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 가을아,너도 쉬어 가렴

2004. 10. 14.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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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에 곱게 물든 선(線)이 남도의 황금들판을 달린다.

담양 대밭에서 태어난 선은 영암 월출산에서 달의 부드러운 심성을 닮고,득량만 뻘밭을 걸어온 선은 보성 녹차밭에서 우아한 곡선을 벗한다.

그리고 녀석들은 순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지붕에서 시골 아낙의 어깨선을 닮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늙은 호박 몇개 정도는 품을 넉넉한 선으로.남도의 가을은 고향 어머니의 품만큼이나 넉넉하다.

그 중에서도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 태동한 순천 낙안들판과 낙안읍성의 가을풍경은 남도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돌담 안 감나무는 저마다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가을을 달고 있고,흥부전에나 나옴직한 커다란 박은 해묵은 초가지붕에서 나날이 몸무게를 더하고 있다.

조선시대 어느 해의 가을로 떠나는 시간여행은 희미한 아침안개를 뚫고 해자를 가로지르는 평석교를 건너 청・적・백색의 군기가 나부끼는 낙안읍성 동문을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낙안읍성은 원래 토성으로 태조 6년인 1369년에 이곳 출신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1626년에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길이 1410m의 견고한 석성에 둘러싸인 낙안읍성은 시간이 정지된 고을이다.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대로의 북쪽엔 동헌과 고을 수령의 숙소인 내아,외부 손님을 맞던 객사,향교 등이 위치하고,대로 남쪽엔 초가집과 대장간 장터 서당 우물 연자방앗간 텃밭 등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다.

낙안읍성의 하루는 순천만 갈대숲에서 태어난 해가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전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알리는 이장의 확성기 방송을 신호로 분주해진다.

들일을 위해 성문을 나서는 촌로들과 이른 아침밥을 준비하는 아낙들의 모습이 확성기 방송만 아니라면 영락없는 조선시대의 고을 풍경이다.

해가 감나무 위에 걸리면 조용하던 낙안읍성은 갑자기 장터처럼 시끌벅적해진다.

국밥 냄새가 구수한 장터의 평상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읍성대장간에선 쇠망치질 소리가 요란하다.

그리고 잘 익은 홍시가 텃밭에 떨어질 때마다 깜짝 놀란 참새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날아오른다.

108세대가 살고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초가집들은 모두 비슷한 구조다.

돌담이나 흙담에 둘러싸인 집은 가구당 2〜3채의 초가와 마당,텃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당과 연결된 텃밭에는 고추 상추 토란 아주까리가 자라고 있고 우물 옆에는 미나리꽝까지 갖춰져 있다.

왜구가 출몰하던 시절에 성안에서 웬만한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하던 전통이 연면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리라.낙안읍성의 명물은 초가집을 에두른 나지막한 돌담길이다.

이끼 낀 돌담엔 울긋불긋 단풍이 든 담쟁이덩굴과 자주색 나팔꽃,그리고 호박덩굴이 휘감고 있어 더욱 정겹다.

조선시대로의 여행이 신기한 듯 돌담 안을 기웃거리다보면 연자방앗간과 짚물공예방,삼베 짜는 집,서당,도예방 등이 차례로 스쳐 지난다.

추수가 한창인 요즘은 짚을 이용한 임채지 선생의 짚풀공예 시범이 최고의 인기.TV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장소로 극중 주인공인 장금이(이영애 분)가 역병이 도는 마을에 들어와 병을 고쳐주고 역병의 원인을 알아내는 장면이 촬영됐던 세트장도 낙안읍성의 명소.마을 고샅길을 한바퀴 돌아 가장 높은 남서쪽 성벽에 올라서면 낙안읍성 안팎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보는 초가지붕의 부드러운 선은 주변의 산세를 닮았다.

지붕선은 성벽을 넘어 성밖마을의 초가지붕으로 이어지다가 드넓은 황금들판을 달려 이름모를 야산의 능선을 향한다.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초가지붕에 석양에 물드는 것도 잠깐. 어둠이 초가지붕에 커튼처럼 내려앉고 북적거리던 구경꾼들이 하나 둘 떠나고 나면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시계바늘은 다시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별빛이 아름답던 조선시대의 어느 가을밤으로…순천=글・사진 박강섭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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