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비밀과 거짓말'..고향마을에 비친 시대의 자화상

등단 10년을 맞은 소설가 은희경(46)씨가 장편 ‘비밀과 거짓말’(문학동네)을 펴냈다.
등단 이후 1년에 한 권꼴로 신작 소설을 선보여왔던 데 비해 이번 소설은 꼬박 2년이라는 시간과 공력을 쏟아부었다.
2003년 여름부터 2004년 봄까지 계간 ‘문학동네’에 연재하는데 1년,재탈고하는데 또 1년. 시간의 무게 탓일까. 이전 작품들이 경쾌함과 발랄함으로 다가왔다면,이 소설은 산고를 짐작케 할 만큼 무겁고 깊다.
“그날 오후 두시 십분, 공무원 가족을 위한 요양시설에서 정정욱이 육십구 세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며 상처한 지 이년 만이었다.
그는 K읍에 첫 아스팔트 포장을 했고 경찰서와 우체국과 학교 강당을 지었으며 K대교 등의 교량과 저수지를 건설하고 K군 도로를 확장했던 경제개발계획 시절의 산업 역군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작가의 고향인 고창을 연상케 하는 K읍. 외형적으로 보자면 주인공인 영준의 성장기와 영준・영우 형제의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다.
그러나 좀 더 확장하면 두 형제와 아버지 정정욱의 이야기이며,다시 넓어져 아버지 정정욱과 할아버지 정성일,또다시 정씨 집안과 최씨 집안의 이야기이고,다시 K읍의 이야기이고,결국은 작가 은희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아버지 정정욱의 죽음과 그가 남긴 유산인 집문서와 가문에서 내려오는 북으로부터 열린다.
“오래 전 K읍의 채권자들에게 팔렸던 아버지의 집 중 일부가 한 여자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뜻밖의 일이었지만 지금껏 아버지가 손수 그 여자의 대리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이제 관리할 사람이 없으니 그 집을 팔아 돈을 여자에게 보내주라는 것이었다.
영우는 아버지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선은 누구인가. 할아버지 정성일은 장남이 낚싯배 사고로 사망하자 며느리에게 상복을 입지 못하게 하고 바로 개가시킨 뒤 맏손녀인 명선을 벙어리 식모의 손에 맡겨 키웠다.
그러나 명선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식모 취급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열여덟 나이에 저수지에 몸을 던져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집을 팔아 명선에게 유산을 물려주라니! 죽은 사람 앞으로 재산을 남겼을 리는 없을 터. 영준과 영우 형제는 명선이라는 동명이인의 존재를 어림한다.
또다른 명선은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은 이복 남매. 명선의 친모는 정씨 가문과 원수처럼 지내던 최씨 집안의 딸이다.
정정욱이 집을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바깥 소생인 명선에게 물려주는 것은 이 소설이 화해를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큰아버지 소유였다가 다시 아버지 소유가 된 북도 그런 의미에서 화해의 큰 틀거리를 보완하는 소설적 제재인 셈이다.
소설에는 이처럼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있고,사랑과 운명의 이야기가 있고,공간과 시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주인공은 지난 세기를 개발붐으로 통과한 K읍 자체다.
“K읍의 소년이 먼지 속에서 여행자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면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었다”와 같이 정교하고도 아름답게 회고된 문장을 뒤로 하고 K읍은 서서히 굳게 입을 다물며 죽어간다.
“3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고향의 현재적 의미,아버지가 살았던 시공간에 대해 써볼 작정을 했지요. 글을 쓰는 동안 사람들이 고향에 대해 말할 때 결국 그것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타인’에게 말을 걸었던 은희경은 이번 소설에서 자신에게 말을 건다.
‘스스로 성장을 멈추었다’는 열두 살 애어른 진희를 내세웠던 ‘새의 선물’과 ‘58년 개띠’ 남자들을 내세운 ‘마이너리그’에 이어 이 작품도 역시 한 편의 성장소설로 읽힌다.
그러나 예의 두 작품이 작가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삶과 성장에 대해 진술한 것이라면 이 작품은 직접 삶을 마주한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이란 늘 소설가의 현재를 반영하지요. 이야기 속에서 과거를 끌어냈든, 미래를 상상해놓았든 거기에서 삶을 읽어내는 것은 현재의 눈이죠. 새로운 이야기로 들어가는 경계에 섰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작별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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