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새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쿠키 문화] 소설가 은희경(48)이 자신에게 소설의 향방을 묻는 소설집을 냈다. 소설의 길을 안내할 별자리가 사라진 시대에 작가는 고독이라는 우주선을 지구 궤도 밖으로 쏘아올린다. 수록작 6편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이 '유리 가가린의 푸른별'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출판사 사장 '나'는 부족한게 없어보이지만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기 때문에 기인한다. 어느날 '나'에게 '1991년의 코스모나츠'라는 제목의 소설 원고가 들어온다. 그건 15년전에 분실한 원고. 바로 그날 '은숙'이라는 여인에게서 메일이 온다. 그것 역시 15년전에 '나'가 띄운 편지의 답신이다. 소설과 메일이 '나'를 15년전 결혼식 피로연장으로 데리고 간다. 그러니까 소련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다음해인 1992년 봄밤, 피로연장은 격렬한 토론장이었다. 우주로 나갔던 소련의 코스모나츠들이 귀환할 곳을 잃어버리고 우주 미아로 떠돌던 시절.
"집어치워! 까마득한 우주에서 돌아와보니 조국이 없어져버렸다. 그때의 카오스를 생각해보라구." "조국 좋아하네. 폭력성을 은폐하려면 영웅이 필요했던 것 뿐이야. 뭐 인간해방? 그랬으면 저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겠냐?"
환멸과 허무의 연대였던 1992년,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 청춘의 장례를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끝나버린 청춘의 기억을 한자락 붙잡은 '나'의 마음속엔 파문이 인다.
청춘을 삼키며 흘러간 15년 세월의 처연함은 다른 작품 '고독의 발견'의 주인공 K에게로 이어진다. K는 서른 여덟살의 만년 고시생. 모범생이란 찬사 속에 살아온 그의 삶은 한없이 무겁기만 하다. 10년된 애인마저 곁을 떠난 어느날 K는 옛 하숙집 아주머니의 부고를 받고 한 지방도시로 내려갔다가 우연히 난쟁이 여성을 만나 작은 키에 대한 기막힌 설명을 듣는다. "내 키가 자라지 않은 것은 내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자랐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었어요. 세상에는 다른 나들이 많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그리고 외로움이란 어쩌면 다른 나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걸 거라고 말이죠."
그 순간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자의 몸은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나는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들었고 그 순간 내 몸도 함께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붉은 먼지로 감싸인 채 멀리 강이 보였으며 배에 가득한 손님들, 검은 외투의 남자, 그리고 흰 입김을 날리며 뭔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강을 내려다보는 젊은날의 K의 모습도 보였다."
탈골된 시간의 뼈를 주물러 짜맞추는 서글픈 역설의 미학을 담고 있는 소설집은 우리 시대, 탈골된 소설의 뼈를 허공에 던져 소설의 길을 묻고 있는 은희경의 또다른 존재증명이라 할 것이다.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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