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 자존심이 뒤집어졌더라.. 분당아줌마 이경선 기자의 '달라진 분당' 이야기

2011. 5. 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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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손학규 대표가 경기도 분당의 불난 집에 세 든 거 아세요? 이번 4·27 재·보궐선거에서 분당을에 나오려고 월세로 어렵게 구했다는데 홀랑 타버렸던 집이라는 거, 본인도 모를지 몰라요. 그 집 주인이 다 뜯어고치고 세입자를 기다렸죠. 전세대란에도 그 집만 안 나가더래요. 누가 불난 집에 들어가려고 하나요? 손 대표야 집 구하기 어려울 때 빈집 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들어갔겠죠. 당선됐으니까 하는 말이겠지만, 동네 어른들은 "옛말에 불난 집 들면 재수가 좋다는 말이 있어"라 하시더군요. 성남시 분당구 정자3동 신화아파트 △△△동 ○○○호. 아파트 이름도 '신화'네요. 아무튼 한 달간 텅 비어 있던 집이 주인을 만나면서 스토리가 시작됐어요.

저요? 분당 사는 여자예요. 한 8년 살았어요. 분당 살다가 분당 사는 남자 만나 결혼해 분당에서 애 키우는 아줌마예요. 금곡동(분당을)에서 내 살다가 전셋집 옮기면서 올해 이매동(분당갑)으로 이사했네요. 이곳 선거에서 손 대표가 됐다고 이 말 저 말 많던데, 저도 할 말 많아요. 깜짝 놀랐거든요. 분당이 어떤 동넨데. 한나라당이면 그냥 쓰러지는 데였다고요. 이사하는 바람에 이번엔 투표 못하고 관전만 했지만 어디 남 일인가요? 분당 사람들끼리 통하는 정서란 게 있다고요. 간만에 오지랖 넓은 아줌마가 마실 좀 다녀봤어요. 분당 아줌마가 본 분당 선거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손학규, 한나라당 아니야?"

날씨 한번 대단하더라고요. 황사 바람이 어찌나 불어대던지. 그래도 지난 3일 청자동(정자동을 '분당의 청담동'이란 뜻에서 이렇게 불러요) 카페골목엔 아줌마들이 넘쳐나더군요. 차 한 잔에 8000원씩 하지만 분위기가 중요한 거거든요. 고급 아파트에 살면서 국산 대형차나 외제차를 몰고, 본인이 전문직 또는 고액 연봉자이거나 남편이 그렇거나 한 아줌마. 분당 얘기할 때 이분들 빠뜨리면 섭섭하죠.

금곡동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석모(41) 언니. 언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죠. 남편은 서울 대치동에서 학원 운영하고요. 수입이 고정적이지 않아서 살림이 빠듯할 때도 있지만 지를 땐 과감히 지르는 통 큰 언니예요. 강남 라이프스타일에 익숙하고, 배우 이정재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서 자기를 보고는 발걸음을 멈췄다고 주장하는 미모의 소유자죠.

성향은 보수라 당연히 한나라당 강재섭 후보 찍었겠다 했죠.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남편은 예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이회창 찍어주려고 그렇게 선거인단 들어가고 싶어 했던 사람이야. 근데 이번에 손학규 찍었잖아. 나도 손학규씨를 경기도지사 때 몇 번 봤거든. 점잖고 괜찮더라고. 암튼 난 손학규씨 될 줄 알고 투표 안 했는데. 나, 사실 손학규씨 한나라당인 줄 알았어."

그러니까 석 언니는 한나라당 경기도지사 시절의 손학규(2002∼2006년)만 기억하고 있었던 거예요. 언니 집 근처 부동산에 가봤어요. 알고 지내던 ○○부동산 사장 아줌마 찾아간 건데 안 계셔서 옆 부동산에 들어갔네요. 김모(47) 사장님, 역시 아줌마인데 분당에 16년 사셨대요. 임태희씨만 주구장창 찍은 보수파. 이분도 돌아섰더라고요. "우리 나이 사람들이 손학규씨 좋게 봤죠. 경기지사 때부터 봐왔으니까."

철새라고 비판받는 당적 바꾸기가 때론 유리하게 작용하나 봐요. 분당 사는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교수도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당적 바꾸는 걸 예전엔 거의 대부분 핸디캡이라고 생각했는데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거죠. 이번 경우엔 오히려 보수적인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 반응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줬어요." 정치인 여러분, 참고하셔야겠어요.

불안했던 분당 우파

그래도 한나라당 고수한 분들, 많아요. 2008년 총선 때 임태희 청와대 비서실장이 분당을에서 70% 넘게 득표했죠. 50, 60대 부모세대는 단연코 보수인데, 그분들은 정치 참여에도 적극적이어서 선거 때면 정치에 무관심한 자녀까지 투표소에 데리고 가곤 했어요.

이번엔 분당을 투표소 47곳 중 16곳에서 한나라당이 이겼더군요. 강재섭 후보가 승리한 대표적인 투표소는 주상복합아파트 파크뷰가 있는 정자1동 제8투표소, 강 후보가 사는 구미동의 제4투표소 같은 곳이에요. 강 후보네 동네는 주택가 담장이 하도 높아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부촌이랍니다.

강 후보 손을 들어준 분들, 투표하는 날 왠지 불안했다더군요. 금곡동 장모(65)씨는 "원래 기권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TV 보니까 안 되겠더라고. 손학규가 되겠네, 이거 큰일이다, 해서 강재섭 찍으러 갔어"라고 하셨어요.

파크뷰 상가 1층 네일숍에서 만난 30대 여성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투표하러 가라고 떠밀었대요. "귀찮아 죽겠는데 엄마가 찍으라고 해서 1번 찍었어요. 아는 언니가 강 후보 친척이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그 언니한테 전화도 못해줬네."

정자1동 이모(58·여)씨는 선거운동을 지켜볼 때부터 '불길한' 생각이 들었대요. 젊은 사람들과 얘기해 보면 한나라당은 '한 번 맞아봐야 해' 하고 벼른다는 느낌이 들더래요. 탄천변을 걸으면서도, 건널목 건너면서도 온통 민주당 '연두색'만 보여서 더 불안했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선거 전날 이런 일이 있었대요. "우리 딸은 판교 사는데, 주소지는 분당을이야. 내가 사위한테 '박 서방 퇴근하고 투표해' 그랬거든. 사위가 농담한 건지 모르겠는데 '저 손학규 찍으면 안 될까요?' 하더라고."

집값에 열 받고, 건강보험료에 당하고

이건 참 드러내놓고 말하긴 좀 뭐한 건데, 영향이 있었죠, 왜 없겠어요. 정자동 주상복합 아이파크에 사는 박모(64) 아저씨 말 좀 들어보세요.

"여기 파크뷰, 아이파크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강남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나이도 보통 나랑 비슷하고. 재산의 70%는 집이야. 그런데 집값이 갑자기 떨어지니까 반감이 안 생기겠어? 정부고, 언론이고 만날 100세 시대, 100세 시대 하는데, 어쩌라는 거야. 50, 60대는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거든. 은퇴는 했지만 아직 미래는 창창한 거지. 20억원 집 하나 갖고, 나중에 이거 정리해서 먹고살자 했어. 근데 13억, 14억원까지 확 떨어지니까 이 정부에 대한 불만이 엄청난 거지. 나도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인데, 이번에 투표하면서 사실 뭐 맛 좀 봐라, 그런 것도 있었어."

분당에서 10년째 택시운전 하는 50대 중반 이모씨도 동의한 대목이에요. "솔직히 나 같아도 한나라당 안 찍지요. 이명박 정부 들어섰다고 파크뷰 평수 큰 거 30억원에 사갖고 들어왔는데 10억씩 떨어져 봐요. 우리 손님 이야기야. 자기 이모가 MB 대통령됐다고 집값 오를 줄 알고 샀는데 확 떨어졌대요. 여기 사람들 얼마나 욕하는 줄 알아요? 아무리 평생 한나라당 찍은 보수파라도 내 재산 피해보는데 누가 지지하겠어요."

전셋값도 영향이 있죠. 분당에 신혼부부나 젊은 부부 참 많이 살거든요. 30, 40대에 분당에서 자기 집 소유한 사람 얼마나 되겠어요. 공인중개사 한 분이 그러데요. '분당 거주자 50%는 세입자다. 20평대는 80%까지도 세입자다.' 어느 날 갑자기 전셋값이 5000만∼6000만원씩 올라 봐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겠죠. 서울 을지로 인쇄소에 근무한다는 신모(31)씨는 18일 이사한대요. 정자동에 얻은 7000만원짜리 전셋집이 만기가 됐는데, 주인이 3000만원 올려 달라 하더래요. 마음고생 엄청 했다네요.

분당동 다세대주택촌에 가보면 실감이 나요. 이곳에서 6년째 미용실 하는 원장님 얘기가 투룸도 개조해서 원룸으로 바꿔버리는 추세라는 거예요. 전셋값 올리니 다들 이사 가고, 월세로 돌리니 수요가 없어서 아예 원룸 월세로 전환해 버린다는 얘기죠. 그 바람에 젊은 부부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동네에 하나 있던 놀이방도 최근 문을 닫았대요.

"여기를 분당의 달동네라고 해요. 지하방부터 옥탑방까지 다양하고 그나마 싸니까. 근데 최근엔 더 안 좋아졌어. 이젠 누가 사는지도 모르겠어요. 원룸투성이니까. 바바리맨도 생겼다대."

금곡동에서 수지로 이사 갔다는 박모(37)씨. 두 아이의 엄마인데 미금역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중이었어요. 부부가 손잡고 가서 나란히 투표했대요.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네요.

샐러리맨 중엔 건강보험료 '폭탄' 때문에 열 받아 투표했다는 분도 많았어요. 한 연구소 연구원인 곽모(43)씨. 월급날이 4월 21일이었대요. 월급 명세서 보고 속이 뒤집혔다죠. 전업주부인 아내한테 바가지 긁히고 일주일 뒤 출근길에 투표소부터 갔답니다.

같은 연구소 다른 연구원이 슬쩍 귀띔해줬어요. "제가 건강보험료 150만원(인상액 소급분 포함)나왔으니까요. 한 달 전만 해도 19만7000원이었는데. 그분은 저보다 직급이 높으니까 오죽했겠어요."

대학교수인 김모(38)씨도 같은 하소연을 하더군요. "건강보험료 폭탄 맞았잖아요. 49만 얼마를 냈다고요. 연봉은 올랐는데 실제 집에 가져가는 돈은 줄었어요.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겁니다. 오늘은 그런데 또 도시가스 요금 인상한다고 나오데."

기름값 올랐죠, 이런저런 요금 인상되죠, 고소득자들도 살기가 팍팍해지는 걸 느끼는 거죠. 하긴 주말에 수내동 백화점에만 가 봐도 분위기는 알겠던데요. 1만원어치만 사도 사각티슈나 주방세제, 샴푸 같은 걸 주는 사은 행사가 있거든요. 그거 받으려고 30분 넘게 기다렸네요.

어떤 아줌마는 옆집에 배달된 할인쿠폰까지 챙겨 왔대요. 3만원어치 사면 1만원어치씩 영수증 쪼갠 다음에 사은품 3개 받아가는 사람도 여럿 봤어요. 그만큼 살기 힘들어진 거예요. 정자동 식료품점 아저씨 얘기도 요즘은 1000원, 2000원 갖고 손님하고 자주 실랑이 벌인다니까….

임태희씨 나오면…

"'기호 1번 누구입니다' 하는 거랑, '27일은 선거일입니다. 꼭 투표하세요' 하는 거랑. 어떤 게 더 와닿겠어요." 탄천변 걷다 마주친 나모(44)씨는 강재섭, 손학규 후보의 선거운동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고 하더군요.

정자동 박모(50·여)씨도 비슷한 얘길 했어요. "하루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니까요, 민주당 유세팀을. 저쪽(한나라당)은 좀 형식적으로 다닌다는 인상이 들고, 이쪽은 골목골목 찾아다니고." 어떤 분은 "손학규씨는 지역구도 아닌 성남 구시가지까지 가서 인사하더라" 하셨어요.

교회도 변수였을 거예요. 두 후보 모두 교회 유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는데, 이유가 있어요. 정자동 S교회 교인들의 공동 기도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투표율 50% 넘기기.' 이 교회는 작은 교회지만, 어쨌든 "이번엔 투표 좀 합시다" 하는 분위기가 분당에 있었던 거죠.

어찌어찌 하다보니 분당을을 한 바퀴 돌았네요. 이틀 걸렸어요. 유일하게 문전박대 당한 데는 경찰서 정도. 경찰관들은 선거 얘기 잘 안 해주더라고요. 그런데 경찰들도 분당을 선호한대요. 분당서 생활안전과장 왈 "여긴 밤에 술 먹고 개판 치는 사람 없어서 좋다"더군요.

민생침해 범죄는 많지 않고, 경찰서 건물마저 고급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동네, 분당. 민주당이 요즘 잔치 분위기라죠? 그런데 너무 들뜨진 마세요. 제가 만났던, 이번에 연두색에 한 표 찍은 분들이 이구동성 하는 말. "임태희씨 나오면 또 임태희 찍어야죠."

글=이경선 기자, 사진=홍해인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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