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한 지난 감자칩, 반값에 사세요"

2007. 8. 28.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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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성기영 기자]

▲ 카부트 세일 풍경.
ⓒ2007 성기영

지난 8월 26일 일요일 아침 영국 중부의 중소도시 중 하나인 로열 레밍턴 스파(Royal Leamington Spa)의 럭비 구장. 새벽 6시가 지나면서 평일이면 이 지역 럭비 클럽의 연습장으로 쓰이는 널찍한 잔디밭에 차들이 한두 대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집에서 쓰던 중고물품들을 트렁크에 가득가득 실은 차들은 불과 한 시간 반 만에 300여대로 불어났고, 럭비 구장은 순식간에 초대형 장터로 변해버렸다. 영국의 여름 풍경 중 빼놓을 수 없는 카부트(car boot) 세일이 시작된 것이다.

'부트(boot)'는 자동차 트렁크를 일컫는 영국식 표현이다. 더 이상 쓰지 않는 손때 묻은 생활용품을 자동차 트렁크에 가득 싣고 나와 내다파는 일종의 벼룩시장을 영국에서는 '카부트 세일'이라고 부른다.

초대형 장터로 변신한 럭비구장, 이 곳에서는

미국에서도 '야드 세일'이나 '개라지 세일'이라는 이름으로 집집마다 미니 중고품 시장이 열린다. 그러나 영국의 카부트 세일은 가족 단위로 벌이는 미국의 중고품 세일과는 규모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야드 세일'의 '축구장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카부트 세일은 4월말부터 대략 9월말까지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열린다. 그외에는 하루걸러 하루씩 겨울비가 내러서 열기가 어렵다. 물론 변덕이 잦은 영국 날씨를 감안할 때 날씨가 맑은 날에만 열린다.

차에 물건을 싣고나와 즉석 판매대를 열고자 하는 부터(booter)들은 대략 8파운드(1만5000원), 중고물품을 사러 나온 소비자들은 대부분 50펜스(약 9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카부트 세일에 참여한다. 값싸고 질좋은 중고품을 찾는 서민들에게는 입장료가 영국의 자동판매기 커피 한잔 값에도 못 미치는 카부트 세일만큼 짭짤한 쇼핑 기회를 찾기 힘들다. 현재 영국에서는 전국적으로 400개 가까운 카부트 세일이 열리는 것으로 추산된다.

카부트 세일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은 몇 년 동안 가족들이 사용해온 손때 묻은 생활용품들이 대부분이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쓸모없게 된 장난감·유모차·동화책이 늘 맨 앞줄을 차지하고 작아진 운동화나 자전거 헬멧 같은 것도 잘 팔리는 물건들이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팝스타들의 엘피(LP) 음반이나 한 시대를 풍미하고 서고로 밀려난 베스트셀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도 카부트 세일장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골동품 시장이 형성돼 있는 영국에서 가장 싼 값에 '생활 골동품'들을 사 모을 수 있는 곳 역시 카부트 세일이다.

찌그러진 냄비, 유통기한 지난 감자칩... 이것도 파는 거야?

ⓒ2007 성기영

하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영국 카부트 세일의 겉모습만 관찰한 것에 불과하다. 수북이 쌓여있는 중고물품들 사이를 헤집으면 '설마 이런 것까지?'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기막힌 물건들도 많다. 그동안 직접 카부트 세일에서 목격했던 '판매 목적의' 중고물품만 열거해 보면 이렇다.

'뚜껑 찌그러진 냄비, 바닥이 절반 이상 긁혀 나간 프라이팬, 녹이 잔뜩 슨 병따개, 10년쯤 쓴 것 같아 보이는 숟가락, 레이스 떨어져 나간 속옷, 맥도널드 해피밀에 끼워져 있는 공짜 장난감, 귀퉁이가 찢어져나간 벽지, 돌아가신 할머니가 덮었던 나일론 담요, 밑창 떨어진 신발, 플러그 떨어져 나간 전기 믹서, 자판이 하나 빠진 수동 타자기.'

한마디로 아파트 재활용품 수거함에서조차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을 만한 물건들을 버젓이 팔겠다고 내놓고 있다. 심지어 유효기한이 지난 감자칩을 잔뜩 쌓아놓고 '반값 할인'이라는 쪽지를 붙여놓은 것도 본 적이 있다.

물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렇게 '후진' 물건들을 사는지는 별 문제가 아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것들을 팔겠다고 내놓거나 뒤적거리면서 흥정을 해보는 영국 서민들의 사고방식이다.

우리 같았으면 뒤돌아서서 눈살을 찌푸릴 만한 '고물'들도 천연덕스럽게 사고팔겠다고 나서는 영국인들의 '중고 집착증'이 외국인의 눈에는 더욱 신기할 수밖에 없다. 때마침 '아이들 침대가 하나쯤 있었으면' 하던 참이어서 일요일 카부트 세일에 나온 간이침대 하나가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대머리 아저씨에게 내가 물었다.

"이거 몇 년이나 쓰신 거예요?"

"응, 15년."

속으로는 코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표정만은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와, 놀랍네요. 피프틴 이어즈(fifteen years, 15년) 씩이나."

아저씨가 표정을 고치며 바로 맞받았다. "노우, 피프티 이어즈(fifty years, 50년)." 그러고서는 내 영어발음이 서툴다고 느꼈는지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까지 덧붙여주는 것 아닌가. "잇츠 올더 댄 미(It's older than me, 그거 나보다도 오래됐어)."

'풀하우스' 드라마 DVD도 있네

ⓒ2007 성기영

이럴 정도니 오히려 카부트 세일에 나온 물건을 들척이면서 품질이 어쩌고 제작년도가 어쩌고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단기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유학생이나 주재원 같은 외국인들이 헐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생활용품들을 요모조모 마련하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

외국인 밀집지역이 아닌 영국 동네에서 열린 카부트 세일에 물건을 사러 나온 피부가 노란 사람들은 여전히 호기심의 대상인 모양이다. 좌판을 차지한 온갖 잡동사니들을 눈으로 건성 훑으면서 지나가는데 백발의 할머니 두 사람이 "호호" 웃으면서 한 꾸러미의 DVD 타이틀을 눈앞에 들이민다.

몇 년 전 상영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풀하우스'라는 한국 드라마 타이틀이다. KBS 로고가 선명하다. 25파운드(약 5만원)에 내놓았었는데 반값도 안 되는 10파운드만 내고 가져가란다. 물론 이 정도면 카부트 세일에서는 '갤러리아 명품관 가격'이다. 그래도 재미있어서 자꾸 물어봤다.

"이거 어디서 나셨어요?"

"응, 우리 옆집에(자기 집도 아니고) 사는 이웃이 중국 사람한테 받았대."

"그럼 한국어 자막 있나요?"

"몰라, 틀어본 적이 없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중국어 자막을 입힌 수출용 DVD 세트다. 물론 할머니들은 우리 가족을 보고 중국 사람인 줄 알았을 게다. 그 드라마도 중국 드라마쯤으로 알았겠지. 그래도 그렇지. 공짜로 얻은 걸 '압구정동 가격'으로 팔려고 하다니.

물론 영국의 카부트 세일에서 바가지가 성행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말만 잘하면 반값에도 준다. 그래봤자 2000원짜리 1000원에 사는 거지만. 나는 한국 DVD를 들고 나온 할머니들이, 그 드라마가 무슨 16세기 셰익스피어 연극대본처럼 구하기 어려운 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편안한 전통'을 몸에 맞는 옷처럼 생각하는 영국인

대량 구매 대량 소비의 시대에 이런 동네 벼룩시장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영국 중부지방에서도 부유한 계층이 모여 사는 것으로 유명한 워릭셔(Warwicshire)에서 나왔다는 로즈마리 브라운(63) 할머니도 비슷한 생각이다.

브라운 할머니가 이날 들고 나온 물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찻잔세트나 그릇세트 같은 식기류들이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로부터 그대로 물려받아 수십 년 써오던 것들이다.

"할머니도 아들 며느리에게 물려주시지 그러세요?"

"우리 아들 35살인데 걔들만 해도 이런 것 물려주면 이제 안 좋아해. 구식 취급한다고. 여기서 안 팔리면 그냥 자선단체 갖다줄 거야."

이렇게 몇 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골동품으로 변해가는 물건들은 점점 카부트 세일에서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가 쓰던 학용품이며 장난감을 한 아름 싸들고 엄마아빠를 따라 나와 '피프티 피(50 pence)'를 외치는 초등학생 또래의 아이들을 보면 영국인들의 삶의 방식이자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카부트 세일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유럽 사람들의 몸에 배어있는 근검절약 정신에다 '경박한 변화'를 불편하게 느끼고 '편안한 전통'을 몸에 맞는 옷으로 생각하는 영국인 특유의 국민성이 보태져 영국을 중고품의 천국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007 성기영

/성기영 기자

덧붙이는 글기자소개 : 성기영 기자는 <시사저널>, <주간동아>, <신동아>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영국 워릭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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