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호 덕성늘푸른교회 목사 "대학사역은 그 곳에 있어야 하기에 하는 것"

2010. 2. 19.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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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역을 계속하라는 하나님의 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20일 결혼을 한다는 전경호(50) 목사는 쑥스러움과 비장함이 섞인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2007년 덕성여대 앞에서 덕성늘푸른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던 중 아내를 잃었다. 아내의 허리디스크 검사를 위해 간 병원에서 우연히 뇌종양을 발견했고, 수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던 아내는 결국 그해 세상을 떠났다.

여대생 사역을 막 시작한 전 목사로선 고민에 휩싸였다. 홀아비 목회자로 여대생 사역을 한다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았다. '사역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까?'라며 하나님 앞에 원망을 쏟아냈다. 하지만 하나님 뜻은 여대 캠퍼스 사역을 접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병간호로 목회와 캠퍼스 사역에 전념하기 어려울 때도 교인 수가 꾸준히 늘어났던 것이 그 이유였다. 올해 큰딸을 대학에 입학시킨 전 목사는 잠시 주춤했던 여대 캠퍼스 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다.

전 목사는 2004년 한 선교단체의 수련회 강사로 덕성여대를 처음 방문했다. 당시 덕성여대는 학내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전도나 예배, 사역을 위한 모금 등 어떤 사역도 학내 분규라는 큰 벽 앞에 가로막혀 있었다. 몇몇 기독 학생들은 절망한 채 아예 사역을 접으려 하고 있었다. 마침 사역지를 찾고 있던 그는 캠퍼스를 위해 울고 있는 학생들을 외면할 수 없어 덕성여대 캠퍼스 사역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2005년 개강과 함께 그는 덕성기독인연합회(덕기연) 지도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명목뿐이던 기독교수회와 직원 신우회를 찾아가 매주 성경공부와 예배를 인도했다. 시험 기간엔 커피와 음료수를 학생들에게 돌렸다. 교수들의 소장품인 책과 액세서리, 옷 등을 무료로 나눠주는 이벤트도 벌였다. 어버이날엔 "우리 학교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어머니(청소부)께 감사합니다"란 포스터도 붙였다. 덕기연 이름으로 뮤지컬 '루카스' 초청공연도 했다. 비용은 주로 70여명 되는 덕성늘푸른교회 교인들과 지역교회 후원, 전 목사의 사비로 충당했다.

학내 구성원들이 덕기연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학교 홈페이지 나눔방엔 "캔커피가 좋았다" "앞으로도 뮤지컬 공연을 계속했으면 좋겠다" "덕기연 파이팅" 등 학생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전 목사는 "지금은 말로 전하는 복음만이 아닌 눈으로 보여주는 복음이 필요한 시대"라며 "비록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액션들을 통해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백그라운드(환경)도 조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음달 28일에는 교회 교육관을 빌려 청소년 쉼터사역도 시작한다. 지역 중학생 15명에게 덕기연 학생들이 직접 학과 공부와 예체능을 가르칠 예정이다. 지역교회와 함께하는 사회적 기업도 올해 내 열기로 했다. '덕기연이 있어서 우리가 나아지고 있구나' 하는 걸 일반 학생들은 물론 이 지역 주민들도 느끼게 하겠다는 게 전 목사의 바람이다.

사실 전 목사의 캠퍼스 사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서울 월계동 장석교회(이용남 목사) 부목사로 있던 1997년부터 그는 광운대에서 비슷한 사역을 했다. 광운대 교수들의 요청으로 장석교회에서 파송받은 그는 처음엔 교수 성경공부만 인도했다. 하지만 교수들의 부탁으로 대학생 성경공부와 연합모임 인도 등 사역 범위가 차츰 넓어졌다. 이렇게 2년을 사역하던 그는 결국 교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사역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전 목사는 광운대에서 4년을 더 사역했다. 그동안 연합모임 활성화는 물론 '기독교와 서양문화'가 교양과목으로 개설되고, 학교의 요청으로 1주일에 한번 학생들에게 상담도 하는 등 많은 결실을 거뒀다. '광운대는 기독교학교'란 소문이 교내에 퍼졌을 정도다. 그는 2003년 아는 후배에게 이 사역을 맡기고 새로운 개척에 나섰던 것이다.

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보다 캠퍼스 개척사역을 하면서 그는 잃은 게 많다.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고, 기존 선교단체들로부터는 '또 다른 선교단체 아니냐'며 오해를 받기도 했다. 월급이라고는 교회 부목사 시절과는 비교가 안되는 130만원이 전부다. 더군다나 사역의 대상인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떠나버리고 만다. 캠퍼스 사역의 가능성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가능성이 있어서 사역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캠퍼스에 있어야 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선교단체들이 많이 위축돼 있는데 이것은 선교단체만의 책임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만 탐했던 한국 교회의 책임도 큽니다. 지금은 선교단체만으로는 역부족이기에 한국 교회가 나서서 선교단체의 지원군이 되고 캠퍼스의 불쏘시개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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