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정에 올라 남도 땅을 둘러보니

2005. 4. 28.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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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이승철 기자]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잎에 앉은새야녹두잎이 깐닥하면 너 죽을 줄 왜 모르니새야새야 파랑새야 너 뭣하러 나왔느냐솔잎 댓잎 푸릇푸릇 하절인 줄 알았더니백설이 펄펄 엄동설한이 되었구나- 녹두장군 전봉준을 다룬 민요 <새야새야 파랑새야> 앞 부분- ▲ 신중리에 있는 동학혁명모의탑 ⓒ2005 이승철 고부 군수의 모진 수탈과 학정에 맞서 농민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농민혁명, 반외세 반봉건이라는 새로운 민족주의 정신으로 우리 근대사의 한 획을 그은 동학농민혁명운동의 발상지인 전북 정읍시 일대와 역사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4월 21일 오후, 첫 코스는 1893년 11월 사발통문(沙鉢通文)으로 모의하여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옛터에는 주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삼거리에 "동학혁명모의탑"이 덩그렇게 서 있었다.

안내문에는 "조선 말엽 국운이 극히 미약해지자 탐관오리의 폭정 자행으로 정치 질서는 문란해지고 인권이 수탈됨은 물론 주민의 생계까지 어려워지는 등 주민은 도탄에 빠져 정부에 대한 원성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이곳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전봉준 선생 등 20여명이 모여 1893년 11월 우국의 불타는 마음으로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국정개혁을 모의하여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세우자 많은 군중이 죽산에 집결 고부성을 점령하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 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보국문 ⓒ2005 이승철 사발통문이란 이름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적지 않고, 둥그런 사발을 엎어놓고 그 원을 따라 이름을 적은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고 하는데 지혜로운 조상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때는 "동학란"이라 하여 반역적인 지역농민항쟁이라는 왜곡된 역사로 기록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됐다. 혁명의 발단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과중한 수세 징수였다. 당시 고부군에는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상류에 농민들이 농사 관개용으로 쌓아 만든 물막이 둑인 민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그 하류에 새로 만석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만석보 물을 이용한다 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수세를 징수하였다. 농민들은 몇 차례나 수세 감면 청원을 하였으나 오히려 농민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하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 황토현 전적지의 녹두장군 전봉준상 ⓒ2005 이승철 1894년 봄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8천여 명이 백산에 집결했다. 급보를 받은 전라감영에서는 수천 명의 관군을 보내어 소탕하게 했지만 정읍군 덕천면 도계리에 있는 황토현 전투에서 영장(營將) 이광양 등 대부분의 관군들이 전사하고 농민군이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황토현 전투를 계기로 농민군은 1개월만에 호남 지방을 석권했다. 농민군이 대승을 거두고 승세를 잡은 황토현에는 상당히 넓고 큰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해발 70여m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고 언덕 아래로는 넓은 주차장과 함께 사당과 기념관, 보국문, 전봉준 선생 동상 등 기념물과 건축물들이 자리 잡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농민혁명의 꿈과 한, 이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 황토현 전적지의 기념관 ⓒ2005 이승철 다음날인 22일에는 황토현 전투를 위해 집결하였던 부안군 백산에서 "다시 피는 녹두꽃 그 역사의 희망"이라는 동학농민혁명 백산봉기 111주년 기념대회가 거행되는 현장을 찾았다. 백산은 부안과 정읍, 김제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위치한 들판 가운데의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언덕 위에는 백산봉기 기념탑과 함께 "동학정"이라는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옛날에는 백산성이 있었다고 하나 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동학정과 기념탑 앞 공터에는 수백 명의 학생들과 동학혁명기념사업회 관계자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따뜻한 봄 햇살 사이로 꽃내음이 가득합니다. 언뜻언뜻 갑오년 농민군들의 함성과 절규가 가슴을 울리기도 합니다. 봉건체제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켜내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섰던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111년이 지난 오늘, 다시 역사의 현장을 찾고 보니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모였던 갑오 선열들의 뜨거운 숨결이 되살아오는 듯합니다(하략)."-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김정기 이사장의 "우리 역사의 들밭에 녹두꽃 다시 피우며" 중에서 ▲ 백산성터에서 거행된 기념식 모습 ⓒ2005 이승철 기념식에 참가한 학생들의 자세와 표정도 진지했다. 멀리 영남대학교에서 온 한 대학생은 "역사 공부 시간에 그저 조선 말에 있었던 작은 한 사건 정도로 배우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 근대사로서의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반외세, 반봉건의 농민혁명이라는 민족사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또 한 중학생은 "우리 동네에 이런 역사적 현장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며 가난한 농민들도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산의 중앙에 서 있는 동학정에 올라서면 사방의 주변이 넓게 열려 있다. 변산과 부안 읍내가 가까이 보이고 정읍 쪽으로는 두승산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다. 김제와 신태인 쪽으로는 끝이 안 보이는 지평선이 펼쳐져 우리 나라에도 이런 넓은 들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을 자아낸다.

▲ 백산성에 있는 동학정 ⓒ2005 이승철 111년 전, 1894년의 그날 짚신을 신고 하얀 광목 바지 저고리에 하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농민군들 8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구를 치켜들고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면 그 절규는 어디까지 울려 퍼졌을까? 저 평야, 저 땅들은 지금도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고 있을까?결국 일본군의 개입으로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퇴하여 전봉준도 잡혀 처형 당하고 혁명도 실패하였지만 민족자존과 타락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던 동학농민군들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계승되고 있는 것이리라. ▲ 동학정에서 바라본 김제평야 ⓒ2005 이승철 /이승철 기자<hr noshade color=#FF9900>덧붙이는 글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시인이승철 을 검색하시면 홈페이지 "시가있는오두막집"에서 다른 글과 시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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