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빼고 다 파는 시장, 2만원으로 과소비해볼까

2008. 1. 6. 20:2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매주 주말이 되면 숭인동엔 서울에서 가장 큰 노점 시장이 열린다. 이름하여 동묘 벼룩시장. 왼쪽이 동묘. 보물 142호다.

ⓒ 조정래

그랬다. 한 때 '통일호'가 열심히 사람을 실어날랐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4년 전 2004년 3월까지 운행한 통일호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 조정래

동묘는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원병으로 온 명나라 병사들 사기를 높이기 위해 1602년 무렵 세워졌다. 한때 동·서·남·북묘가 있었으나 지금은 오로지 동묘만 남아 있다. 동묘는 1920년 박기홍·김용식 등이 관우를 숭배하기 위해 만든 관성교 본부이기도 했다. 지금 동묘는 보물 142호로 지정돼 있다.

이 특이한 건축물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주말이면 어르신들이 모여 소일을 하는 한가로운 곳일 뿐이다. 또 있다. 동묘 주변은 서울에서 가장 큰 벼룩시장 자리이기도 하다.

청계천변 황학동을 중심으로 노점시장이 번성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황학동 '벼룩시장' 또는 '황학동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다. '탱크 말고는 다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없는 게 없는 시장이었다.

조선초부터 있었던 마을 이름, 알고보니 비운의 왕비가...

2003년 황학동 벼룩시장. 노점이 철거되기 전이다.

ⓒ 김대홍

지금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청계천변 노점상은 모두 철거돼 동대문 풍물시장 안으로 들어갔고, 남은 노점상들이 동묘 주변에 몰려 있다.

동묘지하철역 1·6호선과 동묘 사이 아주 긴 골목길을 따라 벼룩시장이 만들어져 있다. 1000원짜리 물건이 수두룩하다. 삶은 오리알도 1000원이고 옷도 1000원이다. 가격은 저렴하고 거리는 활기가 넘친다.

동묘와 동묘 벼룩시장이 있는 곳이 서울 종로구 숭인동이다.

숭인동은 1914년 동명 개정 때 조선초부터 있었던 '숭신방'과 '인창방'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동네다.

숭인동은 세조의 조카로 비명에 죽은 단종과 깊은 연관이 있는 동네다.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는 동망봉과 왕비가 이용했다는 궁안우물이 이 곳에 있고, 정순왕후에게 야채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여인채소시장이 바로 숭인동에 있었다.

숭인동 청룡사 올라가는 길목 마을이 자줏골 또는 자지동이었던 것도 정순왕후와 관계가 있다. 왕비가 이 곳에 살면서 베에 물감을 들일 때 자주색 물이 들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또한 숭인동은 <봄봄> <동백꽃> 등을 지은 김유정이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검정으로 입학학 뒤 이사해 산 곳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에서 제일 큰 축산물시장에 성동구 마장동에 있지만, 그 시장은 1961년 숭인동에서 옮겨간 것이다.

12월 몇 차례에 걸쳐 숭인동을 찾았다. 사진 촬영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손발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던 날 집중해서 했다.

30만원짜리가 단돈 만원? '구라'라도 기분좋아

동묘 벼룩시장에선 놀랄 만큼 싼 가격의 물건들이 나온다.

ⓒ 김대홍

"1만5000원인데 3000원에 드려요."

"1만원에 드립니다. 원래 30만원이에요."

동묘 벼룩시장에 가면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구라'든 아니든, 일단 귀가 쫑긋하게 마련이다.

가격차가 워낙 커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귀여운 구라'라는 생각이다. 싼 물건을 사면 사는 사람조차 괜히 '싼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상인들의 그런 '구라'는 '좋은 물건을 운 좋게 값싸게 샀다'는 위안을 손님에게 준다.

황학동 벼룩시장 때도 그랬다. 장사치 중엔 물건을 팔면서 미우주항공국 나사(NASA)와 하버드대학을 들먹이는 이도 있었다. '뻥'인 줄 알면서 이야기가 재밌어서 괜히 한참 동안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 때 청계천 3가에서부터 9가까지 약 1500여 개 노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동묘 벼룩시장엔 몇 개 노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120여개라 하기도 하고, 누구는 150여개라 하기도 한다.

황학동 도깨비시장은 6·25전쟁 이후 청계천 주변에 고물상과 미군 물품 중심 노점상과 함께 시작했다. 해방 후 머리 모양이 달라지면서 잘린 머리카락을 이 곳에서 팔던 게 그 기원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어쨌든 황학동 벼룩시장의 역사는 50년 이상 길게 이어졌다. 그 오랜 역사도 이제 동묘 벼룩시장을 통해 간신히 명맥을 잇고 있다.

영영 이별한 다리를 건너 동묘길로 접어드니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 사이를 지나는 율곡로. 사진에서 보이는 구름다리 오른쪽이 종묘, 왼쪽이 창경궁이다.

ⓒ 김대홍

주변 모든 곳이 옷걸이다. 중장비에 걸린 옷들.

ⓒ 김대홍

예전에 황학동 벼룩시장을 먼저 구경했을 때는 청계천 영도교를 건너 동묘길을 따라 주로 구경했다. 청계천 노점거리가 사라진 지금은 동묘역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편하다.

자전거를 타고 청와대 뒤 사직고개를 넘고 광화문을 지나 율곡로를 따라 동묘지하철역까지 갔다. 창덕궁·종묘·창경궁을 구경할 수 있는 율곡로는 '아름다운 길'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어찌 눈치를 챘는지 동행한 후배 정래가 사진기를 꺼내 열심히 셔터를 누르고 있다.

동묘역에 도착한 뒤 5번 출구 쪽 영미다리길에서 걷기 시작했다. 근처 청계천변에 영미다리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1458년 영월로 귀양가던 단종과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이 곳에서 영영이별을 했다고 영이별다리 또는 영영건너간 다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성종 때 창신동 영미사 또는 안암동 영도사 승려들이 다리를 지었다고 하는데, 영미다리라는 명칭은 전자 쪽에 힘을 실은 듯 하다.

아무튼 길 이름은 영미다리지만, 청계천에 있는 다리 이름은 '영도교'다. 다리 건설 당시 성종이 직접 내린 다리 이름은 어쨌든 영도교다.

상인들은 곳곳에 물건을 내걸었다. 가게 셔터·창문·바닥 뿐만 아니라 중장비 몸통까지 틈이 있는 곳엔 어디나 물건을 걸었다. 가장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옷. 티셔츠·바지·양말·군용점퍼·겨울외투 등 종류가 가지가지다. 음악CD·골프채·휴대폰·보온병·바비인형·헌책·자전거·불상 등 나머지 물건도 많았다.

이선희 라이브 공연 사진이 눈에 띄었다. 관심이 생겨 10장 정도 되는 사진을 하나씩 넘기며 보고 있으려니 상인이 한 마디 한다.

"그거요. 1만원에 몽땅 줄게요. 아주 귀한 사진이에요."

천원에 배부르고 천원에 따뜻하고... 과소비 해도 2만원

금강산도 식후경. 오리알 한 알씩 먹고 다시 여행을...

ⓒ 조정래

사진기를 들고 나선 12월 그 날은 몹시 추웠다. 영하 4~5℃를 가리키는 날씨에 바람까지 불었다. 위에 걸친 옷은 단 두 벌.

그 때부터 외투를 한 벌 사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옷을 봤다. 그 날 따라 가죽옷이 당겼다. 눈에 띄는 옷을 찾아 가격을 물으니 2만원을 부른다. '1만 5000원'을 부르다 결국 1만7000원에 낙찰을 봤다. 옷을 걸치니 추위는 온데간데없다.

하지만 사람이 참 간사하다. 윗몸 추위가 가시니 이제 손이 시리다. 정래를 쳐다보니 연신 손을 '호호' 불고 있다. 장갑을 사자고 제안했다. 좋단다. 의기투합해 스키용 장갑을 각각 3000원씩에 샀다. 내친 김에 '바지도 한 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소비는 그 선에서 멈췄다.

추위를 이기는 데는 역시 먹을거리가 제격이다. 하나에 1000원 하는 삶은 오리알을 각각 하나씩 먹었다. 오리알은 계란보다 크고 맛은 담백하다. 잠시 뒤엔 파전 한 장을 나눠 먹었다. 가격은 1000원. 1000원에 이렇게 몸이 따뜻해진다. 우리는 파전에 감사했고, 파전을 파는 아주머니에게 또한 감사했다.

고구마를 파는 식당도 있다. 형식 파괴에 격식 파괴다. 종묘 벼룩시장이 편안한 이유다.

"걸리면 죽음 소변 금지 작두 처벌"

종묘 벼룩시장에 가면 자전거를 타고 도는 사람이 참 많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을 구경하는 사람을 보면 참 반갑다. 시장 한 가운데를 자동차가 지나치면 사람들은 양 옆으로 몰려야 하지만 자전거는 그렇지 않다. 물건을 사도 바구니만 하나 달면 웬만한 건 담을 수 있다. 애당초 물건 살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정래와 난 골목에 자전거를 세우고 돌아다녔다.

동묘 벼룩시장이 열릴 때 꼭 노점만 열리는 게 아니다. 가게도 함께 열린다. 1장에 1000원씩 파는 비디오가게도 열리고 자전거를 싸게 파는 자전거포도 열린다. 어린이명작동화, 사전, 일본잡지 등을 파는 헌책방도 빼놓을 수 없다. 식당 이름 중 한 곳은 '돼지네', 상점 이름은 '개미슈퍼'다. 희한하게 가게 이름은 동네 분위기를 닮는다.

신설종합시장. 합성비닐을 주로 파는 곳이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이는 동행자인 후배 정래.

ⓒ 김대홍

요즘은 낙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숭인동 골목 동네선 여전히 갖가지 낙서가 남아 있다.

ⓒ 김대홍

동묘 벼룩시장에서 동쪽으로 빠져나오면 신설종합시장이 있다. 종로5가 광장시장에서 시작하는 동대문시장이 끝나는 곳이 청계8가에 있는 신설종합시장이다. 신설종합시장은 회사 명칭이 신설동종합시장(주)이지만 있는 곳은 숭인동이다. 신설동은 숭인동 바로 옆이다. 신설종합시장은 합성비닐을 주로 파는 곳이다. 시장 안에 들어서자 '비니루' '자꾸' 같은 간판이 자주 눈에 띈다.

재미있는 것은 벽이다. 종합광고판이다. '점포 임대' '선풍기 날개 팝니다' '창고 임대' '중고 난로 판매' 등 갖가지 홍보 문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가운데 쓰레기 투기를 경고하는 문구도 걸려 있다.

"쓰레기 버리다 걸리면 죽은 줄 아라라. 특히 도시락 조심. 감시 카메라 설치" "걸리면 죽음. 소변 금지. 작두 처벌"

시장은 뜨내기 손님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 주택가와는 또 문제가 다르다. '소변 금지'를 강조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신설종합시장에서 북쪽으로 빠져나오면 전화국길이다. 숭인동엔 한국인포서비스(KOIS), 즉 114전화국이 있다. 114 전화번호 안내는 1935년 경성전화국에서 시작했다. 1981년 이전까지는 안내국 직원들이 직접 전화번호부를 뒤져 번호를 불러주다, 그해부터 전산화됐다. 문득 동네에서 "예 예, 고객님"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대로인 왕산로를 중심에 놓고 남쪽인 숭인2동 구역은 상가가 많다. 숭인1동 구역인 왕산로 북쪽엔 동망봉이 있다. 산길을 따라 좁은 길이 발달한 골목동네가 그곳에 있다. 숭인1동을 다음에 소개한다.

동묘 벼룩시장에서 파는 자전거. 수염을 길게 기른 할아버지가 앞자리에 손녀를 태우고 나타날 것만 같다.

ⓒ 조정래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