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아버지는 '이달의 독립운동가'그러나 자식에겐 그렇게 살라고 못해요"

2007. 4. 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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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도 기자]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위원인 묵관 현익철 선생.
ⓒ2007 현익철 유족

독립운동사에 까막눈인 내가 중국을 여러 차례 누비며 항일유적지를 답사하고, 독립운동가와 유족을 만나 그분들의 영광된 투쟁사나 가슴아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몇 분이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인 장세윤 박사도 그 중 한 분이시다.

지난달 내가 미국에서 한국전쟁 사진자료 수집을 마치고 막 귀국한 다음날 장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연인 즉, 지난해(2006년) 9월 현익철 선생이 그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기념식과 '현익철 선열 공훈선양학술강연회'를 가졌고 장 박사가 강연자로 나섰다. 그런데 이 날 강연 내내 앞자리 유족석에 앉은 초라한 차림의 모녀가 어찌나 서럽게 우시는지, 내빈은 물론 당신조차도 공명되어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반드시 아픈 사연이 있을 것 같으니 함께 탐방해 보자는 제의를 하였다.

서럽게 우는 모녀, 어떤 사연이?

▲ 현익철 선생 친필 편지.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두 사람이 바쁜 날을 피하여 날짜를 잡다보니 바로 지난 일요일(4월 1일)이었다. 그날 아침에 일어나니 황사가 어찌나 심한지 앞산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언론 보도로는 황사가 전국적으로 하루종일 심하다고 하였다.

일정을 중단하고 다음날로 미루고 싶었으나 선열들께서 독립운동을 하셨을 때, 어찌 악천후를 가렸을까 하는 생각이 미쳐 그대로 서울행 시외버스 첫차에 올랐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다시 의정부행 전철을 타고, 중간 약속 장소인 도봉산역에서 장세윤 박사를 만나 의정부에 이르자 오후 1시였다.

의정부 전철역 앞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뒤 의정부시 가능3동에 산다는 유족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지명이 익은 동네였다. 나는 1969~1971년 무렵 육군 제26사단에서 군 복무를 하였기에 이곳은 숱하게 지나다녔던 장소다. 그 무렵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거나 양공주촌으로 매우 을씨년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흔적은 지워졌지만 아직도 서민들이 많이 사는 동네로 요즘 한창 재개발을 하는 중이었다.

북악파크빌 나동 302호에 묵관 선생의 유족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파크빌'로 거창했지만 20평도 안 되는 다세대주택으로, 이 집도 1800만원 전세로 살고 있다고 했다.

거실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린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현익철 선생의 건국공로훈장증 액자였다. 현익철 선생의 따님도 외손자 외손녀도 모두 돌아가시고, 외손부 임영숙(58)씨가 선생의 유품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와 장 박사가 거실에 앉자 임영숙씨가 장롱 깊은 곳에 간직한 유품 보자기를 꺼내와 펼쳤다. 유품은 모두 6점이었다. 묵관 선생의 친필편지 1점, 거의 모습을 되새기기 힘든 빛바랜 장례식 사진 1점, '현묵관 동지 제만문철', 명주에 붓으로 쓴 제문 1점, 역시 명주에 붓으로 쓴 '고 묵관 현익철 선생약사' 1점, 그리고 묵관 선생 사진 액자와 따님 현숙자(이명 영숙)의 사진액자였다.

▲ 현묵관 동지 제만문철 속의 장례식순.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현묵관 동지 제만문철에는 선생의 장례식 순서와 제문 만장, 조전 등이 기록되었는데, 선생의 장례는 1938년 6월 12일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주석 김구 선생(입원 중)을 대신하여 조성환 선생의 집례로, 헌화는 최동오 선생, 제문낭독은 조소앙 선생, 약사보고는 김학규 선생이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묵관 현익철 선생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른 것은, 묵관 선생이 임시정부의 보배로 매우 달변가이며, 뛰어난 정치이론가로 대단히 과단성 있게 민족운동 통합에 산파역을 한데다가 임시정부 장사 시절, 김구 주석 대신 흉탄에 쓰러졌기 때문이라고 짐작이 갔다.

"그날 남목청에서 연회가 시작될 때, 조선혁명당원으로 남경에서부터 상해로 특무공작을 가고 싶다 하여 내가 금전도 보조해 준 적이 있는 이운환이 돌입하여 권총을 난사하였다. 제1발은 내가 맞고, 제2발은 현익철이 중상, 제3발에 유동열이 중상, 제4발에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의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나와 유동열은 입원 치료하고 상태가 호전되어 퇴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진순 주해 '돌베개' <백범일지> 368∼369쪽)

▲ 명주에 붓으로 쓴 현익철 선생 제문.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파란만장한 가계

외손부 임영숙씨는 파란만장한 가계를 얘기했다.

묵관 선생의 한 점 혈육인 따님 현숙자씨는 아버님 생전에는 동지처럼 아버님을 도와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현숙자씨는 광복 후 귀국하였으나 결혼 생활도 순탄치 못하였고, 생활이 몹시 어려워 한때는 아들과 딸을 의정부 성심고아원에 맡겼다고 한다.

그러다가 당신의 생활이 조금 나아지자 고아원에서 아이를 찾아 그들 성씨(姓氏)까지 당신 아버지 성씨로 고쳐 현청일, 현미란으로 자랑스런 외할아버지의 대를 잇게 하였단다. 그리고 당신은 1987년에 돌아가시고, 딸 현미란도 위암으로 미국 이민 중 작고하였고, 아들 현청일씨도 2006년 6월 15일에 작고했다고 한다.

당신 남편 현청일은 의정부의 한 화학회사에 다녔는데, 그만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건축 일을 하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호구지책으로 부부 페인트공이 되었단다.

시어머니 현숙자씨 생존 때는 보훈처에서 나온 보훈연금이 살림에 많은 보탬이 되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그만 끊어져 버렸다. 남편이 쓰러진 뒤 하도 생활이 어려워 4년 전 보훈처에 호소했더니, 해방 전에 돌아가신 독립유공자는 3대까지는 보훈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 그 때부터 다시 혜택을 받아왔으나 남편이 돌아가시자 그만 보훈 연금이 끊어지고 말았단다.

▲ 현익철 선생 따님 현숙자씨.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그날 저희 모녀가 주책없이 울어서 미안해요."

임영숙씨는 뒤늦게 장 박사에게 작년 기념식장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나라에서 저희 외할아버님에게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해줘서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지만, 막상 그날 박사님의 강연을 듣고 보니 후손들이 못나고 못 배우고 여태까지 가난에서 허덕이는 게 한꺼번에 북받쳐 설움을 참을 수 없었나 봐요. 그동안 하도 어렵게만 살아와서 훌륭한 할아버지를 두셨지만 아들이나 손자에게는 할아버지처럼 그렇게 살라고 가르칠 수가 없네요.그동안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50만원 사글셋집에서 살다가 친정어머니가 도와주셔서 보증금 1800만원에 이 집을 얻어사는데, 왜 이다지도 저희 집안은 일이 안 풀리는지 집주인이 부도를 내고 잠적하는 바람에 이 집이 경매에 넘어간대요.남편이 살았을 때는 보훈연금을 받게 되자 영구임대아파트라도 얻을 돈을 마련한다면서 매달 10만원씩 주택부금을 부어왔는데, 마흔 몇 번인가 붓고는 서너 달 밀려있어요. 정말 이런 얘기는 말씀 안 드려야 하는데…."

▲ 빛바랜 현익철 선생 장례식 사진.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소설 속의 현실

곧 날씨가 확 풀리면 일(페인팅)을 나갈 거라고 했다. 박완서씨 소설에 "친일파 후손은 고관대작이 되고 독립운동가 자식은 아파트 경비원이나 도배사가 된다"고 하더니 묵관 현익철 선생 후손이 페인트공이 된 걸 보고 소설 속의 일만 아니라서 씁쓸했다.

자녀관계를 묻자 딸과 아들 남매를 두었는데 모두 가방 끈이 짧다고 하면서 아들은 중장비 자격증이 있고, 딸은 간호조무사 일을 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찬물 한 컵을 마신 뒤 일어서자 손님 대접도 못했다고 임영숙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골목으로 나오자 그때까지도 황사로 일대가 온통 뿌옜다. 장세윤 박사와 도봉산역에서 헤어진 뒤 전철을 타고, 시외버스를 타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면서 '조국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정의는 있는가?' 이런 물음을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왜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와 겨레를 배반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은 계속 주류로 여태 잘 살고 있는지?

"해방이 되었다고요? 친일파들만 해방이 된 거지요. 그들만 아주 살 판 났습니다. 일제시대는 받들어 모셔야 할 상관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마냥 저희들 세상 아닙니까?"

몇 년 전,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 대담 때 하던 말씀이 새록새록 들려왔다.

▲ 현익철 선생 외손부 임영숙씨.
ⓒ2007 박도
묵관 현익철 선생은 누구인가?
▲ 고 묵관 현익철 선생약사.
ⓒ2007 현익철 선생 유족

묵관 현익철(1890~1938. 5. 7) 선생은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나 192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관전현에서 광한단을 조직하고 일제의 침략기관을 파괴하는 등 친일주구배를 처단하였으며, 1921년 평북 정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1924년 남만주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인 대한통의부에 가담하고, 외무위원장을 맡아 중국 관헌들과의 교섭은 물론 임시정부와도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나아가 통의부가 정의부로 확대되자 중앙집행위원 겸 재무부장으로 활약하며 한인자치와 독립군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힘썼다.

1929년 이후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과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서 남만주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총지휘하였으며, 1937년 남경에서 조선혁명당을 재건하여 활동하면서 우파민족연합전선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우파 3당인 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38년 5월 7일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던 중국 장사 남목청에서 3당 통합회의를 진행하던 중, 친일파의 사주를 받은 청년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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