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본에선 1대1 상담해주는 책 소믈리에, 중소서점가에 활력

박소영 2011. 1. 17.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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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박소영]

도쿄의 동네책방 '독서 길잡이'에는 베스트셀러가 없다. 대신 '책 소믈리에'들이 선별한 서적들이 한줄짜리 추천문구와 함께 진열돼 있다. 몇해 전 전국 지방자치단체 급식 콘테스트에서 1위를 한 홋카이도 한 마을의 급식 내용을 소개한 책 앞에는 '절대 보장! 어린이 얼굴에 웃음꽃이 필 레시피(조리법)'라는 문구가 붙었다.

일본 도쿄의 대표적 서민동네인 에도가와(江戸川区)의 작은 동네서점 '독서 길잡이(読書のすすめ)'. 예사롭지 않은 간판의 이 책방에 지난 11일 오후 40대로 보이는 여성이 서점에 들어선다. 10분 넘게 서가를 돌며 이 책 저 책 꺼내보는 그에게 한 남성이 다가간다. 이 서점의 시미즈 가쓰요시(清水克衛·49) 점장이다. "찾는 책이 뭔지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라고 묻자 손님은 찬찬히 고민거리를 털어놨다. 한도 없는 집안 잡일에 신물을 내는 아이들, 일밖에 모르는 남편 이야기까지. 한참 귀를 기울이던 시미즈는 옆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들었다. 『바람과 가야금(風と琴)』이라는 단편소설이다. 에도시대에 사업을 벌여 큰돈을 모은 부호 집에 액운이 든다. 닥치는 불운에 맞서 한 가족이 헌신과 애정으로 뭉쳐 극복해 나가는 내용이다.

#날씨나 이슈에 따라 기획상품 준비

소믈리에는 와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에도 있다. 시미즈 점장의 직업이 바로 그거다. 와인 맛을 감별해 등급을 매기고 음식과 입맛, 분위기에 맞는 와인을 골라주듯 독자의 개성과 심리상태 등을 감안해 걸맞은 책들을 소개하는 '책 소믈리에'다. 초등학교 때 가라테(空手) 책에 빠져들면서 책과 가까워진 그는 대학 졸업 후 편의점 회사에 취직해 10년간 매장 운영을 맡았다. 그러다 1996년 유도부 선배 건물에 책방을 냈다. 40평 남짓한 서점에 진열된 책에는 이색 문구가 붙어 있다. '읽어본 사람의 80%가 만면에 웃음을 지은 책' '어린이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은 책' '여자친구를 찾는 친구에게 선물하면 좋은 책' '부모와 돈은 언제까지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책' 등이다.

퇴근길 서점을 들른 한 직장 여성에게 특정 소설을 권하는 시미즈 가쓰요시 점장. 독자의 평소 독서습관이나 취미·심리상태 등을 살펴 다양한 책들을 추천해 준다. "요즘은 스트레스가 많은 도시 직장인들에게 동화책이나 아동서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시미즈는 "일본에선 만화를 비롯한 책은 중고 전문서점에서 구입하는 사람이 늘었다. 잡지는 인터넷 때문에, 지도는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보급되면서 잘 안팔린다"고 말했다. 잘 나가는 베스트셀러는 대형 서점을 중심으로 마케팅이 이뤄져 동네서점에까지 순서가 돌아오지 않기 일쑤다. 젊은이 사이에서 온라인 서점 이용이 늘면서 중소 책방의 설 자리는 한국처럼 점점 좁아졌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책 소믈리에다. 그는 "편의점은 날씨나 이슈에 따라 수시로 기획상품을 준비한다. 책방도 그런 방식을 도입하면 효과가 있지 않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의 책 추천 철학은 '독자를 울리고 웃기고 깜짝 놀라게 하라'다. 한마디로 마음을 움직이라는 것이다. 감동을 받으면 행동하려는 것이 행동심리학의 기초다. 또 책 소믈리에는 하루 수천 종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출판왕국 일본에서 무얼 골라 읽을지 고민하는 독서 애호가들의 고민을 풀어줄 수 있다. '독서 길잡이' 서점엔 시미즈 점장 외에 3명의 직원이 책 소믈리에의 노하우를 익혀가고 있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서점을 찾는 독서 팬들이 늘었다.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다. 매상은 보통 동네서점의 서너 배에 이른다. 정기적으로 인기 저자의 강연회나 단골손님 독서토론회를 연다.

 일본에서는 근래 서평가를 중심으로 일반에 좋은 책을 추천하는 책 소믈리에가 새로운 직업으로 뜨고 있다. 대형 서점은 물론, 각종 도서관에서 책 소믈리에를 적극 활용한다.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讀賣)신문은 2005년부터 출판면에 독자들의 고민 상담을 겸한 '책 소믈리에'라는 고정란을 주 1회 마련해 운영 중이다.

#이색 아이디어로 인터넷 파고 넘는다

세계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나라 일본에서도 독서 퇴조 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최근 여러 조사에서 한 달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이 5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불황 속에 10년 이상 지속돼온 출판 불황으로 서적·잡지 등 출판물 판매액이 내리막이다. 총매출 2조6563억 엔(약 30조원)이던 96년을 정점으로 감소 추세다. 2009년엔 1조 엔대로 떨어졌다. 전국 서점 수도 99년 2만2314곳이었다가 지난해 5월 1만5314곳으로 줄었다. 10년 새 셋 중 한 군데가 문을 닫은 셈이다. 장기불황 이외에 젊은 층의 독서 기피, 인터넷 서점·중고책 전문점 이용자 증가 등 탓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성업하는 개성파 서점들이 눈길을 끈다. 도쿄역 앞 번화가 빌딩 4개 층을 쓰는 '마루젠'이란 대형 서점은 2009년 4층 한 귀퉁이에 65평 남짓한 '마쓰마루 혼포(松丸本舗)'로 시작했다. 베스트셀러 『천야천책(千夜千冊)』의 저자로 유명한 편집자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가 선별한 책 5만여 권을 모아 놓은 '서점 속 서점'이다. 일반 매장과 달리 서가를 나선형으로 설계하고 집 거실 같은 포근함을 느낄 수 있게 은은한 조명을 구사했다. 다른 매장보다 고객 체류시간이 길어지고, 예상치 못한 좋은 책을 자주 찾는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성공했다.

 2009년 2월 문을 연 도쿄 하네다공항 서점 '도쿄즈 도쿄(Tokyo's Tokyo)'도 고정관념을 깬 사례다. 공항서점 하면 흔히 여행 관련 책자나 크로스워드 퍼즐이나 소설 등 가벼운 내용의 책이 주종이지만, 이곳은 각종 유명 북카페를 만든 책 프로듀서에게 자문 해 서가를 재구성했다. 일본을 크게 9개 권역으로 나눠 지역별 유명 문학작품과 사진집, 해당 지역 출신 유명인 관련 책 등을 선별했다. 패션·음식·출장 등 관심 분야별로도 책을 분류했다. 매장을 혁신한 뒤 매출이 3배 이상으로 늘었다.

글· 사진= 박소영 도쿄 특파원  

▶박소영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olive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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