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일과 삼각산, 마음으로 담아낸 산의 찰나
[일간스포츠 이방현] 사진이란 가슴으로 품어서 필름으로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승일(60) 산사진 작가와의 만남은 사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끔 만들었다.
막 해가 떠오르는 시간. 경기도 파주에서 송추쪽으로 향하는 길에 북한산이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불그스름한 구름 이불을 살짝 덮은 채 검은 실루엣으로 부끄러운듯 모습을 드러내는 북한산. 안 작가는 차를 갓길에 대고 풍경을 감상한다.
도로는 여전히 질주하는 차들로 한창이다.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것은 잔재주를 조금 부릴줄 안다는 것일 뿐이죠. 진짜로 중요한 것은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북한산의 또다른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송추쪽 야산을 오르는 안 작가로부터 북한산과의 인연을 들어봤다.

■절뚝거리던 나를 일으켜 세운 고향
자신조차도 아직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없었지만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 실수로 왼쪽다리를 절게 됐다는 안 작가. 중학교 시절부터 또래 아이들보다 힘이 약하다는 신체적 열등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유도. 하지만 사범으로부터 엄한 질책만 들었다. "그렇게 필살기만 배우려 하는 것은 도(道)가 아니다."
할 수 없이 유도를 접고 이번엔 권투를 배워보기로 작정했다. 그렇지만 조금 배우다보니 권투의 기량은 풋워크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됐다. 더이상 뜻을 둘 수가 없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진학 후 정릉으로 첫 소풍을 갔을 때였다. 노래를 부르거나 수건돌리기 등의 놀이가 싫어 친구 한 명을 꾀어 무작정 산에 올랐다.
"당시에는 길을 잃으면 굶어 죽을지도 모를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오히려 저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죠." 친구는 덩치가 꽤 컸는데도 엉금엉금 기어다녔다. 반면 자신은 오히려 산길이 더 편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시간 산 아래에서는 두 명의 학생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났다. "너같은 놈이 백운대에 갔다왔다고?" 선생님의 질책은 매서웠다. "백운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니까요."
"사진에 나오지 않으면 그땐 각오해라." 사진을 현상소에 맡기고 찾기까지 가슴은 두근반 세근반.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도 그때부터 안 작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사진은 백운대 모습이 아니었다. 봄·가을 북한산을 자주 찾았던 아버지는 "보국문 문지방을 넘어갔다 왔구만"이라며 백운대라고 쓰여진 바위는 이정표였음을 가르쳐줬다.
안 작가는 자신에게 용기를 심어준 백운대를 실제로 한번 오르고 싶어 아버지를 졸랐다. 그래서 따라 올라간 백운대에서는 30~40명의 어른들이 어린아이가 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도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져 있었다. 이렇게 어른들에게 기념사진을 찍어주는 재미에 빠지다가 어느날 벼락같은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없어도 풍경만으로 사진이 아름답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현상을 맡겼던 사진관 아저씨는 안 작가에게 사진과 빛의 관계나 포인트 등을 가르쳐주며 본격적인 사진공부에 빠지도록 거들었다.
■기계가 아니라 마음으로 찍은 산
고등학교 시절 사진과 관련한 책은 모두 일본어로 돼 있었다. 사진에 빠져들면서 일본에 대한 동경이 켜져만 갔다. 일본에 꼭 가겠다는 생각으로 하루 8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하고. 밀항하기 위해 부산에 두 번이나 내려갔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돌아와야했던 기억이 있다.
1965년 건국대 원예과에 들어가서는 학업보다 교재용 슬라이드 찍는 재미로 학교에 다니다. 67년 고령산악회에 들어가며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사진에 대한 애착 또한 산처럼 쌓여갔다. 69년 서라벌예대 사진과로 다시 입학하면서 산사진은 삶 그 자체가 됐다.
등산장비를 둘러메고 북한산에서 잠을 청한 것은 다반사. 하루는 침낭과 텐트 모두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제적 핍박과 생계에 대한 고민이 머리를 때렸다. 배고픔을 이기고 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산과의 인연을 모두 끊고 서울 중구 충무로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광고사진에 전념했다. 꽤 성공해 돈을 쓸어담았다. 말 그대로 돈을 궤짝에 모아두었다가 꺼내보니 당시 돈으로 500만원. 여직원의 월급이 4만원이었고. 아버지가 살고 있던 시흥동 산꼭대기 달동네 집이 60만원이었다.
"죽기 전에 사진집 한번 내고 싶다"는 아들의 소원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는 기꺼이 그 돈을 아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82년 첫 사진집 <산>.
스튜디오가 정착되면서 다시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먼 곳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강원도에서 살 요량으로 인제·원통 등을 돌아다녔다. "'이곳이 고향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더군요. 그런데 저한테는 고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황해도 연백군에서 살다 6·25 전쟁 전에 남한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었던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구리에서 신내동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북한산을 마주친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자신의 고향임을 가슴 떨리도록 느꼈다. "순화동에 가면 여섯살 때부터 살던 집이 아직도 그대로죠."
그때부터 다시 렌즈를 통해 북한산을 들여다보게 됐다. 북한산이 잘 보이는 집을 구해 적게는 6개월에서 몇년까지 마음을 뒤흔들 산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강화도 매산에서부터 시작해 구파발과 송추 사이의 삼하리. 양주를 거쳐 현재는 파주시 조리면 봉일천리에 둥지를 틀고 있다.
"마지막으로 관상동으로 옮겨 삼각산 작업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과연 그의 끝없는 북한산 사랑이 그곳에서 마무리될지 알 수 없지만. 연인조차도 그렇게 사시사철 오매불망 바라볼 수는 없을 듯하다.
"기계가 아닌 마음으로 찍은 삼각산 사진이 집집마다 하나씩 걸려 있으면 좋겠어요. 그 사진을 바라보며 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영혼으로 느끼길 바랍니다."
■삼각산 사진 포인트
'삼각산'은 북한산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지> <대동지지> 등의 역대 지리서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모두 삼각산(三角山)으로 기록했다.
인수봉·백운대·만경대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세(三)개의 뿔(角)과 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안승일 작가는 북한산보다는 삼각산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집한다.
안 작가가 삼각산 사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수봉의 귀바위. 인수봉에서 살짝 튀어나온 귀바위가 잘 살아나야 산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삼각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인트로는 지도상에서 인수봉에서 상계자원회수시설 쪽으로 직선을 그었을 때 그 선상에 있는 곳이면 다 좋다고 한다. "막힘 없이 삼각산을 바라볼 수 있죠. 이 선은 용문산까지 죽 이어집니다"라며 살고 있는 아파트 거실의 한 면을 꽉 채우고 있는 지도를 통해 보여주었다.
■안승일 사진작가는
1946년 황해도 연백군 출생. 6·25 전쟁 전 서울로 월남. 65년 건국대 원예과 입학. 69년 서라벌예대 사진과 입학. 지금까지 <산>(1982) <삼각산>(1990) <한라산>(1993) <백두산>(1995) <굴피집>(1997) <아리랑>(1999) 등 사진집 6권을 냈다.
사진설명. 안승일 사진집 <삼각산> 중 하나. 북한산 위로 떠오르는 해가 걸리는 것은 1년에 겨우 열흘 안팎. 사진처럼 새가 나는 때는 하늘도 모른다. 일본에서 500㎜ 렌즈를 구입하고 기다리길 3년. 드디어 원하는 장면을 담아냈다.
이방현 기자 [ataraxia@il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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