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3.칼을 베어버린 꽃잎 (13)

김종록 2012. 2. 25.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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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판이 도리어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배고파서 못 살겠소. 이번 가을걷이부터는 삼칠제로 바로잡아주시오. 그간 대낮에 누차 찾아왔소만 번번이 묵살했잖소. 마름에게 통사정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소."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소작인 대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횃불도 낫도 아닌 문서 두루마리를 손에 말아 쥐고 있었다.

 "안 된다는 일을 왜 자꾸 거들먹거리느냐?"

직세승은 미간을 찌푸리며 귀찮다는 내색을 했다.

 "오늘은 단판을 짓고 내려가겠소."

 "이놈이 매우 어리석구나. 땅이나 파먹고 사는 백정 주제에 무슨 글을 안다고 문서까지 들고서 지청구를 떨어."

"무식하지만 이름 석 자는 쓸 수 있고 하늘 아래 떳떳한 도리가 무엇인지는 아오. 지금 이 나라에서 소출의 반을 강탈해 가는 데는 절집밖에 없소. 공전은 1할만 걷어가고 사전도 3할이오. 한데 절집은 반타작이나 해가니 천부당만부당하오. 당장 삼칠제로 고쳐주시오."

소작인 대표는 문서를 펼쳐서 직세승 앞에 들이밀었다.

 "옳거니. 소출의 절반으로도 배들이 충분히 불렀구먼. 농사짓기 싫으면 관둬라. 서로 짓겠다고 줄 서는 소작인들은 쌔고 쌨으니깐."

 "말이 절반 남는 거지 봄에 빌려 먹었던 장리쌀 갚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소. 가을걷이하자마자 다시 장리쌀을 얻어야 할 판이오."

 "그러게 왜 장리쌀을 얻어 처먹고 지랄들이야!"

 직세승은 옷과 손을 털고서 돌아섰다.

 "주지를 만나야겠소."

 백정 무리들이 외친다.

 "뭣이! 네깟 것들이 지엄하신 주지스님을 만나겠다고? 장경도량 부인사 주지가 그리 호락호락한 지윈 줄 아느냐? 부처님과 대장경 경판을 모신 신성한 절집이 어디라고 감히 낫과 쇠스랑을 거머쥐고 쳐들어오나? 당장 안 물러가면 모두 물고를 내주련다."

[일러스트=이용규]

직세승은 승군들더러 뒤처리하라고 외쳤다.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소작인 대표가 직세승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급습을 당한 직세승은 엉겁결에 밀렸지만 이내 우람한 손으로 소작인 대표의 팔목을 잡고 비틀어버렸다. 직세승은 무너져 내린 그를 발로 짓밟아버렸다. 구릿빛 얼굴을 한 백정들이 낫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승려들도 몽둥이를 들고서 맞섰다. 어스름 속에서 혈투가 벌어졌다. 직세승을 호위하던 희멀건 승려 몇이 낫에 찍혀 피를 뿌렸다. 고함과 비명 소리로 요란한 절집 마당은 아비규환이 돼버렸다. 그사이 수백 명의 승군이 활과 칼로 무장하고 겹겹이 에워쌌다. 백정들 여럿이 활을 맞고 쓰러졌다. 그들은 수적으로나 무예로나 승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연장을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무장해제당한 백정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었다. 승군들은 횃불로 백정들 얼굴 하나하나를 비췄다. 백정들은 호위신장처럼 보이는 승군들 앞에서 순한 소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코뚜레 고삐 잡힌 소들 눈에 눈물이 솟구쳤다. 승군 하나가 차례차례 귀싸대기를 날렸다. 소작인 대표와 낫을 휘둘렀던 백정들은 몰매를 맞았다.

 "그만둬라! 도량에서 이 무슨 무자비한 작태냐!"

 흰 수염을 늘어뜨린 스님이 나타나 매질하던 대중들을 제지했다. 장경각 경판 수리 책임을 맡고 있는 효여(孝如) 대사였다. 그는 주지와 직세승의 사형이기도 했다.

 "사형께서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직세승이 강단 있게 외쳤다.

 "어서 백정들을 치료해서 돌려보내라."

 "우리 스님들도 여럿 다쳤습니다, 스님!"

 직세승은 분통을 터뜨렸다.

 "소같이 일만 하던 이들이 오죽했으면 이 밤중에 올라와 스님들을 해쳤을꼬?"

 효여 대사는 농사꾼들을 감싸고 들었다.

 "모두가 대장경 경판 잘 관리하려고 세금을 걷다 생긴 일입니다, 스님. 스님께서 이러시면 곤란하죠."

 "부처님 경전도 중생이 있고 나서지 중생이 없으면 경전도 경판도 빈 껍데기야. 화살이 있으면 전장에 나가서 몽골군을 쏠 일이지 백정들을 쏴서야 되는고?"

 효여 대사는 화살 맞은 백정들을 친히 치료해 주었다. 두어 식경 뒤, 백정들은 피범벅이 돼 널브러진 동료들을 둘러 업고 절집을 내려갔다. 차가운 가을밤 공산의 산바람이 피비린내를 싣고 사하촌 마을들로 번져갔다. 그 산바람은 대구까지 내려가 흉흉한 소문을 키우며 돌아다녔다. 가을걷이 전에 세상이 뒤집히는 난리가 나고야 말 거라는 얘기였다. 가뜩이나 재차 쳐들어온 몽골군들이 남하하고 있다는 비보까지 날아들어서 공산 일대는 뒤숭숭하기만 했다.

"일이 커지게 생겼구나. 조짐이 심상치가 않아."

 효여 대사는 각수장이들이 묵고 있는 방으로 건너와서 애를 태웠다.

"스님, 처음에는 저도 이쪽 백정들이 드세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밤 일을 목격하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절집이 공전이나 사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낸다는 건 옳지 못해요."

 골패노름으로 술이나 탐하던 무뢰승 김승이 모처럼 입바른 소리를 했다.

 "안타깝구나. 말세를 만나 불법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는 이 현실이. 어서 빨리 부처님 본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거늘…. 우리가 경판을 수리하는 건 그저 무턱대고 숭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이야."

 효여는 법당으로 올라가 백팔 배를 올리고 참회했다. 김승이 데려온 각수 서씨가 먼저 와서 비지땀을 흘리며 백팔 참회를 하고 있었다.

한편, 화살에 맞았거나 몽둥이찜질을 당한 백정들은 피고름을 짜냈다. 더러는 똥물을 퍼먹고 용케 일어나기는 했지만 대부분 자리보전을 했다. 장독이 올라 사경을 헤매던 소작인 대표는 정신이 돌아오자, 찬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서 동료들을 불렀다. 각혈을 하고 피똥까지 싼 그는 며칠 사이 해골의 몰골을 하고 있었다.

 "송사를 해보세. 마을 대표들을 소집해 주게."

 썩은 관청, 썩은 관리뿐인 세상, 해보나 마나라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 자리에서 연판장을 썼다.

 우리들은 부인사 사원전을 소작하는 백정들입니다. 우리가 농사짓고 있는 대부분의 토지는 본래 공전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부인사에 대장경 경판을 옮겨와 모시게 되면서 그 공전들은 부인사 소유가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부인사에 분급해 준 것입니다. 대장경 경판 관리를 위한 자금을 보전해 주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우리 고을에 거룩한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경판을 모시게 된 건 더없는 광영입니다. 하오나 우리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경판이 도리어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전에 공전을 부쳐먹을 적에는 소출의 1할만 세금으로 내면 되던 것이 사원전으로 바뀌면서는 5할이나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표가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로 서명했다. 그야말로 혈판장(血判狀)이었다. 글을 아는 이들이 대신 써주며 이어간 혈서 서명자는 마을들을 도는 동안 수백, 수천으로 늘었다.

 지게로 한 짐이나 되는 혈판장 두루마리를 접수한 호장(戶長)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인사 주지와 직세승을 읍사(邑司)로 소환했다. 주지는 불쾌하다는 반응은 보였다. 언감생심 누구를 오라 가라 하느냐는 것이었다. 호장은 대구 수령 바로 아래 직급이었지만 몸소 부인사로 행차했다.

 "불한당 놈들이 따로 없지. 세금 적게 내려고 생떼를 쓰다가 스님들 여럿에게 상해를 입혔단 말이오. 호장은 그놈들을 색출해 당장 옥에 가두시오. 안 그러면 황제폐하께 주청하여 호장과 수령의 배임행위를 처벌하라 할 거요."

 부인사 주지는 단단히 뿔이 나서 공갈협박을 늘어놓았다. 그가 걸친 가사장삼은 홍포에 금실로 모란꽃 문양을 수놓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사원전의 세금이 과했던 탓이오. 언제고 이런 때가 올 줄 알았소이다."

 고을 사정을 어지간히 파악하고 있는 호장이었다.

  "지금 폭도들 편을 드는 거요?"

 직세승이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씩씩거렸다.

 "알았습니다. 주모자들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하옵고 삼칠제는 수용하심이 옳아 보이오. 같은 마을에서 공전이나 사전을 짓는 이들과 형평성을 맞춰줘야지요."

 호장은 주지와 직세승의 눈치를 봐가며 말했다.

 "나라에서 우리 절집에 토지를 분급해줄 때는 우리더러 알아서 운영하라고 맡긴 거 아니오? 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거요, 대체!"

 주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러다 민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우리 읍사나 절집이나 좋을 게 없지요. 모쪼록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시오."

 "소작을 주는 거 자체가 부처님의 자비요."

 직세승은 주지보다 더 꽉 막힌 벽창호였다.

 "두 분 스님은 우리 고을의 지도층이십니다. 지도층이 생민들과 싸우는 건 하책(下策)입니다."

"쳇! 우릴 가르치려 드는군. 호장 노릇이나 제대로 하시오."

 주지의 그 말은 호장을 두 손 다 들게 만들었다. 향리로 돌아온 호장은 강도 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다. 부인사의 소작쟁의가 일촉즉발의 위기이니 사전의 세법을 적용해 삼칠제로 조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호장은 소작쟁의 주동자들을 불러들여 하루 동안 가뒀다가 방면했다. 함부로 준동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씨팔, 차라리 몽골 놈 새끼들이 쳐 내려와서 쑥대밭이나 만들어 놓았으면 좋겠어."

 "돌아누운 부처는 섬길 필요가 없다고 봐. 수틀리면 불로 싸질러 버리자고. 절집이고 장경각 경판이고 모조리 태워 없애버리면 결국 땅만 남을 테니까 말야."

옥방에서 풀려난 백정들이 악담을 했다.

"천벌받을 소리들 작작하게. 중이 밉다고 절집을 태워?"

 그중 신심 있는 불자가 그렇게 다독거리고 나왔다. 며칠 후, 사태를 악화시키는 일이 연이어 터졌다. 부인사 직세승이 소작인들을 바꾸겠다고 통보했다.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장독이 도진 소작인 대표는 열불이 나 발악하다가 이내 숨통이 끊어져 버렸다. 문상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날 대대적인 봉기를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근의 화적패들이 가세한다고도 했다. 부인사도 대책을 세웠다. 병기 창고를 열어 활과 칼을 벼리고 승군 수백 명을 무장시켰다.

 "외적이 쳐들어왔는데 식구들끼리 전쟁이라니!"

 효여 대사는 사하촌 초상집을 찾아 문상했다. 김승이 동행했다. 말이 초상집이지 결사대 본부였다. 수십 리 밖에서 문상객들이 찾아와 대놓고 무기를 만들고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다.

"이러시면 안 되네. 부인사에는 대장경 경판을 진장(珍藏)하고 있어. 대장경 경판을 보고 참소. 며칠 말미를 주면 내 기필코 주지를 설득하겠네."

 효여 대사는 합장한 손을 비비기까지 했다. 같은 부인사 소속 승려라지만 효여 대사는 주지나 직세승과는 결이 달랐다. 옥신각신 끝에 사흘간의 말미가 주어졌다. 부인사로 돌아온 효여 대사는 삼칠제로 바꿔주자고 주지를 설득했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효여 대사는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사형, 이러지 마시오. 순진한 것 같지만 백정들의 탐욕은 아귀와 같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알거든요. 초장부터 야무지게 단속해야 합니다."

 주지는 승군들을 격려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나가버렸다.

부인사 소작쟁의 장계를 받은 강도 교정도감.

 천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아직 궁궐도 관청도 짓지 못한 채, 사저를 이용하고 있었다.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정치기구의 수장 최이 집정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잇따라 올라오는 반군 봉기와 소작쟁의 장계로 골머리가 썩었다. 몽골군이 쳐내려온 상황이라 정국을 돌파할 묘책이 없었다.

"부인사가 또 말썽이로군. 대장경 경판을 그리 넘겨주는 게 아니었어."

 최이가 곁에서 보필하는 이규보와 사위 김약선에게 말했다.

 "신종 때(1202년) 경주별초군 반란에 동조한 놈들이 바로 부인사 중놈들 아닙니까. 감히 최충헌 합하께 저항한 놈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보겠다고 대장경 경판을 존치시킨 게 잘못이었습니다."

 김약선이 초를 쳤다.

 "그때는 그게 좋은 구실이었소이다."

 풍류문인 이규보는 정치적 사안에서만큼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최충헌과 최이 부자가 대를 이어가며 이규보를 가까이 두고 쓰는 이유였다.

 "이 상국, 그렇다고 당장 삼칠제로 하라고 황명을 내리게 할 수는 없잖겠소? 반타작하는 절집이 태반인 상황인 걸."

 "그렇습니다. 그리하면 다른 절집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날 테니까요."

 최이와 이규보는 전전긍긍했다.

김종록 소설가

김종록 기자

▶기자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center/v2010/power_reporte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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