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해병대 깃발이 걸려있는 교회

2005. 10. 1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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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철용 기자] 성(聖)과 속(俗)의 거리는 얼마쯤 될까? 또한 그 거리가 얼마쯤 떨어져 있어야 바람직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시대에 따라 다르고, 동시대라고 해도 종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컨대, 성과 속이 긴밀하게 통합된 삶을 살았던 중세 유럽인들에게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 할지라도, 개인적인 삶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 단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화를 희구하는 무슬림들과 개인적 삶과 공동체의 관심사로 국한하는 크리스찬들, 그리고 다분히 개인적인 삶의 문제에 집중하는 불교도들이 느끼는 성과 속의 거리는 분명 각각 다를 것이다.

그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는 그 누구도 쉽사리 대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대든, 어느 종교든 성과 속은 함께 갔으며, 함께 가고 있으며, 또한 함께 갈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과 속은 둘 다 우리 인간이 품고 있는 운명의 표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품게 된다. 따라서 이 세상 안, 즉 삶에 속해 있는 속(俗)과 이 세상 너머, 즉 죽음에 속해 있는 성(聖)은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특정한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기차처럼 모든 사람들의 삶은 성과 속이라는 두 개의 선로 위를 동시에 달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많은 사람들이 탈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이라는 책에서 톰 하트만이 말했듯이 "우리 문화는 일상생활에서 신성을 제거했으며, 예전의 신성한 날들(holy-days)은 단순한 휴가(holidays)로 바뀌고 말았다."

여행을 즐기는 나의 휴가 역시 이와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속된 여행 속에서도 마음이 경건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장엄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나, 고적한 사찰이나 사원의 경내로 들어설 때 등이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었다.

▲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래스들로 장식되어 있는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의 내부
ⓒ2005 정철용

그런데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에서 가장 속된 직업인들의 건물인 국회의사당을 구경하고 나와서 뜻밖에도 그런 경건하고 성스러운 순간과 나는 조우했다. 그것은, 국회의사당에서 채 5분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있기에 그저 구경 삼아 들어갔다가 마주치게 된 올드 세인트 폴(Old St. Paul's) 성공회 교회의 스테인드글래스들 앞에서였다.

교회 내부의 양쪽 벽들과 중앙의 제단을 빙 둘러가며 설치되어 있는 이 스테인드글래스들은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려 놓은 것이라 한다. 크리스챤이 아닌 나의 짧은 성경 지식으로는 그걸 모두 해독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스테인드글래스들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 스테인드글래스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2005 정철용
▲ 스테인드글래스 너머 세상 밖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차분해지고 있었다
ⓒ2005 정철용

유리창 너머 세상 밖에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차분해지고 있었다. 성(聖)으로 가다듬은 속(俗)의 빛이랄까. 그 빛이 조금씩 내 마음속으로도 흘러들었다. 나는 아내와 딸아이에게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교회 안을 거닐며 스테인드글래스를 통해 걸러진 빛을 내 마음에 담았다.

그렇게 모인 빛이 마침내 넘친 것은 하프를 켜고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세 천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스테인드글래스 앞에서였다.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노래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다. 차분히 흘러들던 빛이 이 세 천사의 스테인드글래스 앞에서는 오히려 밖으로 넘쳐나가는 듯했다. 속(俗)으로 되돌려지는 그 빛은 환한 하늘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 속으로 되돌려지는 환한 하늘색 빛이 너무나 아름다운 세 천사 스테인드글래스
ⓒ2005 정철용

이러한 성과 속의 교감은 이 교회의 역사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원래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는 1866년에 웰링턴 손던(Thorndon) 교구 교회로 봉헌된 것이었다. 그러다 점차 교인들이 늘어나 좌석이 부족하게 되자, 국회도서관 건물 바로 옆에 더 커다란 교회를 짓기 시작했고 1964년에 새로 지은 그 교회로 교회기능을 모두 옮겼다. 관할 교구에서는 쓸모 없게 된 옛날 교회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성직자들에 의하여 그 기능과 이름까지도 새로운 교회에 빼앗기고(그래서 새 교회와 구별하기 위해서 '올드'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이게 되었다) 건물마저 철거될 운명에 빠지게 된 이 낡고 작은 교회를 살린 이들은 다름 아닌 속세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완강한 저항이 성공을 거두어 1967년 마침내 뉴질랜드 정부는 이 교회를 사들였고 뉴질랜드 유적관리 재단(New Zealand Historic Places Trust)에 관리를 위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예배를 봉헌하지는 않고 있으며 결혼식과 음악회 및 각종 문화예술 행사들을 개최하는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속화(俗化)되었어도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는 그 성스러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항상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조용히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성과 속, 그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함께 가는 교회, 성직자와 속인(俗人) 모두 자신의 교회로 품어주는 교회, 그런 교회의 모습을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내가 보았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것이 과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에 나는 그저 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겠다. 이 교회 내부의 모습을 찍은 이 사진에서 그 중간쯤에 있는 양쪽 기둥에 특이하게도 깃발들이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들은 속세의 깃발들이다.

▲ 오른쪽 뒤에 내걸려 있는 깃발은 성조기, 그 앞은 미 해병대 제2사단의 깃발이다
ⓒ2005 정철용

영국 해군과 뉴질랜드 해군의 깃발과 함께 미국 성조기와 미 해병대 제2사단의 깃발이 교회 안에 내걸려 있는 것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본과 러시아의 침입에서 뉴질랜드를 지켜주기 위하여 웰링턴에 머물렀던 미국과 그 군대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 군대의 깃발을, 그것도 미 해병대의 깃발을 걸어 놓은 이 기이한 모습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안내문의 글을 읽고 나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성과 속의 결합을 이보다 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기차의 선로가 결코 만나지 않으면서도 또 결코 헤어지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것은 서로 마주보며 이어나가는 그 팽팽한 평행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라는 기차가 달리는 성과 속의 두 궤도 역시 그렇게 헤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마주보며 달려나가야 하리라.

웰링턴의 올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내가 마주친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래스들과 기사회생한 교회의 역사와 교회 안에 내걸은 속세의 깃발들은 그러한 진실을 말없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성과 속은 서로를 팽팽하게 긴장시켜주는 거리만큼 떨어져서 함께 달릴 때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오래 갈 수 있는 두 개의 선로라는 진실을.

/정철용 기자

덧붙이는 글지난 해 4월 뉴질랜드 북섬 남서부 해안지역을 돌아보고 쓴 여행기입니다. 다음 글은 '공원에서 만난 가을'로 이어집니다.기자소개 : 정철용 기자는 2001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서 현재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다. 이민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는 12년 동안 서울의 예술의 전당에서 근무하면서 주로 음악회, 연극, 오페라 제작 등 공연기획 업무를 담당했다. 현재 뉴질랜드의 주요 소식을 전하는 해외통신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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