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방현석] 퍼와 포,나짱과 나트랑

2008. 12. 3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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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대한 기호가 다양해지면서 베트남 음식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 중에서도 쌀국수의 인기가 으뜸이다. 쇠고기와 해물 등을 넣고 국물을 우려낸 국수도 있지만 닭고기를 넣고 우려낸 담백한 국물 맛이 압권이다.

결을 따라 얇게 닭고기를 찢어 넣고 숙주나물과 저민 고추, 레몬 즙을 뿌린 깔끔한 쌀국수를 생각하면 침이 꼴깍 넘어간다. 쌀국수를 먹고 싶을 때마다 베트남에 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서울에 있는 베트남 음식점을 찾는데, 특유의 양념 '지저우'와 독특한 향내를 지닌 야채 '라우무이'가 빠진 맛이 좀 밋밋하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먹을 만하다. 베트남에서 서민들이 간단하고 저렴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음식에 된장찌개 두 그릇 값을 받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베트남 음식점의 간판이다. 우리나라의 쌀국수 전문점들은 대부분 가게 이름의 맨 앞 글자에 '퍼(Pho)'를 붙이고 있다. '퍼'는 베트남어로 쌀국수를 뜻한다. 그런데 베트남어로 번듯하게 '퍼'라고 써놓고 한글 표기는 한결같이 '포'라고 해놓는다. 이것은 베트남어 'Pho(퍼)'를 비슷한 영문인 'Pho(포)'로 간주하고 읽는 것이다. 이는 주권을 가진 한 나라의 독립적 언어에 대한 폭력적인 무시가 아닐 수 없다. 베트남어에서 'o'와 'o'는 우리말 모음 'ㅗ'와 'ㅓ'처럼 발음이 전혀 다른 모음이다.

아마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를 이렇게 엉터리로 표기했다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다 당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음식이 그 나라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문화라면 언어는 그 나라 사람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정신문화의 토대다. 한 나라의 음식을 팔면서 그 나라의 언어를 제 맘대로 짓뭉개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아마 미국 핑계를 댈지 모른다. '세계적인 쌀국수 전문점'을 내세우고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는 쌀국수 전문점 '포'무엇의 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역시나 미국에 있는 본사 홈페이지에는 베트남어로 'Pho'라고 커다랗게 상표를 붙여놓고 영문으로 Pho라고 써놓고 있었다. 이것이 20세기를 이끌어온 서구중심주의자들이 태연하게 저질러온 야만이다. 베트남의 음식문화를 세계에 팔아 로열티를 챙기면서 베트남 국어를 제멋대로 바꿔놓는 미국의 장사꾼을 한국도 본받겠다는 것인가.

장사하는 사람들만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서 발행된 베트남 투자, 여행안내서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도시가 '나트랑'이다. 베트남에는 '나트랑'이라는 도시가 없고, 외국인을 자주 상대하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나트랑'이 어디인지 모른다. 깜란 공항이 있는 도시를 물으면 더러 '아, 나짱요?'라고 할 것이다. 베트남 동해의 아름다운 해변 휴양지로 소개되는 도시는 '나트랑'이 아니고 '나짱'이다. '나짱(Nha Trang)'이라는 베트남어를 영어식으로 읽고 '나트랑'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서구의 여행 가이드북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베트남에도 한국 음식점이 많이 진출해 있다. 대부분 교민들이 운영하지만 가끔 현지인이 운영하는 곳도 있다. 차림표에 틀린 곳은 더러 있었지만 간판을 틀리게 쓴 곳은 아직 보지 못했다. 한 나라의 음식을 파는 것은 그 나라 사람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시켜온 생활 문화를 파는 일이다. 남의 나라 음식을 파는 일은 그런 문화를 공짜로 가져다 쓰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와 그 나라가 지닌 고유 문화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방현석 중앙대 교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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