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터뷰—배금자 변호사] "강하게 보일뿐 사실은 살갑죠"

2005. 6. 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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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다구요? 신문이나 방송 같은 데 나가는 제 모습이 싸우는 것이니 그렇게 보이겠죠. 사실 저 정말 가정적인 사람이에요.”주한미군 범죄 사건,정신대 문제,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에 이어 6년째 계속되고 있는 담배 소송까지 정당한 권익을 해하는 문제라면 주저 없이 정면돌파를 시도해온 배금자(44・여)변호사. ‘공격적인 말투’ ‘거침 없는 언변’ ‘할 말은 하는 사람’ 등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은 모두 소위 ‘강한 여자 배금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황금연휴가 끝난 지난 7일 오후,서울 서초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에게서 진짜 강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경북 영일군(현재 포항시)의 전형적 농촌마을에서 자란 배 변호사는 여느 시골 아이들이 그랬듯 방과후면 소를 몰고 꼴 먹이러 산을 올라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도 여섯 살 때부터 판사를 꿈꿨던 이 유별난 소녀는 산에 올라서도 친구들과 뛰놀기보다는 숙제를 할 장소를 찾아다녔고,그곳에 앉아 땅에 ‘판사 배금자’를 써대곤 했다.

그는 “아마 그 산에 제 이름 안 써진 데가 없었을 거예요”라고 웃으면서도 “‘쓰면 이뤄진다’더니 정말 그 정도로 간절한 희망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지는 것 같다”며 회상했다.

그러나 법관의 꿈을 이루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뛰어넘어야 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자진해서 상업고교를 선택했지만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2학년이 반 이상 지나서야 지인의 도움으로 일반고교(부산 혜화여고)로 전학했다.

대학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지만 법대에 가겠다던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여자가 무슨 판사냐. 얼마나 오래 공부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 줄 아느냐”며 교사직을 권했고 그는 또 한 번 돈 문제로 꿈을 접어야 했다.

하늘이 도운 걸까. 부산대 사학과 2학년 시절,복수전공 제도가 신설되면서 법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고 그 때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시 공부를 위해 최소 3년은 생활할 돈을 미리 벌어놓자는 각오였어요. 학교 수업과 과외 교습이 제 생활의 전부였죠.”그렇게 2년 동안 돈을 번 뒤 고시 공부를 시작하고자 법대 고시실 문을 두드렸지만 이 때도 사회적 편견에 부닥쳤다.

고시실은 남자 전용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평등과 정의를 실현한다는 법대에서 그런 일이 있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어요. 법대 학장을 찾아갔더니 되레 ‘왜 남자애들 공부를 방해하려 하느냐’는 소리를 들었어요. 절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끝까지 따졌고 결국 제가 ‘고시실 1호 여성’이 됐다”고 자랑스레 당시 일화를 소개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판사 대신 변호사가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판사가 됐을 때 전 사회 경험이 하나도 없었죠. 나이도 어리고. 그 상태에서 남의 인생을 가름한다는 것이 저한테는 너무 힘들었어요.” 언제나 자신만만한 모습과는 언뜻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어 그가 “무엇보다 하늘같이 떠받들여지는 판사 자리가 저에게는 너무 과분했던 것 같아요”라며 웃자 그제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생리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법원 생활이 그에게는 너무나 답답하고 불합리한 공간이었다.

그는 “1990년 단독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제 뜻을 펼칠 수 있었죠. 어린 시절 막연히 생각했던 ‘정의구현’을 실현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릴 때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당했던 김보은씨 사건,미군범죄,정신대 문제까지 소위 힘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을 위해 뛰어다니고,‘오 변호사・배 변호사’라는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맡아 인기를 끄는 등 말 그대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1996년에는 미국행을 결심,3년 만에 어학연수와 하버드대 변호사 코스를 마치고 뉴욕주 변호사 자격 시험에도 합격했다.

자신이 달려온 길을 한창 설명하던 그는 “꼭 강조해달라”며 가족 이야기를 꺼냈다.

배 변호사는 “소위 ‘잘난 여자’에 대한 우리네 고정관념이 정말 무섭더라”며 “저와 남편은 깨가 쏟아지게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기다리고 있는 건 ‘이혼설’이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불가능할 것 같던 유학 생활이 가능했던 데는 남편 덕이 크다”며 “제 유학에 맞춰 워싱턴에 발령받아 온 남편은 제가 하버드 로스쿨에 합격하자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을 자신이 돌보겠다며 지원해줬다”고 자랑했다.

배 변호사의 남편은 현재 농림부 국장으로,그의 자랑대로 사무실 화분들을 모두 직접 골라 꾸며줄 만큼 자상하다.

그는 “지금도 누구보다 바쁘게 지내지만 우리 가족이 먹는 밥은 내가 한다는 원칙은 지킨다”며 대신 남편이 설거지,청소 등 많은 부분을 도와준다고 자랑했다.

배 변호사는 “여건이 아직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커리어 우먼’이 가능하려면 제 경우처럼 남편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면서도 “그렇지만 여성들도 정신차리고 스스로를 긴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젠가 국제 무대에서 인권을 얘기하고 싶다”고 미래의 계획을 밝히며 말을 맺었다.

조민영기자 my_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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