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도'와 '폐인'은 종이 한 장 차이!
[오마이뉴스 최육상 기자] 겨울의 문턱을 막 넘어온 11월의 찬바람은 무척이나 추웠다. 하지만 추운 건 옷깃에 스며드는 바람만이 아니었다. 고갯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에선 체감기온 이상의 추위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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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림 9동의 고시촌은 가파른 고갯길에 놓여 있다. 공부를 할수록 세상과 멀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며 세상을 참되게 바라보는 것일까? |
| ⓒ2005 최육상 |
지난 11월 15일 해질 무렵, 고시생들의 본거지(?)라 불리는 서울 관악구 신림 9동 고시촌 밀집지역인 '녹두거리'를 찾았을 때 든 첫 느낌은 무채색의 쓸쓸함이었다. 겨울의 길목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은 거의 비슷했다. 회색이나 검은색 일색의 트레이닝 바지에 운동화 차림, 마치 유니폼 같은 단순한 복장은 이 곳이 고시생들의 터전임을 깨닫게 했다.
고시촌, 독서실, 서점 등을 중심으로 어깨를 웅크린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지만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두툼한 책들과 한바탕 전쟁을 치르면서도 소리 없는 아우성만을 내지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이들을 향해 '폐인', '낭인'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붙였지만 이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지난한 고시촌 생활에서 나름의 '즐기는 법'을 터득한 이들을 찾아봤다. 언론에 불신을 갖고 있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도 '일'이었다.
"합격만 안했다 뿐이지 판사 검사 변호사 다 있다!"
사법시험 준비 10년차의 '베테랑' 이동연(40ㆍ가명)씨. 이씨는 "700점이 넘어야 사시에 응시할 수 있는 토익이란 놈 때문에 요즘 장수생들 골치 깨나 썩는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10년 정도 공부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봤어요. 흔히들 장수생들을 '고시 폐인'이다 그러는데 부정적 의미지만 사실 맞는 부분도 있죠. 시험은 시험일 뿐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으로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모두들 하루라도 빨리 고시촌을 벗어날 생각을 하는데 폐인들은 안 그래요. 즐기게 되죠. 폐인이 뭐 별 거 있겠어요?"
이씨는 시험에 어느 정도 '달관'한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했다. 그 자신도 어찌 보면 그런 시선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 같다. 어느덧 이 곳 생활을 즐기며 '득도'의 과정에 이른 사람들. 그들의 삶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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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시촌에 위치한 서점에서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고시 관련 헌책들. |
| ⓒ2005 최육상 |
"자신이 판사고 검사고 변호사인 줄 알죠. 보통 고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뉴스 잘 안 보게 되잖아요. 그런데 폐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사회문제에 아주 훤해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뭐가 어쨌다 저쨌다 말들이 많죠. 합격만 안 했다 뿐이지 아주 판검사가 따로 없어요."
"고시 준비하다 '깨달은 바' 있어 '퇴촌'하는 경우도"
고시 공부 7년차 송선규(36·가명)씨도 시험에 '달관'한 케이스다. 물론 꿈을 접지는 않았다. "처음엔 굉장히 쫓겼지요. 솔직히 이 곳에 들어올 때는 3년만 딱 해보자고 마음 먹었거든요. 그런데 3년 동안 내내 떨어졌어요. 낭패감이 들면서 동시에 '쫄지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초조함을 없애고 좀 길게 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다른 고시생들처럼 방에만 처박혀 공부하던 송씨는 이때부터 TV 시사프로그램도 시청하고 운동도 시작했다고 한다. 시사 전문잡지도 구독하고 있다.
"얼마 전 발표한 사시 2차 시험, 또 떨어졌죠.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책도 보고 세상도 보는 거라는 걸 믿기 때문이죠. 전 반드시 합격할 것이라는 믿음 있어요. 그것 없으면 정말 막 살게 될지도 모르죠."
송씨는 친구 얘기도 덧붙였다. "정말 고시촌에서 '득도'해서 퇴촌한 친구가 있었어요. 게으르고 놀기 좋아하는 친구였는데 이 곳에 들어와서 치열하게 잘 살았어요. 잘 안 잡힐 것 같은 법전에 재미 붙이더니 자기 가능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발견했나봐요. 하루를 빠듯이 사용하는 노하우도 습득했다고 하더니 결국 나갔어요.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쾌감을 느끼는 경우, 많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종종 있어요."
그 친구는 지금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로 이름깨나 날리고 있다 한다.
그러나 '폐인'과 '득도' 사이가 결코 멀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시 5년차 김홍중(31·가명)씨는 "솔직히 신림동에서 '득도'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면서 "'득도'하기 전에 빨리 붙어서 나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김씨는 "생각해 봐라. 외로운 고시촌 골방에서 '득도'한 사람들이 어떻겠냐. 대부분 오만하고 자기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나도 계속 낙방하고 있는데 무서운 건 시험에 떨어지는 것보다 그 횟수만큼 거만해지고 성격이 내 뜻과는 다르게 변할까봐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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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림 9동에 위치한 한 고시원. 인터넷 전용선, 고급의자, 냉장고 등 편의시설을 홍보하고 있다. |
| ⓒ2005 최육상 |
"후회하고 싶지 않다, 결과가 어떻든"
그렇다면 이들의 하루 일과는 어떨까. 공부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수 년 동안 같은 생활방식으로 지낸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하루 밥 세 끼를 제외하고는 독서실에서 그리고 자취방에서 각종 법전을 들여다 보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일과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할지 모르겠지만 이들에겐 서른 번 아니 삼백 번의 참을 인 자가 필요할지도 모를 일. 젊은 혈기가 넘쳐나는 이들도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이동연씨는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죠. 비디오방에서 몇 편이고 계속 비디오만 보는 경우도 있고 게임이나 만화책에 빠지는 경우도 있고요. 술도 한잔씩 하고 이성친구가 있는 경우 때론 데이트도 하죠. 하지만 고시촌 바깥의 사람들이 즐기는 그런 평온함과 즐거움은 아닐 거예요. 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몸짓이죠."
인터뷰를 마치고 내려오는 신림 9동 고갯길 너머로 보름에 가까워진 달이 휘엉~청 떠올랐다. 문득 인터뷰에 응한 이들의 모습이 달무리에 겹쳐졌다. 어둠을 밟고 가야 별이 빛난다고 했던가. 어둠이 짙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했던가. 이들이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분명 어둡고 힘겨운 길일 것이다. 하지만 고단한 삶의 문턱에서,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것을 깨닫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송씨의 말이 생각났다. "고시에 합격한 뒤에 '이 지긋지긋한 생활 끝내서 좋지만 스스로 좁아지고 어두워져서 세상에 나갈 자신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시에 합격하든 아니면 중도에 포기하고 나가든, 어떤 순간이든 후회하지 않고 싶다. 그게 내가 고시촌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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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육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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