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회의 옛글 읽기] 가던 길 멈추고

2005. 5. 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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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윤희경 기자]북한강 상류에도 봄은 가고 여름이 오고 있다. 오는 여름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짧기만 한 북한강 봄이 아쉽기 그지없다. 사람뿐 아니라 꽃들도 매한가지다. 가는 봄이 얄미워 눈을 감지 못한다. 그래서 지던 꽃들도 가던 길 멈추고 다시 피어나나 보다.

▲ 맥 없이 사위어가는 진달래 ⓒ2005 윤희경 가는 꽃들은 서럽다. 여기 진달래꽃 한 송이, 화려했던 시절은 간 곳 없고 매가리 없이 사위어가는 몸뚱이만 간신히 꽃술에 매달려 달랑거리고 있다. 그러나 새로 피어나 진달래를 닮은 철쭉 색깔은 사뭇 도도하다. 눈자위까지 붉어 눈물 자국이 선명하다.

▲ 진달래보다 더 붉게 피어나는 철쭉꽃 ⓒ2005 윤희경 앵초도 그렇다. 지는가 싶더니 또 다른 색으로 피어나 보송한 솜털이 불면 날아갈 것 같고, 건드리면 앵앵 눈물이 쏟아질 듯하다. 너무 앙증맞아 볼따귀를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다.

▲ 아직도 한창인 북한강 앵초 ⓒ2005 윤희경 아, 저 튤립 좀 봐, 꽃이 피었네. 온대지방에서만 피는 꽃, 추위에 약해 얼어죽을까 싶어 지난 가을에 짚을 덮어 주었는데 살아나 우리 꽃들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 추운 북한강 상류 맨땅에서 생판으로 피어나다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한국의 서러운 정서와 한(恨)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새빨간 입술을 벌이고 있다.

▲ 한국의 정서도 모르며 빨갛게 피어나는 튤립 ⓒ2005 윤희경 언제부터인가 접동새(소쩍새) 밤마다 울고 있다. 접동새가 밤새도록 피나게 울고 간 날의 꽃빛깔은 더욱 붉다. "접동접동" 울어대며 가는 꽃들의 발목을 잡는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울고 있다.

이번엔 접동접동 대신 "솥적다 솥적다"하고 운다. 또 조금 있다간 "솥텡 솥텡" 희한한 소리를 낸다. 솥적다 솥적다 하면 풍년이 들고, 솥텡 솥텡하면 흉년이 든다는데 솥적다 소리가 잦은 걸 보니 풍년이 들려나 보다. 솥이 적으니 큰 솥을 마련하란 뜻이란다.

하도 섧게 우니 밤잠을 이룰 수 없다. 오늘 밤은 더욱 피나게 운다. 피를 토하고 아예 그 피를 도로 되넘기며 운다. 뒷산에서 울다 목이 메고 시들하다 싶으면 앞산에 가서 운다. 온 산과 골짜기에 진홍색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그런 밤이다.

"소월"님은 진두강 가람 가에 살던 누나의 죽은 혼이 넋이 되어 운다고 했다.

▲ 마지막 정열을 다해 피어나는 철쭉 ⓒ2005 윤희경 접동접동아우래비 접동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진두강 앞마을에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 나라먼 뒤쪽의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의붓어미 시샘에 죽었습니다.

누나라고 불러 보랴오오 불설워시샘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죽어서 접동새가 되었습니다.

아홉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을죽어서도 못 잊어 차마 못 잊어야삼경 남 다 자는 밤이 깊으면이 산 저 산 옮아가며 슬피 웁니다.

- 김 소월 "접동새" 전문우리 동네도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집 터에 머슴 살던 "꽃분"이 남편이 육이오 때 의용군에 잡혀가 소식이 없다 했다. 분이가 남편을 기다리며 밤마다 울다 피를 토하며 죽었다는데... 그 넋이 구천을 떠돌다 지금도 여름만 되면 뒷산에 와 울다 꽃을 피운단다. 이를 어쩌나, 소름이 오싹하다.

접동새 소리 깊어 가면 나무의 피는 꽃들도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박태기는 밑둥부터 온통 꽃들이 닥지닥지 달라붙어 빨간 융단으로 천국계단을 하나 하나 쌓아간다. 나뭇잎이 나올 곳도 없을 성싶게 빽빽하다.

▲ 천국 계단을 쌓고 있는 박태기 ⓒ2005 윤희경 접동새를 가장 많이 닮은 꽃이 개복숭아이다. 개복숭아는 뜰 밖 샘터나 묵정밭 귀퉁이, 이름 없는 무덤가에 붙어 살다가 접동새가 울기 시작하면 꽃이 피기 시작한다. 접동접동 한이 깊어 흰색으로, 접동접동 하도 서러워 담홍색으로 피어나 눈물을 뚝뚝 떨어낸다.

▲ 접동새 성격을 가장 많이 닮은 개복숭아 ⓒ2005 윤희경 눈물을 흘리는 나무도 있다. 어제 저녁엔 접동새 한 마리 앞마당 층층나무에 날아와 울고 가더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저 나무는 분명 내가 여기 들어와 기념식수로 심은 것이련만 어이해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분이의 넋이 나무로 옮겨간 것일까. 아무래도 분이를 위해 냉수래도 한 대접 올려야 할까보다.

▲ 붉은 피를 토해내는 층층 나무 ⓒ2005 윤희경 오월이 오고 있다. 곧 뻐꾹새와 휘파람새 꾀꼬리가 날아와 싱그러운 계절을 넉넉하게 할 것이다. 봄은 가는데 이 밤에도 접동새 또 울고 있다. "너 아니 울어도 세상사 시끄럽고 서러운 일이 많은데, 너마져 밤마다 울어 사람의 심사를 이리 심란하게 만들면 어쩌란 말이냐." 아, 여름이 오고 있다./윤희경 기자<hr noshade color=#FF9900>덧붙이는 글다음 카페 "북한강 이야기"와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할 예정입니다.

기자소개 : 윤희경 기자는 북한강 상류에서 솔바우농원을 경영하며 글을 쓰는 농부입니다. 올 4월에 에세이집 "북한강 이야기"를 펴낸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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