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이 주목한 한 재일조선인의 죽음

2004. 3. 30.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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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박철현 기자] ▲ 형식은 지원제였으나 강제로 징병된 소년병들. 일본 진보성향 신문인 <아사히신문>이 일제말기 강제징용 당한 후 일본에서 쓸쓸히 숨져간 한 한국인의 죽음을 다룬 기사가 재일교포 사회 등에서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시바시 기자는 누구? 이 기사를 작성한 이시바시 히데아키는 <아사히신문> 사회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아시아기자클럽 등의 활동을 통해 재일 한국인의 차별문제 등에 대해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해온 저널리스트로도 유명하다.

특히, 그가 쓴 "외국인 참정권을 생각한다"(2000년 3월 23일 작성. <아시아기자클럽통신> 4월호)는 재일 한국인으로 대표되는 외국인의 참정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본사회 및 정치인들을 정면으로 고발하여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시바시 기자는 29일 <오마이뉴스>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기사 속에 등장하는, 한국에 살고 있는 동생의 연락처를 말해 주고는 싶지만, 그분이 원하지 않을 듯 하다. 이 기사 역시 번역해서 그분께 다시 편지로 보내드려야 한다”며 자신이 쓴 기사가 혹시 동생과 고인의 명예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 <아사히신문>은 28일자(전국판) 사회면 머리기사로 일제의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된 후 신경장애(정신병)을 얻어 이후 지난 2000년 사망할 때까지 고통의 나날을 보낸 김백식(사망 당시 75세)씨의 인생유전을 대서특필 했다.

아사히 기사에 따르면, 그는 일제패망 직전인 45년 5월말 일본 나가노 육군병원에 수용된 이후 지난 2000년 사망 때까지 육체적 병고와 정신적 외로움을 겪다가 생을 마쳤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김씨와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은 전쟁피해자는 무려 약 1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최초 몇 년간 그의 병세는 꽤나 심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치료를 거치면서 그의 몸 상태는 다소 안정을 찾았지만 이후 그는 말문을 닫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폐쇄병동에서 하루종일 멍히 창밖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를 돌봤던 간호사는 증언했다.

4년전 말기암으로 도쿄시내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둔 그는 현금 4만엔가량과 "조선적"이라고 적힌 외국인 등록증을 남겼다. 그의 유골은 재일조선인을 위해 65년에 만들어진 "국평사"라는 절에 안치됐다.

고향인 경기도 모처에 살고 있는, 열살도 넘게 나이차이가 나는 그의 동생은 형의 부음소식을 전해듣고 "어릴 때 형 얘기를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다"고 밝히고 있으나 반세기가 넘도록 형제의 인연은 닿지 못했다. 결국 형의 죽음이 동생에게 형제의 인연을 일깨워준 셈이다.

지난 65년 한일협정으로 한일 양국(민)간의 과거사청산은 끝났다고 일본은 주장하고 있지만 조약에서 다루지 못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종군위안부 문제 등은 차치하고라도 한 인간이 일제통치를 계기로 철저히 파괴되고 또 이후 고통속에 살다가 생을 마친 경우가 비단 김씨 뿐만은 아닐 것이다.

<아사히신문>측은 "이번 기획은 여러 인생과 당대의 시간 혹은 시대를 하나의 표제어로 응축시켜 매월 하나씩 싣도록 하는 기획기사의 일환"이며, "3월의 경우 "뼈(骨)"를 주제로 강제징용 당한 재일 한국인의 삶을 다루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28일자 <아사히신문>의 해당 기사 전문으로 기자가 번역한 것이다.

▲ 고 김백식씨의 기사가 실린 <아사히신문> 28일자 사회면. [뼈(骨)-이국의 병동, 마음을 닫은 채]4년 전 2000년 2월 15일 새벽. 육군2등병 카네바라 햐쿠쇼쿠(金原百植)씨가 동경도 코다이라시의 국립정신병원 신경센터 무사시병원 4호관 1층의 병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말기암이었다. 당직의가 30분 정도 심장마사지를 실시했지만, 2시 6분에 사망한 것이 확인되었다. 향년 75세.죽은 남자가 남긴 것은, 한 상자 가득 담긴 새하얀 유골과 현금 4만엔 정도, 그리고 "조선적"이라고 적힌 외국인 등록증. 본명은 김백식(金百植). 1944년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반도에서 일본군에 징병당해 전장에 투입된 후 마음을 다쳤다. 그 이후 그의 시간은 멈춘 채 지속되었다.

병원에서 확인한 그의 진료차트는 93년도부터 기재되어 있었다. 그 이전의 상황은 단편적으로만 확인되고 있다. 그는 45년 5월 말, 나가노의 육군병원에 수용되어 1개월 후 치바의 쿠니후다이 육군병원(현 국립정신 신경센터 쿠니후다이병원)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패전 직전인 8월 6일 당시의 상이군인 무사시 요양소에 다시 재입원하게 된다.

전쟁은 많은 신경장애를 낳는다. 실제의 두부(頭部) 부상이나 전장의 극한상황에 의한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신경장애가 발생한 병사는 쿠니후다이 병원에 집결되어 전국의 요양소로 다시 보내졌다. 37년의 일중(日中)전쟁 이래 그 수는 약 1만명. 김백식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최초의 몇 년간 병세는 꽤나 심각했다. 여러 번 치료를 거친 후, 몸 상태는 안정되었지만 그 이후 김백식은 거의 말문을 열지 않았다. 폐쇄병동의 6인실의 침대에 허리를 걸치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를 담당했던 간호사(52)에 의하면 석양이 질 무렵 500엔으로 매점에서 주스를 사서 동의 홀에 걸터앉아 그것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고 한다. 식사시간이 되면 조리실에 와 식사를 도와주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한다.

위암수술을 위해 98년 가을에 3개월간 다른 병원에 입원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세월을 무사시 병원에서 보낸 김백식. 가족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채, 면회하러 오는 사람들도 없었다. 일본어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위사람들은 전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조용하게 조선어로 노래를 불렀다. 일전에 같은 코다이라시에 있는 조선대학교에 같이 동행했을 때, 학생들이 조선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상태는 여전히 그대로 였다. 무슨 계기로 김백식은 안으로만 침잠하여 말을 하지 않은채 자신에게 열쇠를 걸어 잠가 버렸던 것일까? 진료기록표에는 “전장불명(戰地不名)”이라고만 적혀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조선은 해방되지만, 다시 또하나의 전쟁을 맞아 지금도 남북은 분단되어 있다. 그것을 김백식은 알고 있을까? 그것 역시 모르겠다. 김백식은 사망 이후 코다이라 시청에 의해, 그의 유골은 코다이라시 바로 옆에 있는 히가시무라야마시의 국평사(國平寺)로 옮겨지게 된다. 재일조선인을 위해 65년에 만들어진 국평사는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의 유골이 전해진 날은 음력으로 석가가 성불한 날. 그 때문일까? 국평사의 윤벽암 주지(47)는 김백식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혹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어딘가에 있지나 않을까? 외국인 등록증에는 본적지인 한국 경기도의 촌락명까지 적혀 있었다. 윤 주지의 의뢰를 받아들인 법무사 하정윤(52)이 한국의 해당관청에 신원조회를 위한 편지를 보냈다.

수 개월 후, 생년월일이 잘못 적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인물로 판단되는 호적이 발견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양친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나이가 꽤나 차이나는 동생(63)이 같은 촌락에 살고 있다는 연락이다. 형이 징병당했을 때 그의 나이 3살, 그러나 병원에 있었던 김백식의 사진을 보여주자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다며 놀랐다고 한다. 하 법무사는 그 동생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제대로 된 묘지도 없고, 유골은 받을 수가 없다. 형의 호적은 정리하고 싶으니까 사망증명서를 보내주었음 좋겠다”며 미안한 기색으로 밝힌 것이 전부다. 하 법무사는 결국 사망증명서의 수속을 밟지 않았다. 혹시 호적이 말소되어 버린다면, 김백식의 “생(生)”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 정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지워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김백식의 “생”을 조사하면서 얻었던 것을 기사화하고 싶어 유족인 동생에게 승낙을 받기 위해 편지를 보내었다. 금년 1월에 도착한 승낙의 답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징병으로 나간 이후 소식이 끊어진 형님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형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잊고 지냈죠. 그러다가 어느날 관청에서 연락이 왔어요. 일본의 병원에 있던 형이 저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는…”“형님의 한많은 인생을 공정하게 밝힐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기원하고 싶습니다.”싸늘한 봄날씨의 무사시노. 나무들에 둘러싸인 병원에서 80대의 일본인 옛날 병사 3인이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다. 무사시 병원은 지금도 전쟁 후를 그대로 잇고 있고, 또 남기고 있다.

카네바라, 아니 김백식 이등병의 유골함은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국평사의 납골당 금속록커에 안치되어 있다. 큰 가람의 지하 1층. 차가운 공기가 발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이시바시 히데아키(石橋英昭)/박철현 기자 (filmtwo@yahoo.co.kr)- ⓒ 2004 오마이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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