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6) 철원 장흥교회

2010. 11. 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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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현장 한가운데… 아직 아물지 않은 고난의 상처

승자의 역사다. 승자 독식의 오늘이다.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부르며 증오를 감추지 않았던 궁예(?∼918)의 땅 철원. 신라 왕실에서 비참하게 추출 당했던 궁예는 9세기 말 철원을 도읍 삼아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고 고려(후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부하 왕건에게 제거됐다. 패자였으므로 악덕이 유난히 부각될 뿐이다. 후세 사가들은 궁예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으로 지역 기반이 없다는 것을 꼽는다. 신라 말 군웅할거였던 시대, 그는 견훤이나 왕건처럼 토착 장상(將相) 출신이 아니었다.

21세기 철원. 궁예의 지역 기반이다. 고려-마진-태봉으로 바뀐 국호의 마지막 '옛 태봉국 도성지'를 품고 있는 땅. 도성지를 관통하는 3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남하하면 왼쪽으로 '철원제일감리교회터'가 나온다. 마치 '황성옛터' 같은 쓸쓸함을 자아내는 화강암 석축이 남아 있는 교회터다. 그 옆에 역시 무너진 '노동당사'와 함께 현대사의 비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곳 모두 6·25때 폭격 맞아 이제는 등록문화재로 남은 곳. 더구나 도성지는 남방한계선 이북에 있어 가볼 수도 없다.

철원제일교회(1905년 설립)는 1945년 8월 15일까지 식민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의 염원을 실천하는 신앙공동체였다. 읍내를 굽어보며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곳은 500여명의 성도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기도를 끊이지 않고 이어갔다.

1920년 그곳에서 11㎞ 떨어진 곳에 지교회 장흥교회가 제단을 쌓았다. 고봉기 성도 등이 동네 사람들에게 '서양귀신'이라며 뺨맞아 가며 교회를 세웠다. 한데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던가. 38선이 그어지고 철원은 고스란히 이북 땅이 된다. 교회와 고향땅을 지키는 자, 월남하는 자 모두 성서의 남북왕국 시대 백성처럼 바람 앞에 등불 신세였다.

장흥교회 이한성(79) 원로장로의 증언.

"당시 인민군의 횡포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치더니 이풍령 집사(당시)님을 끄집어내어 다짜고짜 구타했어요.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였죠. 별 큰 일도 아니었는데 교인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고 그랬어요. 45∼50년, 그렇게 인민군 치하에서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6·25전쟁으로 인한 수복은 그곳 크리스천에게 한 줄기 구원이었다. 밀고 밀리며 남북 간 살육이 이어졌고 그런 가운데서도 교인들은 교회를 지키려고 애썼다.

여상주 권사(올 봄 작고)의 구술 기록.

'해방 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는 물론 몇몇은 어디론가 끌려가 생사확인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결사대를 조직해 공산당과 싸웠다. 그리고 전쟁으로 마을이 수복되고 대한청년단원 소속 청년들이 공산당원 30여명을 붙잡아 마을 회의를 통해 1명을 사살하고 나머진 다음날 죽이기로 했다. 피가 피를 부르는 때였다.'

이 교회 서기훈 목사(1947∼1951년 재임)는 이때 청년들을 질책했다.

"나는 교회를 떠나야겠다. 예수의 복음을 가르치려 하는데 너희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살인마의 길을 걸으려고 하는데 무슨 염치로 남겠는가."

목회자이자 철원 지역의 어른이었던 서 목사의 설득으로 포로들은 살아 돌아갔다. 이듬해 1·4후퇴로 다시 공산당이 장악하면서 마을 주민은 몰살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때 살아 돌아간 이들의 호소로 교인과 주민은 화를 면했다. 하지만 인민군은 '퇴각 인민군 살해' 책임을 물어 서 목사를 51년 1월 8일 처형했다. 생몰 1882∼1951.

전쟁으로 이 지역의 모든 교회는 무너졌다. 휴전협정 조인 이후 철원 전체가 출입통제 지역이 됐지만 간신히 장흥리만은 출입이 가능해 철원의 성도들은 장흥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장하진 장로(2009년 작고)의 구술 기록.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정부에서 140개 천막을 철원 지역에 배정했는데 무작정 미군을 찾아가 통사정해서 군데군데 찢어진 1개를 얻어 천막교회를 올렸다. 멀리서도 찾아와 100여명이 몰려 예배를 드렸다. 맨땅 위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눈물의 기도를 했다.'

수난의 장흥교회(한찬희 목사)가 90년째다. 지난 18∼20일 취재팀이 장흥교회를 찾았을 때 늦가을마저도 끝자락이었다. 50∼100여명 정도면 꽉 찰 아담한 교회당은 특이한 건축양식을 지녔다. 정면은 르네상스 양식을 흉내 낸 적벽돌 건축이나 측면은 바로크식 현무암 석조 건축이었다. 한 목사는 "55년 교인들이 마을 앞 개울가에서 목도로 곰보돌(현무암)을 날라 2년 만에 헌당한 건물에 83년 증축을 한 형태"라고 말했다.

교회당을 마주한 왼쪽.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가 교회 마당과 장흥리 너른 들녘을 바라보고 있다. 검소한 이 기념비는 65년 제막된 것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이 허리춤 정도의 기념비를 세우기 앞서 교회는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비석 건립이 우상숭배 요소가 아니냐는 자기 검증을 철저히 한 것이다. 그리고 나온 것이 이 단출한 기념비다. 추모의 뜻을 기리기에 과함도 모자람도 없다.

장흥교회 뒷산은 장방산으로 불리는 동산이다. 84년 이 동산에 '신한반공추모비'가 세워졌다. 신한반공청년회 유족회와 장흥교회는 이듬해 광복절 추모예배를 드렸다. 해방 직후와 6·25 당시 장흥교회를 비롯한 감리교 청년들이 기독교 탄압에 맞서 싸우다 순교한 이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다.

"작은 시골교회의 골리앗 같은 힘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의 철원제일교회와 신생교회, 구수교회 등을 지교회로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성훈련원(기도원)인 대한수도원을 우리 교인들이 세웠어요."

대한수도원은 장흥교회 12대 교역자인 박경룡 목사(1910∼1988)가 교인과 함께 한탄강 순담계곡 옆에 기도실을 짓고 창립예배를 드림으로써 한국 첫 기도원이 되었다. 따라서 구 철원제일교회, 장흥교회, 대한수도원은 해방과 분단의 공간에서 고난을 헤쳐 온 승리의 성소인 것이다.

철원은 궁예 이후 여전히 꽉 막혀 있다. 동선이 자유롭지 못하며, 이데올로기로 인한 피해 의식이 사람들을 침묵하게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가 그러했듯 패자가 승리하는 땅에 그들이 있다.

■ 근처 맛집

군사도시답게 식당 안은 짧은 머리의 장병과 면회 온 가족의 반가운 만남으로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따끈한 설렁탕을 먹으며 사랑을 확인했다. 동송읍 이평리 사거리에서 읍사무소 방향 50m 지점에 위치한 '한우촌진국설렁탕'(033-455-3174).

45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며 소뼈를 우려내온 욕쟁이 임인순(82) 할머니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는다. 손자 같은 장병이 밥을 적게 먹거나 음식을 남기면 어김없이 "밥을 든든히 먹어야 나라를 지키지, 썩을 놈들아! 우리 집 음식이 맛없으면 다시 오지 마라!"며 임 할머니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이 식당 밥을 먹고 제대한 장병이 50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란다.

임 할머니는 친정이 부자여서 소를 자주 잡았는데 부엌살림을 맡았던 참모 곁에서 고깃국 맛있게 끓이는 법을 익혔다. 때문에 식당을 개업한 직후부터 입구에서 큰길까지 줄을 설 정도로 소문이 났다.

설렁탕 맛있게 끓이는 비법은 뼈를 오랜 시간 우려내는 것은 물론 불 조절과 물의 양, 그리고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수삼을 넣고 사태와 양지를 넉넉히 넣는 것. 양념 및 식재료는 인근 와수리 산촌마을에서 무농약으로 농사지은 것을 공급받는다. 3년간 숙성시킨 참조기젓으로 버무려 적당히 익힌 깍두기 역시 설렁탕과 조화를 이룬다. 조미료는 버섯 새우 다시마 외 열 가지가 넘는 재료를 갈아서 사용한다.

철원 통일촌에서 생산된 태양초 고춧가루와 집된장을 풀고 묵은 김치와 콩나물을 끓여낸 뼈다귀해장국 또한 설렁탕만큼 인기가 좋다. 설렁탕과 뼈다귀해장국은 각 6000원.

■ 철원 장흥교회 가는 길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철원군 동송읍행 시외버스 정류장이 있다. 40분 간격. 동송읍까지 약 2시간 소요된다. 동송시외공용터미널에 내려 맞은편에서 신철원행 시내버스를 타고 '신생교회앞' 하차. 장흥교회까지 조금만 걸으면 된다. 교회 앞까지 가는 버스는 터미널 맞은편서 하루 5차례. 자가용 이용의 경우 서울 기준으로 43번 국도를 이용해 포천을 거쳐 진입하면 된다.

철원=글 전정희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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