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태경기자의 미션 업] 선교사의 희생

2005. 8. 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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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이전 스코틀랜드 자유장로교에서 파송된 133명의 선교사중 20%가 사망했으며 멀리 항해할 때 관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선교사들에게는 통상적인 일이었다. 수많은 선교사가 지금도 복음을 전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있다. 한국인 선교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하늘에는 '소망'이 있고 이 땅에는 '믿음'과 '사랑'만 있어요."

기자는 선교지로 떠난지 3개월여만에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권소망 선교사의 하관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강원도 문막 충효공원(온누리동산)에서 30대 중반 꽃다운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긴 권 선교사의 영정을 보면서 유학생활을 떠올렸다.

권소망 선교사와 남편인 박믿음 선교사,딸 사랑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한 동네에 살면서 같은 한인교회를 섬겼다. 서로 배식 당번을 자청했으며 주말이면 배드민턴을 함께 치곤 했다. 이들이 고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있을 때도 가족끼리 만나 식탁교제를 했다. 교회 앞 놀이터에서 사랑이와 내 딸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했다.

유난히 조용하며 나약하게 보이던 이들 부부가 선교사로 세워져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한없는 기대를 가졌었다. 원래 이들은 전임 선교사로 사역할 생각으로 처음부터 헌신한 케이스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통해 좀더 확실히 하나님께 충성하려던 부부였다. 박믿음 선교사는 A국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경영학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수백 차례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다.

지난한 선교사의 길을 선택한 뒤 그토록 염원하던 A국으로 떠나던 날 그들을 배웅하지 못해 나는 못내 아숴웠다. 이메일로 소식을 접하는 것으로 일단 만족했다. '언젠가 출장을 가면 만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던 중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했다. 권 선교사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오토바이에 치여 머리를 크게 다쳤다는 것. 사랑이는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했다. 두 차례나 수술을 받았지만 혼수상태라는 소식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그들이 소속된 선교회는 중보기도의 끈을 이어갔다. 권 선교사가 입원한 병원에는 연일 많은 선교사들이 방문,쾌유를 빌었다. 아마 A국 한국교회의 선교 역사상 최대 인원이 병원을 방문했을 것이다. 또 아무런 반발도 없이 그 병원에 처음으로 찬송가가 연일 울려퍼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권 선교사는 천국으로 먼저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미안해요. 어떠한 힘도 되지 못했어요." 박 선교사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인간의 어떠한 위로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에요. 도저히 찬송가가 울려퍼질 수 없는 현지 병원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론됐어요. 종일 찬양 소리가 이어졌어요. 복음이 증거된 거죠. 이 때문에 천국에 간 아내도 좋아했을 거에요."

박 선교사는 A국에 대한 마음이 더욱 새로워진다고 고백했다. 당분간 딸과 둘이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겠다는 그의 말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왔지만 결국 박 선교사 가족의 선교행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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