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가져간 과제물을 나보고 어쩌라고?

2005. 9. 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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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미숙 기자] 어제 오전에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하게 되었다. 버스를 탈까, 자전거를 탈까 망설이다가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자전거 타기에는 그만인 기분 좋은 가을 날씨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적지까지는 사십여 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아 일을 보고 돌아오는 시간까지 하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릴 듯싶었다.

열두 시가 못되었는데 전화가 왔다. 수신자부담전화로 보아 아들 녀석이 분명했다. 지금 한창 수업 시간일 텐데 무슨 일일까 싶었다.

"엄마, 정말 미안한데 지금 어디야?" 목소리로 보아 뭔가 부탁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엄마 지금 밖에 나와 있는데 왜 그래?", "응, 나 어제 사회숙제 해놓은 거 잊어버리고 안 가져왔어. 어떡해?" 그 순간 약이 바짝 올랐다. 안 가져간 과제물을 나보고 어쩌라고?

"엄마 지금 집에서 멀리 있어?"아이는 내가 밖에 있다고 하자 반쯤은 포기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엄마 멀리 나와 있어.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해도 가져다 줄 수 없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엉 알았어. 엄마 오지 마. 숙제 못 가져 와서 손바닥 두 대 맞아야 하는데 그냥 맞을래."

속이 상했지만 아이가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 전날 저녁, 아이는 숙제를 하느라 한 시간 가량 컴퓨터를 붙잡고 있었다. 검색해서 자료를 찾고, 한글워드에 정리를 하고, 프린터를 해서 완벽하게 과제물을 해놓았는데 그걸 가져가지 못한 것이다.

열심히 한 숙제니만큼 선생님께 검사까지 맡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아이가 숙제를 하는 과정에서 과제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했으리라 생각하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아이가 어제 정신이 없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틀 전, 언니 집에 가게 되었는데 중학교 일학년인 조카 방에 들어갔던 아들 녀석이 무언가에 홀린 듯 방안에서 나오질 않았다. 조카 책상위에는 보기에도 정신없는 여러 가지 도안들이 흩어져 있었고, 옆에는 종이로 접은 멋진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이는 그것에 홀딱 빠져버린 것이다.

▲ 아이가 만들고 싶어하는 자동차 종이 모형
ⓒ2005 장미숙

"형아. 이건 어떻게 만들었어? 나 좀 알려줘. 어떻게 하는 거야?"

"넌 못해. 이게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시간 많이 걸렸어."

원래 손재주가 좋아서 종이접기를 무척 잘하는 조카는 동생을 무시해 버렸지만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붙어서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조카는 아이에게 방법을 알려주었다. 조카가 만들어놓은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아이는 집에 올 때가 되자, "형아, 제일 후진 것 하나만 주면 안 돼?" 하며 또 졸라댔다.

"안 돼.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데…. 절대 안줘." 조카가 딱 잘라 말했지만 아이는 기어이 얻어가겠다고 현관문에서 한발을 집에다 걸쳐놓고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똥고집에 결국 조카는 제일 후지다고 생각한 모형 하나를 건네주었다. 학교에 가서 자랑하겠다고 아이는 싱글벙글이었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자동차 종이모형 전개도를 프린터 해야 한다면서 온통 칼라 판인 전개도를 세장씩이나 뽑았다. 칼라잉크소모를 걱정하는 내 말에도 아랑곳 없었다.

▲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는 모형 조각들
ⓒ2005 장미숙

전개도를 쳐다보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아이는 그걸 하나하나 가위로 오려가면서 붙이기 시작했다. 순서와 방법은 컴퓨터를 보고 따라했다. 그렇게 밥 먹는 시간과 숙제 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외에는 종이 모형을 만드느라 평소에는 열시 전에 자던 아이가 열두 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으니 정신이 없을 수밖에….

▲ 섬세함이 필요한 부분들
ⓒ2005 장미숙

그리고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또 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것 같으면 나도 잔소리께나 했을 텐데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보는 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 그냥 두었더니 종이모형 때문에 과제물도 챙겨가지 못한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숙제를 못 가져간 벌로 손바닥을 두 대 맞았다고 했다. 그리고 조금 반성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 있어도 할 일은 해놓고 해야 한다는데 동의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들던 종이모형을 결국 버려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 하나 접고 붙이고
ⓒ2005 장미숙

아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두었던 전개도를 강아지가 물어서 찢어버린 것이다. 아이는 결국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저녁밥도 굶더니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하루가 지난 지금, 아이는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다시 종이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을 만회할 뭔가 칭찬받을 일을 해야만 될 것 같다는 분위기를 읽은 탓인지 고심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모르는 척 나는 지켜보는 수밖에….

/장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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