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아이들 잘 부탁한다 서강대교서 부부 신발 발견

2005. 6. 2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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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조명자 기자] 바로 며칠 전 일이다. 2, 7장 중의 하나인 담양 장날이 마침 그날이기에 아침부터 장 나설 채비에 부산을 떨고 있었다. 애주가인 남편이 5월 초부터 내준 숙제를 그 날 아니면 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50도짜리 영광토주에 알맞게 우려진 매실주. 우리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술이다. 콩알만한 매실 알맹이가 달릴 때부터 그 놈만 보면 매실주 타령을 했던 남편이다.

"술은 오래 묵힐수록 맛이 좋아지니까 올해는 매실주 좀 넉넉히 담그시오. 전에 우리 매실주 맛 봤던 후배들이 지금도 가끔 그 술 생각난다고 한다니까."넉넉히 담가 자기도 먹고 후배들한테도 퍼주고 그럴 셈인지 올해 초부터 유난히 매실주 타령이 심했던 남편, 그 숙제를 마치지 않으면 내 신상이 상당히 괴로우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5월 중순부터 출하된 매실이 이제는 거의 끝 무렵. 담양 천변 관방제림 가운데로 죽 이어진 장터는 온갖 과일과 채소들로 풍성하였다. 시골 장 구경의 참 맛은 당신들이 손수 가꾼 채소를 앞에 놓고 쪼그려 앉은 할머니들의 물건을 고르는 것. 그러나 그 재미가 요즘은 많이 사라졌다. 바로 시골 5일장을 순례하는 전문 장꾼들이 장터를 점령한 탓이다.

혼자 먹는 밥상, 반찬거리 사 날라봤자 냉장고 안에서 썪어가기 일쑤다. 그래도 장터에 일단 나가면 눈에 띄는 대로 사고 싶은 유혹에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쭉 고르게 통통한 보라색 가지, 동글동글한 아이 머리통을 닮은 호박 그리고 내 나이 또래처럼 노란 물이 댕댕한 오이. 그것들을 일, 이천원 어치 씩 사 봉지에 담았다.

서울에선 깡통 죽순이나 맛볼까 말까 한데 대나무 고장인 담양 장엔 갓 삶은 죽순이 넘쳐난다. 우유빛 속살을 닮은 깔때기 모양의 죽순이 양푼에 그득한데 나는 벌써 옆 동네 할머니한테 일 년치 죽순을 사 냉동실에 쟁여놓은 터. 죽순 사라고 소매를 붙잡는 할머니 손을 박절하게 내칠 수밖에 없었다.

감자와 고구마 줄거리까지, 나중에는 양 손이 부족할 판에 이르자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매실 전 앞을 훑기 시작했다.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땡볕 더위, 속 살 연한 매실은 벌써 살구 버금가게 노랗게 익은 모습이었다.

매실차를 만들기 위해선 익은 매실도 상관없지만 매실주엔 탱탱한 청매실이라야 제 맛을 낼 수 있다. 청매실이 나오는 시기를 잘 맞춰야 되는데 게으름 피우다 장이 파하게 생겼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다급한 김에 장터를 몽땅 헤집은 다음 그 중 제일 퍼런 것이 많이 섞인 것 같은 매실 두 근을 저울에 달았는데 콩알만한 것에서부터 알사탕만한 것까지, 크기도 들쑥날쑥이요 색깔 또한 제 멋대로다. 찌그러진 놈이 있는가 하면 곰보딱지도 있다. 하여튼 상품으로 친다면 말씀이 아니었다. 매실을 고르며 한심해 하는 내 표정을 읽은 할머니, "꼴은 이래도 이것이 진짜 토종 매실"이라고 열을 올리셨다.

매실을 깨끗이 씻어 소쿠리에 물기를 쪽 뺀 뒤 유리 병 3분지 1까지 씻은 매실을 차곡차곡 쟁였다. 그리고 그 위에 50도짜리 토주를 부으면 매실주 제조 끝. 비닐로 완벽하게 밀봉을 한 뒤 그늘지고 시원한 뒤란에 두기 위해 뒷문을 열었다.

한 백일 숙성시켜 걸러내면 황갈색 맑은 색과 향이 나는 것이, 30년산 발렌타인은 저리 가라다. 술병을 내 올 때마다 남편에게 "뻐길"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느긋한 심정이어서 부리나케 문턱을 내려섰는데 세상에! 술병 놓을 구석지로 30~40Cm는 족히 됨직해 보이는 거므스름한 뱀이 스르르 기어가는 것이 아닌가. 술이고 뭐고, 혼비백산한 나는 그대로 방으로 튀어 들어왔다.

이사온 지 2년 반, 매년 뱀 허물 벗은 껍질은 발견했어도 실물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보호자라곤 3살도 채 안 된 철부지 진돗개 몽이와 나 혼자 사는 시골집에 징그런 저 물건과 동고동락했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처졌다.

"시골 살려면 벌레들하고는 식구가 돼야 한다더라."이삿짐을 거들며 걱정스럽게 얘기하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 말마따나 여름이면 그야말로 벌레 공화국이었다. 지렁이, 노래기, 지네, 나방, 모기, 하루살이…. 개구리는 귀엽기라도 하지, 기어다니는 곤충류는 정말로 환장하게 징그러웠다.

그래도 지렁이는 하도 많이 봐 이제는 적당히 면역이 되었는데 지난해 여름, 심심하면 나타나던 지네는 정말 끔찍했다. 시골 사는 후배 사는 꼴 보러왔던 선배언니를 물질 않나, 진청색 형광색이 번들번들한 몸통에 수많은 발.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소리 꽥꽥 지르다 보면 놓치기 십상이었다. 지네 노이로제에 걸려 이사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던 나는 옆 집 할머니에게 지네 퇴치법을 여쭤 보았다.

"지네? 그거는 원래 있는 것이여. 지네 나오면 얼릉 잡아 쇠주에 담거나 실에 매달려 말리랑께. 고거시 허리 아픈데 겁나게 좋은 거시거등…."겁나게 좋은 약이거나 말거나 지네라는 물건은 정말 보기에도 혐오 그 자체였다. 쉽게 죽지도 않아 신문지로 때려봐야 까딱도 안했다. 나중에는 아주 두꺼운 책으로 후려치고는 그 위에 서 오도가도 못하고 징징거리던 지난 여름은 악몽으로 보냈는데 올해는 지네보다 한 술 더 뜨는 뱀까지 나타나다니.앞으로 이 집에 살 일이 막막하였다. 뱀이 싫어한다는 백반을 무려 한 포대나 구입해 집 주변에 뿌려놓은 것이 얼마 전, 담배 냄새를 제일 싫어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즉각 담배 꽁초를 까서 군데군데 흩뿌려 놓은 것도 며칠 안됐는데. 그야말로 뱀 퇴치엔 백약이 무효인 것 같았다. 촌 아줌마 경력 13년차인 후배에게 구원 전화를 하였다.

"응? 검은 색이야. 그럼 살모산가 보네. 언니 뱀 보면 즉각 동네 아저씨들 불러. 아저씨들이 독사라면 환장하게 좋아해 금방 잡아버린다니까. 작년에 우리 집 식탁 아래 끈끈이에 붙은 뱀을 동네 아저씨한테 가져가라 했더니 입맛을 다시더라구. 끈끈이에 붙지 않았으면 십만 원은 너끈할 텐데 5만원밖에 못 받겠다고 하면서.""얘, 동네 아저씨한테 연락할 새가 어디 있니? 기어가는 걸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데…."살모사 소리를 들으니 더욱 무서워졌다. 남편한테 전화를 했다.

"나 무서워 못살겠어. 뱀 다닐 만한 곳에 끈끈이를 놓을까봐.""이 사람아, 산 짐승을 그것도 내 집 안에 터를 내린 것들을 잡으면 못써. 같이 살아야지. 뱀은 먼저 해치지 않으면 절대로 덤벼들지 않는 짐승이야. 사람을 보면 제가 먼저 피하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리고 몽이가 있잖아?""몽이, 그 멍청이 놈은 마루 밑에 엎어져 잠만 자던데 그 놈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이야?"뱀 사건이 있은 그날, 하루 밤을 통째로 지새웠다. 여기를 봐도 스물스물, 저기를 봐도 꿈틀꿈틀. 꼭 내 눈에 띄지 않는 어떤 곳에 망할 그 짐승이 설치고 있을 것 같은 환상 때문이었다. 언젠가 어떤 후배에게 들었던 "뱀에 얽힌 옛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간과 짐승 사이, 미물의 가치도 존중할 줄 알았던 우리 할머니들의 사려 깊은 마음이 너무 인상 깊어 오래 동안 잊지 못했던 이야기다.

그 후배의 외할머니가 해주셨던 증조 할머니의 이야기. 후배의 외할머니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셨다 한다. 가진 거라곤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어린 자식들, 증조 할머니는 손톱 끝이 자랄 새 없이 일구덩이에 빠져 살 수밖에 없었다.

삯바느질, 품팔이, 때로는 부잣집 찬모까지. 자식들 굶기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는 중에도 한두 푼 아껴 모으길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의 집 행랑채에서 구박 받는 새끼들에게 쓰러져가는 초가 삼칸이라도 내 집에서 떳떳이 살게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드디어 어느 정도 돈이 모인 날, 할머니는 헌 집 수배에 나섰다. 돈에 맞춤한 집을 찾으려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 수밖에 없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할머니의 부지런함에 하늘이 복을 내렸는지 그 돈에는 만져볼 수도 없을 만큼 번듯한 집이 헐값에 나왔다.

4칸 기와집에 행랑채까지. 할머니는 그 즉시 집값을 치르고 이사를 감행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그 집의 비밀이 밝혀졌다. 대숲에 둘러싸인 집 안 여기저기에 뱀들이 종횡무진 활보하는, 그 집은 바로 뱀 소굴이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안방 안에 또아리를 튼 뱀이 앉아 있을 정도였으니 식구들이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나. 전 주인이 왜 그토록 헐값에 집을 내놓고 도망치듯 이사 갔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사 온 뒤에도 별 이야기를 않던 동네 사람들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아이구, 말도 마소. 대숲에서 기어나오는 뱀들을 보는 족족 그 집 머슴이 삽으로 찍어 죽였더니 갈수록 숫자가 불어나더라네. 마치 뱀신이 원한에 사무쳐 복수하등맹키. 그래서 젼디지 못하고 이삿짐을 싸부렀지."증조 할머니는 그 날부터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드렸다. 흰죽을 써 집 안팎에 골고루 뿌린 뒤 정한수 떠놓고 빌고 또 빌었다.

"이 흰죽 잡숫고 우리 새끼들 눈에 안 띄게 돌아다녀 줍시사. 비나이다 비나이다. 뱀신님께 비나이다…."할머니의 정성에 감읍했는지 어느 날부터 정말 거짓말처럼 뱀이 눈에 띄지 않더란다. 물론 뿌려놓은 흰죽도 감쪽같이 없어지고 말이다. 그 뒤 외갓집의 가세가 술술 풀리면서 외할머니의 형제분들도 모두 노력한 만큼 쭉쭉 뻗어나갔다. 후배의 증조 할머니는 자식 잘 둔 엄마의 표상이 돼 모든 이의 부러움을 받으시다가 돌아가셨다는데 내 경우에도 이 이야기가 통용되지 않을는지.남편 말대로 내 집 안에 살아 있는 생물은 모두 내 식구 아닐까? 뱀이 먼저 터를 잡았는지 내가 먼저 잡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게 어떤 공격도 하지 않는 짐승을 단지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때려잡는 것은 차마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까지 든다. 이제부터라도 남편 말대로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겠다.

"뱀아, 뱀아 제발 나 좀 봐주라. 너 때문에 오금이 저려 집 안팎을 다닐 수가 없단다. 그러니 우리 예전처럼 네 허물만 보여주는 것으로 공생관계를 유지하면 어떨까. 정말 부탁한다 뱀아. 우리 끝까지 잘 지내자."/조명자 기자- ⓒ 2005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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