 것이다. "지나친 개입" "관치의 화신" 운운 뒷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강한 어조로 말하지 않았다.

 "신용불량자 전단계인 한계 거래자와 대출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고 챙겨주십시오. 지점장들에게 직접 좀 말씀해 주십시오."

 은행장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갔다. 이것이 1단계 조치였다. 지혈. 은행 창구를 통해 소액 채무자의 신용불량자 전락을 막은 것이다.

 이때 이미 김석동 금융정책국장은 신용불량자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취임 직후 지시한 전수조사였다. "소득과 담보, 연체 기간에 따라 신불자를 세세히 분류하라. 각각 상황에 맞게 신용불량 탈출 대책을 세워라." 이렇게 나온 게 3단계 신용불량자 처리 대책이다. 3월 8일 나는 이를 발표한다.

 핵심은 간단했다. ▶소액 채무자는 은행 창구에서 개별적으로 처리하고 ▶다중 채무자와 장기 연체자는 은행들이 연합해 처리하며 ▶나머지는 개인회생제도를 통해 채무를 재조정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때 설립된 것이 신용회복위원회다. 도저히 빚 갚을 길이 보이지 않는 신불자들에게 채무 상환 프로그램을 짜주는 것이다. 빚을 열심히 갚으면 원리금을 조정해주는 인센티브를 준다.

 원리금 조정. 사실은 빚을 깎아준다는 얘기다. 하지만 대책 발표 당시엔 아무도 그 점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맞춤형 대책'이라며 내놓은 신용회복위원회란 제도 자체에 관심이 쏠려서다. 정책은 신뢰가 생명이다. 어떤 정책은 진의(眞意)를 다 드러내선 안 된다. "신용불량자 문제가 너무 심각하다. 형편에 따라 빚을 30~40% 탕감해준다"고 발표한다 치자. 신용 질서가 부서진다. 열심히 돈을 갚은 사람만 손해다. 시장이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다.

 2003년 가을, 노무현 대통령은 실제로 자산관리공사를 활용해 신용불량자의 대출을 일부 탕감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당시 국민경제자문회의 원로 멤버였던 나는 강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절대 안 됩니다. 사회 신용 질서가 다 무너질 겁니다. 도덕적 해이가 판을 칠 겁니다." 그리스 사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와 독일이 왜 당장 그리스를 도와주지 않나. 그냥 도와주면 질서가 무너져서다. 빚을 탕감하는 조건으로 "재정 긴축을 해라. 구조조정을 해라" 요구하는 건 그래서다. 신불자 대책을 내놓으면서 "열심히 돈을 갚아라. 한 8년 열심히 갚으면 원리금 조정도 가능하다"고 애매하게 발표한 건 그래서였다.

 대책은 효과가 있었다. 신용불량자 수는 2004년 5월 397만 명을 피크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그해 9월까지 은행 창구에선 160만 명의 신용불량자를 해제·유예했다. 신불자가 그만큼 늘어날 뻔했던 것을 차단한 것이다. 배드뱅크·개인워크아웃 등 정부의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으로 신용불량자 딱지를 뗀 이는 연말까지 65만 명에 달했다.

 신불자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나는 중소기업 대책과 벤처기업 활성화 정책, 이헌재식 뉴딜로 불리는 종합투자계획을 차례차례 추진했다.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대책을 맡게 된 재경부가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런 정책들은 힘을 얻지 못하고 만다. 아쉬움이 크다.

 이듬해 3월, 재경부의 새해 업무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1년이 된 신용불량자 대책을 크게 칭찬한다. 그는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전망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도 성장했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휘말린 나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나는 진작 그만둘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이정재.임미진 기자 jjyee@joongang.co.kr

▶이정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jjyeeh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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