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간의 도시 삶 접고 귀농했습니다

2007. 2. 1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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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종락 기자] 아침부터 스산한 전형적인 겨울날씨에 부슬비까지 간간이 내리던 날, 나는 만 45년의 도시생활을 정리하고 귀농의 첫걸음을 시작했다. 대중매체를 통해 '귀농'이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귀농이니 귀촌이라는 단어는 이제 특별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그러나 귀농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 해도 막상 내가 귀농의 당사자가 돼보니 삶의 형태를 바꾼다는 것이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딸 셋 낳고 귀농 하면 진짜 애국자"

▲ 귀농 다음날 마당에서 불을 때고 있다.
ⓒ2007 이종락

"딸 셋 낳고 귀농하는 네가 진짜 애국자다."

귀농 전 친구들과의 송별식 자리에서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웃고 넘겼지만 곰곰 새겨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부동산과 사교육의 광풍 속에 누구나 아이 낳기를 기피하는 대한민국에서 나는 어쩌다 보니 딸만 셋 낳은 딸부자 아빠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텅 빈 농촌으로 살려고 가니 국가균형정책 차원에서 애국은 애국이었다.

올해 중3과 초등6학년 올라가는 큰딸과 둘째 딸, 4살 되는 늦둥이 셋째 딸과 아내, 4모녀를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의 산골마을로 들어가는 나를 보고 부모님들은 기가막혀 했다. 이미 3년 전부터 귀농이라는 단어를 입에 물었던 터였건만 막상 귀농지와 이사 날짜를 결정하니 부모님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했다.

아버지는 외아들에 종손인 나와 눈길조차 부딪치는 것을 피했고, 어머니는 분노와 탄식으로 절망감을 피력하셨다. 기껏 대학공부까지 시켜 놓으니 땅 파러 시골 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변의 지기들은 놀람과 우려, 기대가 뒤섞인 축하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길게만 느껴졌던 이삿날은 어김없이 다가왔고 이른 새벽부터 짐 싸기는 시작되었다. 궂은 날씨 속에 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귀농의 길로 떠나는 우리 식구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보냈다.

마침내 지난 10년간 뿌리를 내리며 활동했던 광명을 뒤로하고 상주로 출발했다. 의외로 담담했다. 얼마쯤 갔을까? 뒷좌석의 큰딸은 그렇게 가고 싶지 않은 시골로 향하는 자신의 처지와 헤어진 친구들이 그리워서인지 엉엉 울고 있었다. 아내는 못 본 체 하라고 눈을 찔끔거렸다.

소똥 냄새 풀풀 나는 시골마을의 빈집으로

차는 3시간을 달려 우리 5식구들이 앞으로 살아야 할 시골 땅 해발 300m 지역인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의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 몇몇은 골목어귀에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어두워서야 도착한 이삿짐을 내리고 나르는 데 힘을 합해 주었다. 고마웠다.

조그만 시골집에 이삿짐은 대충 큰 자리만 잡고 귀농의 첫날은 이렇게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시골마을의 차가운 공기와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나를 맞이해 주었고, 나는 마당 한쪽에 임시 화로를 만들어 휴지 등의 쓰레기를 태우면서 몸을 따듯하게 했다. 평소에 늘 그리던 마당이 주는 즐거움이었다.

내가 선택한 귀농지역은 앞에 계곡이 흐르는 풍광 좋은 곳도 아니고 그림 같은 집도 아니다. 평균 연령 70대의 노인들이 대부분인 18호가 서로 이웃하고 있는 전형적인 시골마을 속의 일자형 시골집이었다. 특히 우리 집 주위는 농가소득을 위해 소를 3∼4마리씩 키워 소똥냄새가 풀풀 날 터인데, 그래도 도시의 매연보다는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개의치 않았다. 귀농의 원칙인 집과 땅을 사지 말고 1∼2년은 내가 정말 시골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라는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짐 정리하랴, 아이들 학교 전학시키랴, 행정 뒤처리 등의 일로 일주일이 순식간에 가 버렸다. 와중에 떡과 고기로 마을 신고식도 적절히 치렀다. 무슨 일만 하려면 일삼아 집에 오는 마을 사람들 때문에 하던 일은 늘상 지연되곤 했다. 시골살이에도 버릴 수 없는 문명의 이기들은 확실히 도시처럼 편의를 주지 못했다. 4일만에 개통한 인터넷은 예상한 대로 거북이의 인내를 요구했고, 핸드폰은 아예 집 주변에서 불통이었다. 결국 예정에 없던 생돈 들여가며 이동통신사를 새로 옮겨서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농촌 인심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말들이 난무했다.

"시골인심 좋다고 생각했다간 큰코다친다."

"결정적 순간엔 외지사람이라고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땅 사라고 접근하는 사람 조심해야 된다."

"먹고사는 문제 말고는 이웃에 관심도 없다" 등등 시골살이 처음 하는 사람에게 위축감과 불안감을 심어주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조심스레 참고해야 할 말이기도 했다.

인심도 사납다, 농사지어서 먹고살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무엇을 찾으려 도시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 낯선 땅을 스스로 택하겠는가? 맑은 공기? 물과 흙? 이 세상에서 확실한 길은 어디에도 없고 삶의 길에 정답도 없다. 귀농이 완전한 대안일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 갈 뿐이다.

▲ 마당에서 아빠따라 삽질하는 막내딸
ⓒ2007 이종락

그래도 시골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아 있어

내가 도시에서의 삶을 버리고 귀농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권력 아니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사람행세를 할 수 있는 도시적 자본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다. 무한경쟁의 살벌한 삶 속에서 승자가 되기보다는 적게 벌어 적게 쓰면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이곳 시골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에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귀농에 대해 시큰둥 하는 혹자는 '사람 사는 세상이 어디 간들 별 수 있겠냐'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시골이라고 비껴가지 않는다고 해도 시골에는 아직은 우리가 지켜야 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아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대자연의 혜택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한한 인생 속에서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삶의 길이 보일 때, 새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만큼 인생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주리라 믿는다. 주변에서는 벌써부터 농사짓는 규모와 작물 등의 얘기로 귀농자의 먹고 살 걱정을 함께 나누고 있다.

누구는 무슨 농사를 지어 억대의 소득을 올린다는 얘기부터 논농사 만평 지어봤자 기계 값도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까지 농사도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이제 설쇠고 나면 나 역시 이러한 농사판의 일원이 될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묵묵히 하며 귀농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귀농이 과연 내 삶의 대안이었는가?'

/이종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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