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00년] 저임금·폭력.. 화재·전염병 참상까지.. '지옥 탄광' 악명

2010. 4. 2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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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기획 잊혀진 만행… 일본 戰犯기업을 추적한다제2부 낯선 기업, 숨은 가해자④ 아소, 골수우익 가문의 탄광 잔혹사

요코가와 데루오(69)씨는 취재팀을 어린이 놀이터로 안내했다. 그간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각종 탄광과 광산, 조선소 자리, 공장 터 등을 두루 찾아 다녔지만 놀이터는 뜻밖이었다.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이즈카(飯塚)시 게이센초 야사카 마을에 위치한 한적한 주택가. 지붕에 기와를 얹은 단층의 공민관(주민회관) 건물이 한쪽에 있고 그 옆 공터에 노란색 미끄럼틀과 그네, 뱅글뱅글 돌아가는 지구봉 놀이기구가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었다.

"여기 놀이터 자리에 탄광 노무자들 공동묘지가 있었지요. 이곳 아소광업 요시쿠마 탄광에서 일하다 죽은 조선인들이 묻혀 있었습니다. 공민관 자리에서 저기 그네 있는 곳까지 땅 밑에…. 화장해서 사찰에 안치하면 돈이 드니까 아소 측에서 묘비도 없이 그냥 여기다 매장한 것입니다."

요코가와씨는 나지막하면서도 또박또박한 말투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이즈카시 일대의 공·사립 고교에서 오랫동안 지리 교사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뒤 일본 내 양심적 민간단체인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 사무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소광업 산하 탄광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조선인 노무자 역시 가장 많았던 요시쿠마 탄광은 1960년 폐광했다. 이후 주민들은 이 묘지의 존재도 서서히 잊었다. 그러다 1985년 마을 공민관을 짓느라 불도저로 땅을 파다 보니 사람 뼈가 나왔다. 노인들은 그 자리에 묘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땅 주인인 아소 측은 시신 발굴에 착수해 모두 504명분의 유골을 수습했다. 좁은 장소에 유골이 그렇게 많이 묻혀 있어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지난 1월 21일, 아침부터 짙은 먹구름이 낮게 깔려 몹시 흐린 날씨. 유골이 옮겨졌다는 납골당으로 향했다. 놀이터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 떨어진 야산 한 귀퉁이. 차에서 내려 갈대가 우거진 언덕의 샛길을 따라 올라가 보니 초라한 외관의 납골당이 나타났다.

그러나 납골당에서 조선인 유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가족이나 본적지 등 연고가 없는 이들의 유골이었다. 그나마 언젠가부터 납골당 지하실에 무분별하게 버려져 개별 신원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처음부터 연고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제 터전에서 뿌리 뽑혀 먼 이국땅에서 쓸쓸히 객사한 뒤 시신마저 방치됐을 뿐이다.

요시쿠마 탄광에는 조선인의 또 다른 비극이 어려 있다. 1936년 1월 25일 큰 눈이 내려 몹시 추운 날 밤 10시쯤, 탄광 갱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광부 86명이 갱 안에서 작업 중이었는데 피신하지 못한 29명이 끝내 주검으로 발견됐다. 그 중 25명이 조선인이었다. 당시 아소 측은 불이 탄진(炭塵·갱내 안 공기 속에 떠다니는 미세한 석탄 가루)에 옮겨 붙으면 화재가 커질 수 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도 입구를 갱목으로 막고 틈새마다 점토를 발라버렸다. 화재 사흘째 되는 날 입구를 열어 보니 광부들이 밀폐된 벽 안쪽에 차례차례 쓰러져 죽어 있었다. 출구를 찾아 처절하게 발버둥친 듯 손톱이 다들 벗겨진 상태였다.

일주일 뒤인 2월 1일 발행된 재일조선인 신문 민중시보(民衆時報)에는 '탄광지옥의 희생'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탄광이 폭발하야 애닯푼 로동에 억메인 동포들의 생명을 무참히도 빼앗고 말엇다. 일반적 생산부문에서 완전히 도태를 당하고 오직 위험로동에 호구의 길을 어더 말할수업는 로동조건에서 노예적으로 노역하는 이들에게…. 조난자의 대다수는 조선 로동자로서 유족들의 설음에 잠긴 울음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곰 눈물을 먹음게하고 목불인견의 처참한 사체는 보는 사람의 가삼에 눈물겨운 비분을 늣기게 하고잇다…."

아소 탄광은 예로부터 최악의 작업환경으로 악명 높았다. 여기서 말하는 아소 탄광이란 후쿠오카현 소재 요시쿠마, 아카사카, 가미미오, 쓰나와키, 산나이, 마메다, 요시오, 아타고 탄광과 사가(佐賀)현에 위치한 구바라 탄광 등 아소광업 산하 총 9곳의 탄광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이곳 징용자들은 다른 탄광보다 더 심한 폭력적 압제와 저임금에 시달렸다. 게다가 전염병으로 인한 참상까지 겪어야 했다.

스물한 살 때인 1943년 아카사카 탄광에 끌려갔던 공재수(87·서울 월계동) 할아버지는 이렇게 회상한다.

"43년 6월경에 장티푸스, 그게 모두 걸려 가지고 우리 환자가 병원에 한 150명 갔을 거예요. 첫 날은 보니깐 뭐 병원이라고 창고에 다다미 깔아 놓고 (환자들을) 쭉 집어넣었어요. 근데 하루 저녁만 자고 나면 20∼30명씩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간호사 보고 '옆 사람 어디 갔느냐'고 그러니깐 '아 뭐 어디 다 갔다'고 하더라고요. 어디 나간 게 아니고 전부 죽은 거예요. 전염병으로 150명가량 이즈카시 병원으로 갔는데, 나올 적에는 몇 명이 안 됐어…."

요코가와씨는 취재팀에 1944년 3월 후쿠오카현 경찰부 특별고등과에서 작성한 '노무동원계획에 의한 이입(移入) 노무자 사업장별 조사표'를 건네줬다. 겉표지에 '극비'라고 표시된 이 문건은 지역 내 조선인 노무자 현황을 세세히 기록한 것이다. 요코가와씨가 현립도서관에서 조선인 관련 자료를 끈질기게 뒤지다 1992년 발견했다고 한다.

문건을 보면 1944년 1월 말 현재 후쿠오카현 내 석탄·토건·공장·금광 등 각 기업 작업장에서 동원한 조선인 총수는 11만3061명이었다. 그 가운데 아소 탄광 '이입자 수'가 7996명을 기록해 단일 기업 중 단연 최다로 나타났다. 그런데 아소 탄광 조선인 노무자의 '현재 인원'은 2903명에 그쳤다. 나머지는 '탈주' 4919명, '발견재취로'(탈주 노무자를 잡아 다시 탄광에 보낸 경우) 643명, '사망' 56명 등이다. 탈주자 비율이 다른 기업 작업장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고 사망자도 가장 많았다. 그만큼 아소 탄광의 노동조건이 혹독했음을 보여준다.

아소 탄광은 현 아소 그룹의 모태였다. 이 그룹의 정치적 배경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일본 보수우익 세력의 한 축을 이루는 아소 일가의 중심에 아소 다로(麻生太郞·70) 전 총리가 있다. 아소 전 총리의 증조부와 부친이 모두 중의원을 지냈고, 외조부는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 전 총리, 장인은 스즈키 젠코(鈴木善幸·1911∼2004) 전 총리다.

부친 지역구(후쿠오카 8구)를 물려받아 9선 의원을 지내며 자민당 내 우파의 기둥으로 성장한 아소 전 총리는 우리에게 '망언 제조기'로도 유명하다. "창씨개명은 조선 사람들이 원해서 한 것"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위안부 결의안은)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것"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타국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등등. 물론 아소 탄광의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에 대해서도 부인과 회피로 일관해 왔다.

아소 탄광은 1970년대까지 차례로 다 폐광했다. 탄광 터에서는 이제 골프장이 운영되고 있다. 요시쿠마 탄광의 폐석산(탄을 골라내고 남은 쓸모없는 돌을 오랫동안 한자리에 버리면 하나의 산을 이룬다)을 깎아 1973년 그 자리에 들어선 게 27홀 규모의 '아소 이즈카 골프 클럽'이다. 일본에서도 고급 골프장으로 꼽힌다는 이 클럽의 이사장이 아소 전 총리다.

조선인 노무자들의 한(恨)이 곳곳에 배어 있는 땅 위에서 오늘도 아소 일가를 포함한 일본 상류층 인사들은 필드를 돌며 '굿 샷!'을 외치고 있다.

이즈카(후쿠오카현)=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key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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