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어린 예술가를 찾아나서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2009. 1. 1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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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김영하/랜덤하우스코리아

바쁜 일상 내려놓고 만난 시칠리아… 중년 소설가의 내면을 투사하는 여행 에세이

그는 아침이면 일어나 허둥지둥 학교로 향했고 저녁이면 방송 녹음을 위해 여의도로 향했다. 밤 11시 반에 집에 도착하면 주차할 공간을 찾아 헤매야 했다. 틈틈이 연재소설을 써야 했고 수업 준비를 해야 했다. 이 빡빡한 나날들에 대해 그는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것 같다"고 말했다. 아내가 말했다. "다 그만둬, 너무 힘들어 보여."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에 사직서를 냈고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그만두었다. 마침 연재하던 소설도 막바지였다. 캐나다 밴쿠버의 한 대학에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서재를 메우고 있던 책과 입지 않을 옷들도 내다 팔거나 버렸다. 그는 지난해 5월 아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면서 이탈리아 시칠리아를 경유지로 택했다. 2007년 12월 모 방송국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인연을 맺은 곳이다. 가진 것들을 다 내려놓고 달랑 아내만 챙겨(?) 떠난 그는 이탈리아 철도원 파업으로 시칠리아의 관문인 메시나 항구에 직접 닿지 못하고 밀라노를 경유해야 하는 불편을 겪는다. 그러나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너 시칠리아 북쪽 바다에 위치한 화산도 리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작가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 발코니에 나가 글을 썼다.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좁은 골목이라 대체로 조용한 편이지만 아침에는 새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아침 8시 반이면 동네 빵집으로 빵을 사러 나간다."(71쪽)

그는 햇빛이 쏟아지는 발코니가 붙은 아파트를 계약했고 스쿠터를 빌려 리파리 구석구석을 쑤시고 다녔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원형극장에 앉아 있을 때는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다시 음미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셔틀버스를 타고 연세대 원주캠퍼스로 내려가 학생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노천극장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88쪽)

리파리는 두 얼굴의 섬이었다. 잠깐 왔다 가는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얼굴과 오래 남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얼굴이 있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순간, 리파리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버릴 것 같은 여행자의 달콤한 고독은 관광객이 느끼지 못하는 쾌감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쿠터 예찬을 쏟아놓는다.

"나는 붉은 와인을 마시며 집 앞에 세워둔 뚱뚱하고 귀여운 스쿠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쿠터란 어딘가 나귀를 닮은 기계였다. 어쩌면 오늘 다녀온 길도 과거에는 고집 센 나귀들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을 것이다."(111쪽)

리파리를 떠나 지중해의 요새도시 마오르미나를 거쳐 시칠리아로 이어지는 여정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자신을 내려놓는 동안에 다시 만나게 되는 자기 자신이었다. 어느새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중년의 사내가 되어버린 그는 이번 여정을 통해 버리고 비우는 동안 자신이 그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무엇을 잊었는지 깨닫는다.

바쁜 일상에 치어 영혼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그에게 리파리와 시칠리아는 그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내면을 투사하는 판타지적 장소였다. 내 안의 어린 예술가를 찾아 나선 소설가 김영하 이야기다. 부제는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정철훈 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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