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 지구촌―신창호] 미국의 잔디깎기

2009. 7. 2.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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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도가 넘는 찜통 더위가 수일째 계속되고 있는 탤러해시에선 요즘 잔디 깎기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습한 날씨와 따가운 햇볕으로 잔디가 마치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는 개인 주택, 건물뿐 아니라 도로변과 중앙분리대 등 도시 전체가 파란 잔디 일색입니다. 도심을 제외하면 건물보다 잔디가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잔디 깎기가 얼마나 큰 작업인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자기 땅을 가꾸는 주택 소유자와 건물 주인들은 그렇다 쳐도, 도시 구석구석의 자투리 땅까지 다듬는 시청은 가끔씩 이해가 잘 안될 정도로 잔디 깎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잔디 깎기와 정원 가꾸기는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과도 같은 것입니다. 주택 소유자들은 주말마다 모우어를 밀며 땀을 뻘뻘 흘립니다. 길쭉한 잔디와 지저분한 정원을 방치하는 사람은 다른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받는가 하면, 벌금까지 내야 합니다. 관공서와 건물 주인들은 정원 관리를 전문으로 하는 용역 회사에 맡겨 적어도 열흘에 한 번은 잔디를 깎습니다.

문제는 사방 팔방으로 뻗은 도로망 주위의 잔디밭 손질입니다. 넓은 땅에 비해 드문드문 주민이 살고 있는 시골길도 미국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냥 방치해 두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정해진 기한을 두고 잔디를 깎습니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의 도로가 금방 깎여진 주변 잔디밭 사이로 이어지는 광경을 대하면 "도대체 이 작업에 얼마나 돈을 들인 걸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에는 단 하나의 잔디 포기도 튀어나와 있지 않습니다. 마치 서울 상암동 축구장처럼 일정한 모우어 자국이 끝없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잔디 깎기 작업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조금이나마 미국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잔디 정리 용역회사 운영자들은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 등이 상당수입니다. 용역 일거리가 많아 상당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역회사 잡역부들은 대부분 멕시코 등 남미 출신 히스패닉입니다. 이들은 영어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하며 사회보장 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 값싼 임금에도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개중엔 불법 체류자도 상당합니다. 미국인 하류 계층은 사회 보장 혜택과 실업 급여만으로도 생계가 보장되는 경우가 많아 3D 업종에 취직하길 꺼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잔디 정리작업에서 가장 힘든 일을 담당하는 주역은 바로 주 정부와 연방 교도소 죄수들입니다. 넓은 면적의 잔디밭을 쉽게 깎을 수 있는 대형 트랙터 모우어 작업과는 달리 일일이 걸어다니며 아스팔트와 잔디밭 사이를 정리해야 하는 '경계선 트리밍' 작업의 담당자들입니다.

족쇄를 찬 채 뜨거운 땡볕 아래 일하는 이들 옆에는 실탄이 가득한 장총을 찬 보안관들이 지킵니다. 노역형을 선고받은 죄수들은 미국 사회에서도 가장 힘든 일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오늘도 집으로 가는 길에는 '연방 교도소 죄수들 작업 중'이라는 임시 안내판이 내걸려 있습니다. 조금 지나니 잔디밭 그늘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는 줄무늬 모양 옷을 입은 죄수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탤러해시(美 플로리다주)=신창호 차장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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