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금 500만 달러? 무서운 택시들

2007. 9. 2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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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성호 기자]

모잠비크와 달리 깨끗하고 현대적인 짐바브웨 시골마을

ⓒ 김성호

짐바브웨의 여행비자 요금은 미국 돈 30달러였다. 출입국 사무소 안에는 '짐바브웨 준비은행(Reserve Bank of Zimbabwe)' 지점이 있어 환전을 해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한국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이다.

여기서 미국 돈 50달러를 바꾸니 짐바브웨달러로 500만달러를 준다. 미국 돈 1달러에 공식 환율이 10만 짐바브웨달러이다. 미국 돈 10달러만 바꿔도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는 셈이다.

미국 돈 50달러짜리 한 장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두둑한 돈 뭉치가 되어 돌아왔다. 2만 짐바브웨달러 짜리 100장 묶음 2개와 500·1000 짐바브웨달러짜리 등 잔돈 묶음 한 개다. 괜히 부자가 된 듯 마음이 든든해진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미국 돈 1달러에 환율이 1000원 이상 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에티오피아는 미국 돈 1달러=8비르, 케냐는 1달러=80실링, 우간다 1달러=1800실링, 르완다 1달러=560프랑, 탄자니아 1달러=1180실링, 말라위 1달러=110콰차였다. 물론 주로 국경에서 개인 환전상에게 바꾼 것이지만, 공식 환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짐바브웨는 공식 환율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가장 높았던 탄자니아보다도 100배나 높았다. 그러나 환율의 착시현상에 의한 나의 흥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진다.

비자발급과 환전을 하고 나오자 음료수와 과일, 빵 등을 파는 행상 30~40명이 달라붙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안간힘을 쓴다. "헬로우"하면서 친절하게 다가와 환전을 하자는 젊은이들도 수두룩하다. 아프리카 국경마을의 분주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모잠비크와는 한 걸음 사이에 이렇게 국경의 풍경이 달랐다.

지폐 한 장 환전하니 두둑한 돈 뭉치가

짐바브웨 국경에서 수속을 마친 버스는 오후 5시 하라레를 향해 출발했다. 짐바브웨 땅에 들어서자 같은 국경 산악지대인데도 마을들이 하얀 시멘트 집으로 깔끔하고 깨끗하다. 모잠비크와 같은 흙집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간혹 보이는 흙집도 깨끗이 정돈되어 오히려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집 앞 텃밭도 잘 가꾸어놓았다. 10분 정도 지나니 '코트와 개발지역(Kotwa Growth Point)'이라는 마을 팻말이 보인다. 집 앞에 트럭과 농사용 트랙터가 놓여 있는 곳도 있다. 농촌개발 시범 지역이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고 흰색 중앙선이 그어져 있다. 추월 금지의 실선과 추월 가능한 점선도 중앙선에 분리해 그려 놓았다.

벌써 해가 지려고 산 위에서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해넘이 직전의 해는 불그스레하지만 왠지 우울한 느낌이다. 마지막 붉은 빛을 발하려고 하지만, 해돋이의 강렬한 붉은 빛이 아니다. 해는 버스가 지나는 위치에 따라 산봉우리에 가려 얼굴을 보였다 안보였다 한다. 마치 나와 서산에 지는 해가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다.

소떼들이 저녁놀을 배경으로 유유히 풀을 뜯어먹고 있다. 짐바브웨의 국경마을은 깔끔하고 목가적이다. 버스는 도로 옆의 바위산을 끼고 달리는 데, 바위산이 해질 무렵 분위기와 참 어울린다.

짐바브웨 국경에는 반달 모양의 둥근 산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하라레로 가는 버스는 그 둥근 산 사이를 뚫고 달린다. 무토코와 무테와 지역을 달려서 이미 캄캄한 밤기운이 서린 하라레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7시 30분. 말라위의 릴롱궤에서 모잠비크의 중부지역을 가로질러 하라레까지 오는 데 13시간이나 걸렸다.

택시운전사와의 요금 시비 "여긴 짐바브웨다"

2006년 12월 31일까지 6개월 시한인 짐바브웨의 10만원짜리 고액지폐

ⓒ 위키피디아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하라레 시내지만 도로가 넓어 시원한 느낌이 든다.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에는 노란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들어가기 전 로드포트라는 국제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어두워서 밤길을 찾을 수가 없다. 국제버스 도착에 맞춰 기다리고 있던 택시운전사가 배낭을 멘 나를 보더니 "헬로우"하고 인사를 하며 다가와 자신의 차를 타라고 권유한다.

낮에 도착했다면 걸어서 시내 구경을 하며 숙소를 찾아갔을 텐데, 어두운 밤이어서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택시를 타고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힐사이드 롯지라는 배낭여행객 숙소로 갔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넓은 정원에 커다란 자카란다 나무가 인상적인 숙소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나는 택시운전사에게 "고맙다"며 20만 짐바브웨달러를 주었다. 아프리카 시내 택시요금은 대개 2달러 내외이기 때문에 공식 환율로 미국 돈 2달러에 해당하는 20만 짐바브웨달러는 적절한 요금이다. 그런데 돈을 세던 택시운전사의 인상이 찌그러진다.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노"라며 말하고 나에게 돈을 되돌려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의 뒤통수를 내리친다.

"20만이 아니라 200만 짐바브웨 달러를 내라.""무슨 소리냐. 다른 나라는 시내 택시요금이 미국 돈 2달러인데, 200만 짐바브웨달러면 미국 돈 20달러에 해당한다.""여기는 짐바브웨다.""짐바브웨고 뭐고, 도대체 시내 택시요금으로 미국 돈 20달러를 달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당신이 몰라서 그러는데, 여기는 짐바브웨다.""아프리카 다른 나라는 이렇게 비싼 택시요금 받는데 없다. 나는 절대 못 낸다."

택시요금을 갖고 숙소 앞 정원에서 내가 택시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이자 숙소 안에서 젊은이들이 무슨 일이 있나 해서 나왔다. 젊은 남자 2명과 여자 1명 등 백인 3명이다. 택시운전사는 택시를 타기 전 분명히 "200만 짐바브웨달러"라고 말했다며 물러서지 않는다. 되돌아보니 택시운전사가 분명히 200만 달러라고 말한 것 같으나, 피곤에 지친 나는 설마 하면서 20만 달러로 이해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택시운전사가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대안으로 미국 돈으로 2달러를 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런데도 택시운전사는 미국 돈은 받지 않겠다며 짐바브웨달러로 200만 달러를 달라고 막무가내다. 택시운전사는 "환율이 엄청 올라서 200만 짐바브웨달러는 큰 돈이 아니다"며 자신이 절대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숙소 주인의 이웃이라는 백인 3명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한결같이 "여기는 짐바브웨다"라고 말한다. 택시운전사와 똑같은 말이다. 내편을 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면서 백인들은 "짐바브웨는 매일 매일 환율이 바뀐다"며 "짐바브웨 돈은 휴지나 마찬가지"란다.

미국 돈 1달러가 공식 환율로 10만 짐바브웨달러지만, 10만 짐바브웨달러의 실제 시장에서 가치는 10분의 1달러밖에 안 된다. 미국 돈 1달러의 실제 가치로 따지면 짐바브웨달러는 10만이 아니라 100만 달러로 바꾸어줘야 하는 데 짐바브웨 정부가 10배나 적은 공식 환율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는 짐바브웨 공식 환율로 바꾸면 그 순간 앉아서 10배나 손해를 보는 셈이다.

나는 결국 택시운전사에게 200만 짐바브웨달러를 줘야 했다. 국경에서 바꾼 500만 짐바브웨달러의 3분의 1이 넘는 지폐를 한 번의 택시비로 날려야 했다. 실제로 암시장에서는 미국 돈 1달러에 100만 짐바브웨달러로 바꿔준다고 한다. 짐바브웨 환율이 공식 환율과 암시장 환율이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 짐바브웨에 가서 은행이나 공식 환전소 등을 통해 돈을 바꾸면 엄청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농장을 몰수당한 집에서 민박을 하다

자카란다 나무가 무성한 하라레의 여행객숙소 <힐사이드 롯지>

ⓒ 김성호

엉터리 환율은 결국 짐바브웨의 여행을 초장부터 망치게 만들었다. 나는 7일 정도 머물며 쇼나 조각품과 전통악기인 음비라 연주를 들으며 '문화예술과 함께 하는 짐바브웨 여행'을 즐기려 했으나, 도깨비 환율이 나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었다.

백인 젊은이들은 즉석에서 나에게 미국 돈 1달러에 40만 짐바브웨달러로 바꿔주겠다고 제의한다. 이들은 모두 짐바브웨에서 태어난 백인들. 숙소에 머물면서 외국여행객에게 환전을 해주고 있었다.

국경에서 바꾼 50달러의 3분의 1 이상을 택시비로 지불한 나는 미국 돈 20달러를 주고 800만 짐바브웨달러로 바꿨다. 국경의 공식 환율보다는 4배가 좋은 조건으로 환전한 셈이다. 바꾼 짐바브웨달러도 10만달러짜리 고액지폐여서 부피가 훨씬 줄었다.

환율과의 전쟁은 하라레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어 짐바브웨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떤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다. 짐바브웨 경제가 사실상 파탄나다보니 실제 물가를 반영한 환율이 아니라 엉터리 환율로 외국인으로부터 싼 가격에 외화를 강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짐바브웨에서는 은행에서 환전하려는 사람은 없고, 미국달러는 암시장으로만 흘러들어가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있다.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의 장기독재와 잘못된 토지개혁 등 경제정책, 이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가 얽혀 빚어낸 짐바브웨 경제의 현 주소이다. 짐바브웨달러는 휴지조각에 다름 아니고 인플레는 세계 최고 기록을 매일 경신하고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숙소에 빈 방이 하나도 없다. 백인 젊은이들이 "민박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해서 따라갔다. 어두운 밤에 한참을 걸어 백인 민간인 집에 들어갔다. 2층짜리 아담한 집인데 40대 후반 부부와 20살, 13살 정도의 아들 2명, 그리고 70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몰락한 짐바브웨 중산층 백인가정이다.

나에게는 큰 아들이 자는 1층의 작은 방을 내어준다. 큰 아들은 1층 침대에 누워 자려다 졸지에 나에게 방을 뺏긴 셈이다. 큰아들은 침대에서 베개와 이불을 들고 2층 동생 방으로 간다. 이들이 민박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바로 무가베 정권에 의해 농장을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돈 5달러를 주고 민박을 했다.

짐바브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했다는 70대 백인 할아버지는 "지난 2000년 이후 갑자기 농장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위험을 느껴 정리하고 하라레로 왔다"며 "그나마 남은 돈으로 집을 마련해 민박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했다. 백인 민박집의 모습은 짐바브웨 토지개혁의 현실과 경제파탄의 시발을 보여준다. 지난 1980년 독립 당시 25만 명에 달하던 짐바브웨 백인은 현재 7만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잘못된 토지개혁이 망친 짐바브웨 경제

고급 주택가가 늘어선 하라레의 <힐사이드 로드> 거리

ⓒ 김성호

한때 아프리카의 모범적인 국가였던 짐바브웨가 세계 최고의 인플레로 '민생지옥 국가'로 전락한 직접적 계기는 지난 2000년 이뤄진 잘못된 토지개혁 때문이다. 무가베는 식민지 시절 소수 백인이 차지하고 있는 대규모 토지를 가난한 흑인 농민들에게 다시 분배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른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특별한 보상 없이 백인 소유의 대규모 농장을 강제로 몰수하는 법안을 만든 것.

그러나 무가베의 토지개혁은 그럴 듯한 명분과 달리 실제는 장기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 영합적으로 과격하면서 졸속으로 추진되다보니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 쿠데타에 성공한 뒤 권력 강화를 위해 지난 1972년 인도 등 아시아인을 대량 추방한 것과 같다.

물론, 짐바브웨의 토지 소유구조에는 독립 직후부터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오랫동안 짐바브웨를 지배했던 백인들이 전체 인구의 1%밖에 안 되는데도, 경작가능 토지의 70%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계획과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했어야 함에도 권력 강화차원에서 급격히 하다 보니 토지개혁은 실패하고 국가 재앙만 초래했다.

백인에게서 몰수한 토지는 상당수 무가베의 친인척과 지지 세력인 군인·경찰·정치인들에게 돌아갔다. 그나마 토지를 분배받은 사람들도 농사 경험이 없다보니 농장은 버려져 짐바브웨 경제를 떠받들고 있던 농업은 몰락했고 식량부족 현상이 발생했다.

백인 농장주 살해가 잇따르자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경제제제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그 뒤는 외환보유고의 바닥과 식량 등을 수입하기 위한 마구잡이 화폐발행, 화폐가치의 하락, 폭발적인 물가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등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빚어졌다.

한 마디로 경제파탄이다. 1000% 넘는 세계 최고의 인플레, 공식 환율과 암시장의 환율 차이 10배, 인구의 3분의 1이상 식량 부족과 4분의 1이상 취업 이민, 국민의 80% 실업상태, 경제성장 마이너스 7.1%, 1인당 국민소득 130달러, 평균수명 37세…. 여기에 야당 탄압을 통한 사실상 일당독재, 의회의 거수기 역할, 집회 및 시위 금지, 군과 경찰에 의한 폭력통치, 부정부패, 언론탄압까지 겹친다.

하라레 <힐사이드 로드> 거리에 핀 꽃

ⓒ 김성호

백인 문제를 다루는 두 유형의 아프리카 지도자들

무가베는 지난 1980년 독립 이후 26년 동안 장기독재를 해오고 있는 82세의 최고령 독재자이다. 독립영웅이자 건국의 아버지에서 추악한 독재자로 추락한 무가베의 모습이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무가베가 물러나야 짐바브웨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무가베는 "100세까지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치고 있다. 암담한 짐바브웨의 현실이자 우울한 미래이다.

아프리카 국가의 지도자들이 독립 이후 흑백문제를 다룬 유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눠진다. 백인과 아시아인 등 외국인을 무차별로 추방한 사례와 외국인을 포용하면서 활용한 사례이다. 앞쪽의 사례는 짐바브웨의 무가베와 우간다의 이디 아민, 말라위의 반다 독재정권이라면, 뒤쪽의 사례는 남아공의 만델라와 탄자니아의 니에레레, 모잠비크의 사모라 마셸, 나미비아의 삼 누조마 정권이다.

만델라와 니에레레, 마셸은 백인들의 협조를 통한 경제안정을 꾀하면서 단계적 개혁정책을 펼쳤다. 니에레레는 "미래의 확고한 국가건설을 위해 유럽인과 아시아인들의 탕가니카 체류와 동참"을 호소했을 정도이다. 만델라는 경제 안정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정치 사회적 흑백차별을 허물고 다수인 아프리카인으로 자연스런 주권이양이라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1990년 아프리카에서 마지막으로 독립한 나미비아도 독일계 등 약 7만 명의 백인들이 그대로 남아 경제 안정에 도움을 주었고, 모잠비크에서는 1975년 독립 당시 23만 명의 백인 중 모두 떠나고 1만 명 정도가 남았다. 당시 도망간 백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흑인에게 가한 착취가 자기들에게 거꾸로 돌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외국인을 무차별적으로 추방했던 우간다와 말라위, 짐바브웨 경제가 파탄을 맞은 것은 당연하다. 세계화 시대에 시대착오적인 쇄국정책을 펼친 결과이다. 정권 초기 흑백공존 정책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며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한 성공적 사례로 꼽히던 무가베의 몰락은 권력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80년 짐바브웨가 독립할 때만 해도 무가베 대통령은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에 견줄 정도로 독립영웅이자 아프리카의 해방자로 추앙받았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무가베는 남아공의 포트헤어대학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게릴라 투쟁에 나섰다. 인구의 78%를 차지하는 최대 부족인 쇼나 족 출신인 무가베는 1970년대 짐바브웨아프리카민족동맹(ZANU)을 이끌며,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두 번째 부족인 은데벨레족 출신으로 짐바브웨아프리카인민동맹(ZAPU)을 이끌었던 조슈아 은코모와 함께 독립투쟁의 쌍두마차였다.

짐바브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꽃이 핀 <짐바브웨 알로에>

ⓒ 김성호

아프리카 국가 대통령과 독립영웅을 기리는 하라레 거리 이름

아프리카 여행 중 민박하기는 처음이다. 백인가족들은 친절했으나 솔직히 여행객에게 민박은 결코 편한 곳은 아니다. 돈을 낸다고는 하지만 '남의 안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오전 7시 백인 할아버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배낭을 메고 나왔다. 어제 찾아갔던 숙소인 힐사이드 롯지까지 10분 정도 걸어 나왔다. 힐사이드 롯지에서 커피를 마시며 숙소 직원에게 나미비아 대사관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커다란 정원에 오래된 자카란다 나무가 잎사귀를 떨군 채 제멋대로 난 줄기와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애초 식민지 시대의 대저택으로 사용되었는데 여행객 숙소로서의 역사도 매우 길다. 대문 입구에는 "힐사이드 롯지. 1938"이란 문패가 걸려 있다. 1938년부터 여행객 숙소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아주 운치 있고 고풍스런 집인데, 언젠가 다시 하라레를 방문하면 꼭 머물러야겠다.

힐사이드 롯지에서 나와 시내 중심가로 걸어갔다. 하라레 주재 나미비아 대사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나미비아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국경에서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대사관에서 받아야 한다. 나는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한 뒤 보츠와나를 거쳐 바로 나미비아로 갈 계획이었다. 이미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나미비아 대사관에서 초청장을 요구하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힐사이드 롯지에서 내려오는 언덕의 길 이름은 '힐사이드 로드'이다. 길 옆에는 자카란다 나무와 아름다운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자카란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보이는데, 아프리카에선 봄인 9월에서 11월이 되면 보랏빛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다. 자카란다는 벚꽃처럼 잎이 나기 전 꽃부터 피기 때문에, 7월말인데도 아직 자카란다 가지에는 잎이 피지 않았다.

자카란다보다 부지런한 다른 나무들은 이미 빨갛고 하얀 꽃들을 피우고 있었다. 1㎞ 정도 늘어선 힐사이드 로드의 언덕길은 나무그늘을 거닐 듯 아름다운 길이다. 언덕을 따라 늘어서 있는 집들에는 큰 정원이 딸려 있고, 집 지키는 커다란 개들도 많이 기른다. 백인들도 살고 있고, 일부 고급주택에는 흑인들도 살고 있었다. 서울 성북동처럼 부자들이 많이 사는 고급 단독 주택가이다.

큰길에 다다라 오른쪽으로 걸어가자 철길이 놓여 있었다. 하라레에서 무타레를 오가는 철도이다. 철길을 건너 '로버트 무가베 로드'라고 쓰인 팻말을 따라 시내 중심가로 걸었다. 무가베 대통령이 도로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그것도 하라레 시내의 한 중심가를 관통하는 도로에.

하라레 시내에는 무가베 도로 뿐 아니라 유난히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대통령 이름을 딴 도로가 많다.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인 줄리어스 니에레레 도로,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 도로, 모잠비크 초대 대통령 사모라 마셸 도로, 잠비아 초대 대통령 케네스 카운다 도로, 가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도로, 나미비아 초대 대통령 삼 누조마 도로…. 대부분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나라의 대통령이거나 아프리카 독립영웅들이다.

다른 도로도 대부분 사람 이름을 딴 도로이다. 조시아 통고가라 도로, 조시아 치나마노 도로, 레오폴드 타카위라 도로, 조지 실룬디카 도로, 롭슨 마니이카 도로, 허버트 치테포 도로와 제이슨 모요 도로…. 모두 짐바브웨 독립투사들 이름이다. 그중 '음부야 네한다 도로'는 특이한데, 지난 1896년 첫 해방전쟁인 이른바 '치무렝가(Chimurenga)'를 이끌었던 여자 무당의 이름이다.

그레이트짐바브웨 유적지에 있는 솜털이 달린 나무

ⓒ 김성호

택시요금이 무려 500만 달러라니...

도로 이름에 신기해하며 중심가로 걷던 나는 서둘러 택시를 잡기로 했다. 내가 쭉 걸어온 것은 시내 구경을 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택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택시 자체를 보기 힘들고, 더욱이 빈 택시로 다니는 경우는 찾을 수가 없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걸어온 참이다.

아마도 연료난이 심각하다보니 택시들이 승객 없이는 돌아다지지 않고, 택시 승강장에서 오히려 승객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간신히 택시를 잡았는데, '자동차운전학원(Driving School)'이라는 간판이 택시 위에 붙어 있었다. 정식 영업용 택시가 아니라 지나가던 운전학원 차량이다.

"나미비아 대사관 가는 데 얼마냐?""10만 짐바브웨달러만 내라."

10만 짐바브웨달러라면 공식 환율로 치더라도 미국 돈 1달러로 비싸지 않았다. 운전사는 10분 정도 달려 시내 중심가에 내려주면서 "건너편 건물이 나미비아 대사관 건물"이라고 손을 가리킨다.

영국의 식민지 건설 당시 수상 이름을 따서 솔즈베리로 불렸던 하라레는 1980년 독립 이후 하라레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의 짐바브웨와 잠비아, 말라위를 모두 묶은 '로디지아-니아살란드 연방'이라는 식민지 시절의 중앙아프리카 연방시대(1953∼63)에는 연방의 수도이기도 했다.

중심가는 도로가 넓고 높은 건물들도 많아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도시와 확연히 달랐다. 현대화된 도시 느낌이다. 바둑판처럼 시원하게 뚫린 거리도 깨끗하고 신호등도 여기저기 많이 설치되어 한마디로 정돈된 도시이다.

다만, 넓은 도로에 비해 걸어 다니는 사람과 차량이 적은 것이 이상하다. 복잡하거나 위험하지 않고, 차분하면서 안전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도시이다. 한적하다는 느낌이 더 정확하다. 하라레는 배낭여행객들이 걸어다니기에 좋은 도시이다.

하라레 중심가만 보면 짐바브웨는 나무랄 데 없이 멋진 나라이다. 인플레라는 암세포가 안으로 국민경제를 좀 먹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럴 정도로 짐바브웨는 하라레 뿐 아니라 지방을 가더라도 도로 등 겉으로 보이는 인프라는 손색이 없다.

푸른 원숭이 오렌지라고도 불리는 <스트리크노스 스피노사>나무

ⓒ 김성호

운전사가 말한 건물은 나미비아 대사관이 아니라 앙골라 대사관이었다. 엉뚱한 곳에다 내려놓은 것이다. 앙골라 대사관 직원에게 묻자 나미비아 대사관은 시 외곽에 있다며 택시 타는 곳을 가르쳐 준다. 스피크 애브뉴와 안그와 스트리트 사이에 있는 앙골라 대사관 건물 건너편 택시 정류장에는 승객을 기다리며 많은 택시들이 놀고 있었다.

"나미비아 대사관까지 가는 데 요금이 얼마냐?""미터 요금으로 계산한다."

전날 워낙 비싼 택시요금에 당한 터라 속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택시에 있는 미터기의 기본요금도 1만 짐바브웨 달러이다. 공식 환율로 따져도 미국 돈 0.1달러이니 비싼 것이 아니다. 기본요금은 우리 돈으로 따져도 90원 정도인 셈이다. 나는 속으로 "택시요금이 이렇게 싸나"라고 흐뭇해했다.

택시는 그린우드 공원과 철통같은 경호로 유명한 무가베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를 지나 국립기록보관소를 지난다. 가로수는 자카란다 나무가 많다. 하라레는 다른 아프리카 도시에서 찾아보기 힘든 전원도시의 멋을 물씬 풍긴다. 넓은 도로와 깨끗한 고층 건물, 자카란다 가로수와 수많은 공원, 해발고도 1473m의 고원지대에서 불러오는 시원하고 맑은 공기.

아름다운 하라레에 심취해 있던 나는 택시 요금미터기 올라가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찰칵, 찰칵"하는 소리가 거의 1초마다 울리면서 요금이 오르고 있었다. 20여분을 달려 나미비아 대사관에 도착하니 택시요금이 무려 500만 짐바브웨달러에 달했다. 공식 환율로 미국 돈 50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분에 25만 짐바브웨달러씩 오른 셈이다. 그저께 짐바브웨 국경에서 바꾼 미국 돈 50달러어치의 짐바브웨달러를 한 번의 택시요금으로 고스란히 날렸다.

기본요금을 1만 달러로 낮게 책정한 것은 승객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해야 하나. 기본요금의 거리도 우리 같이 2㎞가 아니라 200m인 것 같고, 추가요금 계산 거리도 우리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외국 여행객이라 바가지를 씌운 것인지, 아니면 실제 요금기준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짐바브웨에서 택시는 터무니없는 요금으로 나에게는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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