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털깎이기계, 진보일까 전통파괴일까

2008. 7. 1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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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오달란 기자]

책 표지

ⓒ 눌와

아버지의 꿈은 시골에 집짓고 농사지으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올해 3월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에 땅을 조금 사신 겁니다.

만만치 않은 대출이자가 걱정되면서도 아버지는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시골에 내려가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벽돌을 한 트럭 사다가 길을 놓고, 펌프시설을 만들고 고라니가 밭을 망치지 못하게 펜스를 치는 고된 작업을 혼자 도맡아 하면서도 마냥 행복해 하십니다.

아버지의 최근 관심사는 농사를 잘 짓는 법입니다. 감자, 상추처럼 별 관리 없이 잘 자라는 작물이 있는가 하면 까다로운 작물도 있습니다.

옥수수와 고구마는 잎이 말라 버렸고, 의욕적으로 심은 고추에는 벌레가 잔뜩 끼었습니다. 아버지는 농협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매달 영농소식지를 받고, 신문에 소개되는 스타 농민에 대한 기사를 수집하는 등 정보 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귀농의 낭만과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안달루시아의 낙천주의자>(크리스 스튜어트 지음, 신소희 올김, 눌와 펴냄)라는 책입니다. 저자 크리스 스튜어드는 십대에 영국 록밴드 '제네시스'의 드러머로 활동하다가 곧 그만두고, 양털을 깎고 여행기를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농촌 마을인 알푸하라스를 둘러보다가 농장 '엘 발레로'에 마음을 빼앗겨 덜컥 계약을 하고 농장을 삽니다. 아내인 아나와는 한마디 상의 없이 일을 저지른 겁니다.

엘 발레로는 아주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름이면 한낮 기온이 40도를 육박하는 덥고 메마른 나날이 계속되지만 크리스는 그늘진 웅덩이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하며 더위를 식힙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벌거벗은 채로 에덴동산을 거닐던 아담처럼 주위에 널린 오렌지, 포도 등의 과일을 배불리 따먹습니다. 칠흑 같은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잠을 청하기도 합니다.

양복쟁이 삶 대신 농사꾼의 삶을 택한 왕년의 드러머

사무실에서 일해 본 6개월을 빼곤 평생 동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아온 크리스는 자신의 선택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오렌지와 아몬드 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강가로 나왔다. 햇빛에 뜨겁게 데워진 바위 위를 지나서, 첨벙거리며 강물을 건넜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이 이글거렸다. 나는 환희에 젖어, 지금쯤 이른 아침의 쌀쌀한 안개 속에서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을 수백 명의 양복쟁이 샐러리맨들과 그들의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떠올려 보았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분명 내가 선택한 이 길이 그들이 선택한 길보다는 나을 거야."

농장의 삶은 이방인에게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수도를 연결하고 집을 수리하고 스페인 농부들이 남성다움의 척도로 평가하는 밭에 물길을 대는 일은 하나 같이 쉽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는 친절한 이웃인 도밍고와 베르나르도의 도움을 받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서서히 농장의 삶에 적응해 갑니다.

안달루시아로 이사 온 첫 해 겨울, 크리스와 아나는 올리브를 첫 수확합니다. 두 사람은 낑낑 대며 500kg의 올리브 열매를 따서 120리터의 올리브 기름을 만듭니다. 1년간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이라 영국의 친구들에게 선물할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급자족의 기쁨을 누리며 채소와 허브 농사에도 정성을 기울입니다.

크리스는 귀농생활에서 뜻하지 않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기계로 양털을 깎는 일꾼이었던 그는 안달루시아 이웃주민들 앞에서 양털 깎이 시범을 멋지게 선보입니다. 오랜 세월 가위로 양털을 깎아 온 주민들은 그의 기술과 양털 깎는 기계에 관심을 보이면서 크리스에게 털 깎기를 부탁하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농사품을 팔며 지내는 아일랜드 출신 히피인 앤드루입니다. 앤드루와 크리스는 언쟁을 벌입니다.

"이봐요, 당신 생각은 아주 틀려먹었어요. 그놈의 기계를 가지고 이곳에 와서 오래된 전통들을 다 말살시키는 일이 정말로 옳다고 생각해요?"

"그게 진보라는 것 아닌가요? 모두들 덕을 보리라는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덕을 보는 건 당신이겠죠, 아마도. 털 깎기를 하러 여럿이 함께 와서는 유쾌하게 웃고, 농담하고, 술 한잔 하고, 양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던 양치기들은 이제 어떻게 되겠소?"

양털깎이 기계는 진보일까, 전통의 파괴일까?

크리스 자신도 마을에 가져온 '진보'에 대해 의구심을 품습니다. 그러나 기계의 편리함이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앤드루와의 말다툼도 계속됩니다.

크리스는 혁명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안달루시아의 양치기들은 중개인을 거쳐야만 시장에 양을 내다팔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개인이 얻는 수익은 상당한 반면, 양치기들의 손에 떨어지는 이익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주민들은 중개인을 사기꾼이라고 부르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헐값으로 양을 넘깁니다.

크리스는 중개인을 거치지 않는 판로를 개척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중개인들의 담합이 굳어진 시장에서 크리스의 양들은 팔리지 않습니다. 중개인에 대항하려던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크리스는 낙담하지만, 주민들은 도리어 그를 위로합니다.

엘 발레로의 어엿한 주인이 된 크리스와 아나에게 아이가 생깁니다. 클로에라는 예쁜 이름의 딸이 태어납니다. 크리스는 농장의 거친 환경이 아이에게 해가 되지 않을지 걱정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클로에는 걱정과 달리 호기심 많은 농장의 아이로 무럭무럭 자랍니다. 클로에는 탄생과 죽음을 일상적으로 경험합니다. 새끼 양이 태어나고, 병아리가 죽는 과정을 한 살 때부터 지켜봤으니까요.

아이는 매일매일 신나게 동굴로 가서, 죽은 염소가 서서히 썩어들고, 여우와 새와 개들에게 뜯어 먹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나 역시 이 모험을 즐기게 되었다. 생명이 사라져가는, 염소의 구체적 존재가 서서히 무로 돌아가는 과정을. 만약 우리가 도시에 살았더라면 공원에나 놀러 다니는 데 만족했을 것이다. 시골 생활의 장점은 이렇게 살다 보면 서서히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시간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초짜 농사꾼이었던 크리스는 귀농 후 5년이 되어가자 농장을 제법 잘 꾸려가게 되었습니다. 어설픈 스페인어를 쓰는 이방인 크리스토발(크리스의 스페인식 이름)에게 완고했던 시골농부들도 마음의 문을 하나 둘 열어주었습니다. 크리스는 아나와 클로에와 동물들과 함께 여전히 엘 발레로에 살고 있습니다. 이 가족은 평화로운 안달루시아의 풍경 속에 자연스레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책의 맨 첫 장에 별로 친절하지 않은 지도 한 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의 생생한 묘사를 따라 자기만의 알푸하라스를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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