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한장에 울고웃는 사람들을 봐주세요!

2009. 10. 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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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고두환 기자]

멀리서 봤을 땐 빨래를 널어놓은 줄 알았는데, 무너진 집 위로 쳐져 있던 빨랫줄에 떠내려온 쓰레기가 걸려 있는 어이없는 광경이다.

ⓒ 고두환

'288명 사망, 42명 실종, 83억페소 재산피해(한화 2200여억원), 수재민 4백여만명, 500여개 임시대피소 운영…' - 10월 4일(일), 태풍 '켓사나(Ketsana)' 피해 상황에 대한 필리핀 국가재난비상국(NDCC) 발표 내용

한 주가 지나면 피해상황이 정리될 법하건만, 필리핀엔 또다른 태풍 '파르마(Parma)'가 루손 북부 지역에 맹위를 떨치며 14명의 인명을 더 앗아갔고, 다가오는 태풍 '메롤(Melor)'의 경로가 시시각각 알려지고 있다. 민다나오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진도 6.6의 지진 소식은 말 그대로 뉴스로 치부되는 상황이니, 지금 필리핀 상황이 얼마나 복잡다난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주, 필리핀 대통령 아로요는 메트로 마닐라와 20여개주에 선포했던 '재난령'을 국가 전체에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여러가지 이유로 폭등하는 물가를 유지시키기 위함이 하나의 이유였고, 연이어 다가오는 태풍에 대한 대비를 하기 위함이 둘의 이유였다.

"필리핀을 왜 도와야 할까요?""와서 한 번 본다면, 그리고 여기에 펼쳐지는 상황을 그대로 이해한다면, 누구라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입니다"

구호활동에 참가한 한 자원봉사자는 자기 활동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었다. '표' 한 장이 가지는 의미

씻어도 씻어도 씻기지 않는 진한 흙 때.

ⓒ 고두환

실랑안 바랑가이 클리맨샤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NGO 아시안브릿지의 모습.

ⓒ 고두환

실랑안 바랑가이는 여전히 정리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저지대로 들어갈수록 진흙이 늪처럼 펼쳐져 있는 곳을 쉽사리 볼 수 있었고, 여기저기 늘어진 쓰레기들 위에 무너져버린 집 자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닦아도 또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흙물을 흙탕물에 열심히 닦고 있는 사람들, 무너진 짚 앞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또다시 비가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폐허 같은 곳에서 끊임없이 놀거리를 찾아 뛰어노는 아이들까지. 희망이라는 단어조차 사치인 것 같은 그 곳에 하늘은 줄기차게 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비가 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더라도, 이들은 그 주변을 추스린 뒤 또다시 자신들이 꿈꾸는 보통생활로 돌아가야 할 터, 그렇기에 그 기간까지 여러 단체들은 '긴급구호'라는 명목하에 기본 생활을 해낼 수 있는 구호품을 공급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구호'가 여러가지 이유로 그리 쉽지 않은 것이 지금의 필리핀이다.

"실랑안 바랑가이에 공급할 물을 사려고 퀘존 시티 내 몇 개 쇼핑몰을 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실랑안 바랑가이에 긴급구호 활동을 하고 있는 NGO 아시안브릿지 인턴 김근교씨는 생필품이 생각보단 그리 넉넉치 않다고 말했다. 연이어 다가오는 태풍들 탓에 사람들이 사재기를 하고, 각종 단체에서 구호품을 위해 물건을 대량 구입하다보니 자연스레 공급이 부족한 탓이었다. 거기에 수해지역 곳곳에서는 바랑가이 홀(우리나라의 동사무소 정도)을 통해 들어가는 구호물품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고 있었다.

실랑안 바랑가이에서 살아가는 '제디오'씨는 "바랑가이 홀에서는 자신들과 친한 사람들한테만 구호품을 준다"며 "이쪽 동네(저지대 부근)에 사는 사람들한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 말을 하는 중간에 마을 청년조직 'BSYF(bagong silangan youth federation)'의 한 청년은 '제디오'씨에게 "그래도 어제 다른 단체에서 들어온 구호품 받으셨잖아요"라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른 구호품이 도착할거라 그녀를 안심시키고 있었다.

파란색 '표' 한 장을 쥔 아주머니. 표만 쥐고 있다면 어떻게든 구호품을 받을 수 있다.

ⓒ 고두환

우선 구호대상인 노약자들을 대상으로 수인성 질병 예방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는 적십자 직원의 모습.

ⓒ 고두환

한편, 구호품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나, 조금 더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선별하여 긴급구호를 진행하고 있는 아시안브릿지나 필리핀 적십자는 지역조사를 통해 미리 '표'를 나누어준 뒤 해당 사람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고 있었다.

지난 2일(금), 실랑안 바랑가이 '클리맨샤(clemencia)' 지역에 구호품을 공급하는 아시안브릿지의 구호행렬을 13살짜리 '깔로'는 끊임없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깔로네 집 역시 얼마 전 다른 단체 구호품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구호품 중에 섞여있는 삶은 계란 하나가 소년은 못내 먹고 싶었던 탓이었다.

"표 한 장만 주세요."깔로는 어느 새 내 옆으로 다가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정된 모금액과 구호품은 모든 이에게 전달되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꼬깃꼬깃 접힌 '표' 한장은 그렇게 사람들 희비를 가르고 있었다.

긴급구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필리핀 적십자 역시 구호품 전달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수천명의 이재민이 대피하고 있는 실랑안 초등학교에 적십자 차량이 들어가자마자 교문은 굳게 닫히고 철문 밖에 매달린 사람들은 '우리에게도 구호품을 달라'며 무수히 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이방인에게 "취재가 필요합니까?"라고 물어본 뒤 조심스레 문을 열어주던 적십자 직원의 굳은 표정은 아직까지 뇌리에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적십자 '표'를 받은 사람들은 설명에 따라 노약자와 아이들부터 가장 먼저 구호품을 받기 시작했고, 수인성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간단한 내용들을 교육받기 시작했다. 적십자 봉사활동에 참여한 대학생 '젤로'씨는 "자원봉사자들이 인간 띠를 만들어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구호품 근처에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서야 하는데, 이 과정만큼 힘든 것은 없다"며 고충을 털어놓았다.

구호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공정함'을 고민하여 만들어낸 '표'는 이런 뜻이었다. 최선을 고민하지만, 최상인지 항상 고민하게 되는 구호방식, 이들은 오늘도 어떤 것이 더 공정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졸졸 ?아다니던 꼬마아이.

ⓒ 고두환

낑낑대면서도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 구호품을 받아든 소년.

ⓒ 고두환

반복되는 침수, 긴급 구호 이후를 고민해야

사람의 변, 가축의 변, 그리고 진흙이 한 곳에 뒤엉켜 악취가 코를 치르는 곳에서 한 꼬마는 사진을 찍어달라며 내 손을 잡아 챘다. 무거워서 낑낑대면서도 손에 쥔 삶은 계란을 보며 연신 웃어대는 소년은 내게 밝은 미소를 보내주었다. '표'를 받아 구호품을 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집으로 가는 길에 그 구호품을 이웃들과 나누고 있었다. 악취보다 진한, 사람 사는 냄새는 그렇게 실랑안 바랑가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국가재난비상국 조사 결과 다른 지역에 비해 피해규모가 큰 편인 실랑안 바랑가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시안브릿지의 코디네이터 '로즈비'씨는 다음과 같이 이 곳 상황을 설명했다.

"저지대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정부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하여 살아가곤 합니다. 그곳은 적건 크건, 상습적으로 침수되기에 정부에선 이들에게 이곳을 떠날 것을 권고하지만 이들에겐 선택이 없습니다. 근방에 직업이 있고, 옮겨서 살아갈만한 여력이 없기 때문이죠. 일거리가 있는 곳에 어느 정도 지원이 담보되는 현실적인 이주대책, 그것이 실랑안 바랑가이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퀘존 시티에서 살아가는 자원봉사자 '버치'씨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이곳을 최소 정부라면 꾸준히 지원해야 하는데, 필리핀 정부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긴급구호 이후에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면 이들은 또다시 이런 재난을 만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라며 역시 현실적 대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생활수준에 이르기 전, 우리 역시 구호대상국이였던 사실을 기억하는 김병빈 당진환경운동연합 전 사무국장은 구호활동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뒤 "긴급구호를 담당하는 단체들의 지금 활동도 무척 소중하지만, 왜 이들은 이런 재해를 만났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이 부분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물에 잠긴 뒤 고치기도 힘들텐데, 진흙 때가 쉽사리 지지 않을텐데. 사람들은 부던히 냉장고를 닦고 있었다.

ⓒ 고두환

이 지역은 당장 빵이 필요하고, 물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다. 모으기도 사기도 애매한 속옷은 수해지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부족한 품목 중 하나이다. 하지만 긴급구호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끊어지고, 집을 다시 짓고 안정된 생활을 하기에 충분한 여력이 없는 이들은 이 곳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리잡고 살아가다가 또다른 재해를 만날 것이다. 그럼 많은 사람들 역시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또다시 긴급구호에 발 벗고 나설 것이다.

필리핀엔 수많은 구호단체 및 각종 NGO, 재단 등이 저마다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한국 관련 조직의 수도 상당한 편이다.

이들은 지금 고민해봐야 한다. 긴급 구호, 그 이후엔 그들과 그들의 후원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재해와 인재의 사이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구호'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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