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범의 음주고사>"아직 취하지 않았어도 이미 슬프다"

2010. 6. 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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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강경범 생활문화칼럼니스트]

당대는 현종이 태종의 정관지치(貞觀之治)에 버금가는 개원지치(開元之治)를 펼쳐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쇠퇴기로 이끌었다. 이 시기는 중국시가의 황금기를 이뤘기에 문학사에서는 이 시기를 성당(盛唐)시기로 구분하는데, 그 정점에 두보와 이백이 있었다.

두보는 시성(詩聖), 이백은 시선(詩仙)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생활과 풍격, 시의 내용에서 판연히 대조된다.

이 두 시인의 명성이 워낙 커서 후세 사람들은 늘 두보와 이백 중 누가 더 뛰어날까? 또한 두보는 이백보다 나이가 11살 적지만 동시대에 살았기에 두 사람은 생전에 만난 적이 있는가? 만났다면 몇 번이나 만났으며, 얼마나 친분이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또한 이백하면 술을 먼저 떠올리기에 '과연 두보도 이백만큼 술을 많이 마셨을까'하는 의문을 품는데, 어떤 이는 한걸음 더 나가서 두보가 이백 못지않은 대주가라고 하기도 한다.

두보와 이백 중 누가 더 뛰어난 지에 대해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평가가 달랐는데, 두보가 노력형이라면 이백은 천재형이라는 것에는 아마 이론이 없는 듯 하다. 여기서는 두 시인의 우열에 대해서는 감히 논할 수가 없고, 다만 두보의 음주에 대해서, 그리고 두보와 이백의 만남을 통해 두보 음주시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두보가 대주가였을까?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감히 말한다. 대주가라면 이백처럼 한번 마시면 3백잔을 마셔야 하고, 백 병은 연달아 마셔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이백의 이러한 시구도 상당이 과장되었겠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표현이 이백의 호방한 성격과 적절하게 어울린다는 것이다.

흠뻑 취하는 대주가가 술값을 걱정하고, 다음날을 걱정하고, 주사와 추태를 걱정한다면 과연 대주가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술에 취해 다음날까지 술집에 널브러져 황제가 찾아도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백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두보에게도 이러한 언행이 있을까?

그의 < 낙유원의 노래(樂遊園歌) > 를 보면, "백 잔의 벌주라 해도 사양하지 않으리(百罰深杯亦不辭)"라고 하였고, < 되는대로 짓다(漫成) > 2수 중 둘째 시의 "술을 대하면 가득한 술병도 비우려한다(對酒滿壺頻)", < 장유후.시어사를 모시고 남루에서 연회하다(陪章留後侍御宴南樓) > 의 "이몸은 술을 깨었다가 다시 취한다(此身醒複醉)", < 좁은 곳을 지나 필요에게 줌(逼仄行贈畢曜) > 의 "외지의 술꾼은 술에 취해 잠들기가 어렵다. 곧바로 친구 찾아가 술을 다투듯 마시니,(方外酒徒稀醉眠. 徑須相就飮一鬪,)", < 흥에 겨워 절구를 짓다(絶句漫興) > 의 "몸 외의 끝없는 일들일랑 생각지 말고, 생전에 먹을 한정된 술이나 다 마시길.(莫思身外無窮事, 且盡生前有限杯)." 등의 표현이 있다. 이로써 보면, 그는 분명 술을 좋아한 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런데 두보의 이러한 표현들만 가지고 두보를 이백에 버금가는 대주가로 인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시각은 약간 지나친 듯 한데, 이러한 논의를 전개한 것은 곽말약(郭沫若)이 < 이백과 두보 > 라는 글에서, 두보의 시 1400여 수 중에서 음주시가 300편으로 21%를 차지한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말은 두보가 그만큼 술을 가까이 했다는 것이지 대주가였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두보를 대주가로 보고자하는 이유는 그의 시 < 장쾌한 여정(壯遊) > 과 < 술에 있어서 여덟 뛰어난 자에 관한 노래(飮中八仙歌) > 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 음중팔선가 > 에 대해서는 뒤에 이백과의 관계를 논할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을 겪고 전란으로 인한 자신의 고통을 우국애민의 시편으로 승화시키는데, 후반기의 시풍과는 달리 전반기는 당시에 유행했던 유협과 구선(求仙)을 추구했던 것 같다.

두보가 55세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 장쾌한 여정(壯遊) > 를 보면, "……성격이 호방하여 술 마시는 것을 업으로 삼고, 나쁜 사람을 싫어하는 강직한 마음을 품었다. 젊은이들에 한정되지 않아, 사귀는 자가 모두 노인들이었다. 술을 실컷 마시고 사방을 바라보면, 속된 물건이 모두 흐릿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性豪業嗜酒, 嫉惡懷剛腸. 脫略小時輩, 結交皆老蒼. 飲酣視八極, 俗物都茫茫.……)"라고 하였다.

젊었을 때는 성격이 호방하여 술마시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도 인생의 좌절을 맛보고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한다면 어떻게 될까? 두보는 이백과는 달리 호방한 면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24세에 진사시험에 응했지만 낙방하고, 36세에 또 낙방하여, 과거시험을 위해 장안에 머무르는 중에 그의 나이 44세에 안록산의 난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그는 난을 피하여 떠돌면서도 관직을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계속해서 미관말단직에 머물 뿐이었다. 아울러 난으로 인해 가족과 수없이 떨어져 지내기도 하고, 그간에 아들까지 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엔 성도의 두보초당을 떠나 방랑하다가 담주(潭州)에서 악주(岳州)로 가는 배 안에서 병으로 죽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뇌양(耒陽)현령 섭(聶)모씨가 소고기와 소주를 보내왔는데, 10여일을 굶은 상태에서 급체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두보의 일생을 통해보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호쾌하게 지낸 생활이 없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천하를 유람하고, 이백을 만나던 그 무렵을 제외하고는 그의 방랑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 북으로 떠난다(北征) > 와 < 가을바람은 지붕을 날려버리고(草屋爲秋風所破歌) > 는 두보의 곤궁한 처지를 잘 나타낸 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를 읽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다.

그러므로 난으로 인한 조정의 위기, 백성의 고통, 생활의 빈곤 등으로 인한 근심을 두보는 술로 풀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걸리는 누가 만들었나? 한잔 마시면 온갖 근심 없어진다.(濁醪誰造汝? 一酌散千愁.)"( < 落日 > )고 했던 것이다.

그의 유명한 시 < 경사에서 봉선현으로 가며 지은 노래(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 의 "흠뻑 취해 스스로 가만히 흡족하여, 노래부르며 근심을 없애고자 한다(沈飮聊自適, 放歌破愁絶.)", < 소단․설복의 잔치자리에서 설화의 취가를 적다(蘇端薛復筵簡薛華醉歌) > 의 "늙으면 전쟁의 슬픈 북소리가 듣기 싫어, 재빨리 술잔을 주고 받으며 두근두근한 근심을 푼다.(垂老惡聞戰鼓悲, 急觴為緩憂心搗.)", < 가.엄 두 각로보결의 집을 떠나면서, 雲자를 운으로 얻어(留別賈嚴二閣老兩院補缺, 得雲字) > 의 "멀리 떠나도 이별시는 남고, 근심이 많으면 술에 취한다.(去遠留詩别, 愁多任酒醺.)" 등을 보면 분명 두보는 술로써 근심을 풀었던 것이 명백하다.

아울러 두보는 시인이었기에 술은 또한 영감을 떠올리는 매개체 역할을 하였을 터이다. 그의 < 안타깝다(可惜) > 에서 "마음 달래기는 마땅히 술이요, 기분 내기에는 시만한 것도 없다.(寬心應是酒, 遣興莫過詩)"라고 했고, < 홀로 술을 마시다 시를 이루다(獨酌成詩) > 에서 "취한 가운데 서로 쫓아 나그네 되고, 시를 이루면 정신을 담은 듯 느껴진다.(醉裏從爲客, 詩成覺有神)"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두보는 위진시대의 명사나 이백․하지장처럼 호탕하고 질펀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없었다. 오죽하면 손님이 찾아와도 "반찬은 시장이 멀어 맛난 것이 없고, 술동이의 술은 가난하여 묵은 막걸리뿐.(盤飧市遠無兼味, 樽酒家貧只舊醅. 肯與鄰翁相對飲, 隔籬呼取盡餘杯.)"( < 손님이 와서(客至) > )이라고 했겠는가?

그의 이러한 모습을 조금 더 보자. < 草堂即事 > 에서는 "촉의 술이 근심을 없앤다고 하건만, 돈이 없으니 어디서 외상으로 얻을까?(蜀酒禁愁得, 無錢何處賒)?"라고 했고, < 다시 근심하며(復愁) > 十二首 중 제11수에서는 "지금은 9일이 다가오니, 술을 외상으로 사야겠구나.(如今九日至, 自覺酒須賒)."라고 하였고, < 마음을 풀다(遣意) > 제2수에서는 "이웃 사람이 좋은 술을 가졌으니, 어린 아들이 이를 꾸어올 수 있다.(鄰人有美酒, 稚子也能賒)."라고 했다. 그러므로 '고희(古稀)'의 출전으로 유명한 < 곡강(曲江) > 제2수에서도 "술빚은 예사여서 가는 곳마다 있지만, 사람이 칠십 년을 살기는 예로부터 드문 일.(酒債尋常行處有, 人生七十古來稀.)"이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 (엄무가 청성산도사의 유주 한병을 보내준 것을 감사드리다(謝嚴中丞送靑城山道士乳酒一甁) > 는 제목처럼 두보의 재능을 인정한 친구들이 술을 보내주기도 했고, 두보 자신은 권세가들의 잔치자리에 참석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 장유후 겸 시어사를 모시고 남루에서 연회하다(陪章留后侍御宴南樓) > , < 왕시어를 모시고 통천.동산.야정에서 잔치를 벌이다(陪王侍御宴通泉東山野亭) > , < 최부마의 산정 연회에 모여(崔駙馬山亭宴集) > , < 정부마의 집 동굴에서 벌인 잔치에서(鄭駙馬宅宴洞中) > , < 악현위 원소부와 함께 미피의 잔치자리에서(與鄂縣源大少府宴渼陂) > , < 이옹을 모시고 역하정에서 잔치를 벌이다(陪李北海宴歷下亭) > 등등에서 두보가 권세가의 화려하고 성대한 잔치자리에 참석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백과 달리 관직에 연연한 두보가 이러한 잔치자리에서 호탕하고 질펀하게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 그야말로 샛님처럼 조신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보는 < 좌성 위장에게 드리는 22운(奉贈韋左丞丈二十二韻) > 에서 "…아침에는 부잣집 대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살찐 말이 일으키는 먼지를 따라간다. 술잔에 남은 술이나 식은 안주를 얻어 먹자니, 가는 곳마다 가슴이 슬프고 쓰립니다.(…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杯與冷炙, 到處潜悲辛.…)"라고 했던 것이다.

두보는 재기가 번뜩여서 좌중을 놀래키는 기민한 천재성도 아니고, 성격 또한 그다지 호쾌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권세가의 잔치자리에 참석한 의도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관직에 추천받는 것이었기에 어찌되었건 관리에게 잘 보여야 되는 신세이고 보니, 그러한 술자리가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하지만 그의 시에는 관직에 대한 염원을 담은 표현이 드러나는데, < 헌납사 겸 기거사인이신 전징에게 드림(贈獻納使起居田舍人澄) > , < 선우경조에게 드리는 이십운(奉贈鮮于京兆二十韻) > , < 정간의에게 삼가드리는 십운(敬贈鄭諫議十韻) > , < 한림원 장학사에게 드림(贈翰林張四學士) > 등등이 그것이다.

예를들어 < 좌승 위제에게 드림(贈韋左丞濟) > 의 한 구절을 보자.……老驥思千里(노기사천리), 늙은 준마는 천리 길을 생각하고,饑鷹待一呼(기응대일호). 굶주린 매는 한번 불러주기를 기다립니다.君能微感激(군능미감격), 어르신께서 조금이나마 알아주신다면,亦足慰榛蕪(역족위진무). 황량한 제 마음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두보가 이토록 관직을 추구했지만 겨우 미관말단직에 전전해야 했으니, 그가 당시에는 명성을 크게 드날리지 못하고, 그의 사후에 명성이 크게 드러났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관말직은 또한 그를 구속하기에 친구를 자주 만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술도 마음껏 마시지도 못하는 단점도 지녔다.

그래서 < 좁은 곳을 지나 필요에게 줌(逼仄行贈畢曜) > 에서,逼仄何逼仄(핍측하핍측)! 좁기는 또 얼마나 좁은가!我居巷南子卷北(아거항남자권북). 나는 마을 남쪽에 살고 자네는 북쪽에 숨었구나.可恨鄰里間(가한린리간), 이웃해 살면서 한스러운 것은,十日不一見顔色(십일불일견안색). 10일 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것.自從官馬送還宮(자종관마송환궁), 스스로 관청의 말을 쫓아 궁으로 갔다고 돌아오는데,行路難行澁如棘(행로난행삽여극). 가는 길이 어렵기가 가시덩쿨처럼 막혔다.我貧無乘非無足(아빈무승비무족), 나는 가난하여 탈 것이 없어 걸어가야 하는데,昔者相過今不得(석자상과금부득). 옛날엔 서로 만났지만 지금은 그러지도 못한다.實不是愛微軀(실불시애미구), 실로 하찮은 몸을 아끼는 것도 아니고,又非關足無力(우비관족무력). 발에 힘이 없던 것과도 관련이 없다.徒步翻愁官長怒(도보번수관장노), 시름을 없애며 걷다보면 상관이 화를 내니,此心炯炯君應識(차심형형군응식). 불편한 이 마음 그대는 분명 아실거요.……街頭酒價常苦貴(가두주가상고귀), 길거리의 술값은 평소 아주 비싸서,方外酒徒稀醉眠(방외주도희취면). 외지의 술꾼은 술에 취해 잠들기가 어렵다.徑須相就飮一鬪(경수상취음일투), 곧바로 친구 찾아가 술을 다투듯 마시니,恰有三百青銅錢(흡유삼백청동전). 마치 돈을 삼백냥이나 가진 듯 하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 臘日 > 에서 "마음껏 술마시는 것은 좋은 저녁을 택하여 취하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은 궁전에서 조회하고 비로소 흩어질 때다.(縱酒欲謀良夜醉, 還家初散紫宸朝.)"라고 밝히고 있다.

관직을 추구해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니, 두보는 늙어갈수록 관직과 명성보다는 더욱 술에 침잠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음주를 어떻게 즐기자고 했는지 살펴보자.< 곡강(曲江) > 2수 중 제1수……細推物理須行樂(세추물리수행락) 만물의 이치를 헤아리며 인생을 즐길 일이지,何用浮名絆此身(하용부명반차신) 뭣 하러 헛된 명성에 얽매여 살겠는가?< 曲江 > 제2수……傳語風光共流轉(전어풍광공류전), 전하는 말에 경치도 모두 흘러가는 거라고 하니,暫時相賞莫相違(잠시상상막상위). 잠시나마 봄을 즐겨야지 이를 어기지 말자.< 취중의 노래(醉時歌) >……儒術於我何有哉(유술어아하유재), 학문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孔丘盜跖俱塵埃(공구도척구진애). 공자와 도척이 모두 죽어서 흙먼지가 되었는데.不須聞此意慘愴(불수문차의참창), 이 말을 듣고 굳이 서글퍼 할 필요가 없으니,生前相遇且銜盃(생전상우차함배). 살아있을 때 서로 만나 또 술이나 한 잔 합시다.< 흥에 겨워 절구를 짓다(絶句漫興) > 제4수……莫思身外無窮事(막사신외무궁사), 몸 외의 끝없는 일들일랑 생각지 말고,且盡生前有限杯(차진생전유한배). 생전에 먹을 한정된 술이나 다 마시길.< 물가의 난간에서 근심을 풀다(水檻遣心) > 二首 중 제2수……不堪支老病(불감지로병), 늙음과 지병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何得尚浮名(하득상부명)? 어찌 헛된 명성을 따르겠는가?淺把涓涓酒(천파연연주), 얕게는 술잔을 들고 입으로 술을 흘러 넣고,深憑送此生(심풍송차생). 깊게는 이것에 의지하여 이생을 보내려한다.< 마음을 풀다(遣意) > 二首 < 제1수 >……衰年催釀黍(쇠년최양서), 늙은이는 기장으로 술담그라고 재촉하고,細雨更移橙(세우갱이등). 가랑비는 등자나무 의자를 옮기게 한다.漸喜交遊絕(점희교유절), 교유가 끊어지는 것이 점점 좋고,幽居不用名(유거불용명). 그윽하게 사니 명성도 필요없다.< 되는대로 짓다(漫成) > 二首 < 제1수 >……只作披衣慣(지작피의관), 단지 옷을 풀어헤치는 게 습관이고,常從漉酒生(상종록주생). 항상 술을 거르며 산다.眼邊無俗物(안변무속물), 눈가엔 속세의 물건이 없으니,多病也身輕(다병야신경). 병이 많아도 몸은 가볍다.

이것은 '질성자연(質性自然)'한 도연명(陶淵明)이나 조은(朝隱)을 알고 불가에 심취하기도 한 백거이(白居易)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두보는 빈궁한 가운데서도 술을 통해 삶의 근심을 잊고자 했지만 도연명과 백거이처럼 약간 달관의 경지에 이른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옛 사람들이 항상 말했듯이 인생은 유한하니, 눈앞의 한잔 술을 마시는 것이 낫다는 이치를 이미 깨달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은거하거나 불가에 귀의하지도 않고 끝내 속세에 남아서 백성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를 승화시켜, 천고의 명작 '삼리삼별(三離三別)' 등을 남겼으니, 그에게 '시성(詩聖)'이나 '시사(詩史)'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는 것이다.

술은 두보에게 이러한 주옥같은 시를 남기도록 시름을 풀어주고, 고통을 함께 나눈 평생의 반려자 같은 것은 혹 아니었는가? 술은 곧 이백과 두보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보는 대주가라기보다는 오히려 빈궁으로 고통받는 애주가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명대 하수방(夏樹芳)이 지은 ≪주전(酒顚)≫의 <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옛날을 회고했지만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했다(酒酣懷古人莫測) > 는 항목에서, 두보의 주량과 시재가 이백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고 하고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옛날을 회고했다고만 밝히고 있을 뿐 그 흔한 대주가의 고사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그는 대주가가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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