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레소토 王國―사니 패스] 부시맨 발길 따라 과거로 간다

2008. 4. 2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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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맨의 고향으로 가는 '사니 패스(Sani Pass)'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고갯길이다.

사니 패스는 해발 3000m 안팎의 드라켄즈버그 산맥을 넘는 구절양장 산길로 남아공과 레소토 왕국을 잇는 13개 도로 중 가장 험준한 코스. 흙먼지 날리는 험로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차가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길인데다 계곡이 깊고 산세가 장엄해 트레킹과 산악레포츠 명소로 더 유명하다.

사니 패스로 가는 출발점은 남아공 쿠아줄루나탈 주의 언더버그. 산 아래 마을이라는 뜻의 언더버그는 해발 1900m에 위치한 아담한 국경마을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4월 남반구의 마을답게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언더버그는 가로수가 울긋불긋 물들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출하고 있다.

'남아공의 스위스'로 불리는 언더버그에서 사니 패스 정상까지는 45㎞. 사륜구동 지프로 약 3시간 동안 산자락을 어지럽도록 빙빙 돌아야 한다. 그래서 가이드를 겸한 지프 운전자들은 움코마자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울퉁불퉁한 도로를 '아프리카 마사지 코스'라고 부른다.

젖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초원을 달려 계곡에 들어서면 해발 1577m 지점에서 '굿 호프 스토어 루인스'라는 폐허 몇 채를 만난다. 1970년대까지 레소토와 남아공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였으나 지금은 양국을 오가는 버스의 정류장으로 이용된다.

대부분의 버스 승객은 남아공에서 노동을 하는 남루한 차림의 레소토 노동자들. 목축으로 살아가는 레소토 사람들은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모두 남아공에서 조달한다. 하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에는 큰 물건을 실을 수 없어 국경을 넘나드는 보따리상들은 지금도 당나귀와 조랑말에 물건을 싣고 다닌다.

사니 패스가 처음 개설된 때는 1955년. 데이비드 알렉산드리아라는 사람이 교역을 위해 길을 열었지만 능선을 타고 넘는 오솔길이라 당나귀를 끌고 내려오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더구나 겨울에는 눈이 녹지 않는 구간이 많아 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70년대에 양국 정부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현재의 새 길을 만들었다.

굿 호프 스토어 루인스를 지난 곳은 우카람바 드라켄즈버그 국립공원 구역에 속하는 계곡이다. 움코마자나 강의 지류인 이 계곡은 희귀 동식물의 보고. 드라켄즈버그에 산재한 동굴의 선사시대 암각화에 등장하는 엘란드를 비롯해 바위에서 사는 록다찌, 바분 등이 길섶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길섶에서 피고 지는 야생화도 50여 종. 계곡을 뒤덮은 나무는 수령이 어리지만 고목처럼 보인다고 해서 '올드 우드'로 불린다. 폭포수가 7단으로 떨어지는 베일드 폭포와 독수리를 닮은 바위도 볼거리다.

산속에 위치한 남아공 출입국관리소는 산불감시소처럼 단출하다.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출입국 신고를 하고 15㎞ 떨어진 레소토 마을 '사니 탑 빌리지'의 레소토 출입국관리소에서 또 신고를 한다. 그러나 트레킹을 겸해 레소토의 국경마을만 몇 시간 둘러보는 관광객이 대부분이라 절차는 간소한 편이다.

관리소에서 사니 패스 고갯길까지는 험준한 지역이라 사람이 살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이 구간을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라고 부른다. 유엔에서 지원한 자금으로 건설했다는 자그마한 다리를 통과하면 드라켄즈버그 산맥에 위치한 두 개의 뾰족한 봉우리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남쪽 봉우리는 해발 3256m, 북쪽 봉우리는 3251m. 사니 패스 고갯길은 북쪽 봉우리의 북쪽 능선에 위치한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아찔한 지그재그 길은 해발 2600m 지점부터 시작된다. 지프는 물론 사륜 오토바이조차 이곳에서는 엉금엉금 기듯 산을 오른다. 자칫 핸들이라도 잘못 꺾으면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그재그 길의 코너마다 다양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당연한 일.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는 리버스 코너, 겨울이면 얼음이 언다는 아이스 코너 등 하나같이 만만찮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곳은 위스키 코너로 급경사의 지그재그 길이 취한 상태에서 내려다보듯 아찔하다. 특히 하산할 때는 산 아래의 길이 이어진 것처럼 착각이 들지만 코너를 돌 때마다 달리 나타나는 풍경은 달력그림을 넘기듯 황홀하다. 레소토 무역상들은 당나귀에 물건을 가득 싣고 이 길을 이틀만에 오른다고 한다.

백두산 정상보다 123m나 높은 해발 2873m 사니 패스 고개를 넘으면 의외로 평평한 고원지대가 펼쳐지면서 돌을 쌓아 만든 집들이 나타난다. 하늘 아래 첫 마을로 불리는 레소토의 사니 톱 빌리지다. 19세기 초까지 부시맨이 살던 마을이었으나 줄루족 출신인 샤카 왕에게 쫓겨나 지금은 100여 명의 바소토족이 살고 있다. '사니'라는 말은 산(San)족인 부시맨을 이르는 말.

바소토족은 추운 날씨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상 담요를 몸에 두르고 산다. 바소토족 성인 남자가 휴대하는 물라모(Mulamo)라는 지팡이는 할례를 치른 남자만 가질 수 있는 권위의 상징. 지팡이에 새기는 문양이 집안마다 달라 양치기가 산에서 죽더라도 문양을 보고 신원을 확인한다고 한다.

사니 패스 정상 전망대에서 올려다보는 드라켄즈버그 산맥은 장엄하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산줄기가 많아 주름치마처럼 보이는 오른쪽 산은 '예수의 12제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테이블처럼 평평한 12개의 바위 봉우리에 착안한 이름이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 부드러운 산자락 사이로 데이비드 알렉산드리아가 개척한 오솔길의 흔적도 뚜렷하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거센 사니 패스 정상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장도 있다. 주로 언더버그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휴게소로 이곳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움코마자나 계곡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사니 패스의 풍경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흙먼지를 꼬리에 문 지프와 사륜 오토바이가 굉음을 토하는 그 길을 레소토 사람들은 당나귀를 끌고 오늘도 숙명처럼 한 발 두 발 오르내린다.

남아공·레소토=글·사진 박강섭 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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