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에 어김없이 가을이 왔지만..

▲ 가을 걷이가 한창인 농촌에는 한숨이 가득합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가을입니다. 그리운 사람과 잊혀진 사람에게 편지쓰기 좋은 계절입니다. 그리고 옛 사랑의 추억을 되새기며 빛 바랜 그리움의 갈피를 정리하면 좋은 휴일입니다. 아늑한 감상에 잠겨 가을 들녘에 나섰습니다. 향긋한 가을 냄새와 청정한 하늘은 지친 몸을 달래기에 좋았습니다.
하지만 가을 편지를 쓸 수도, 부칠 수도 없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들녘에는 농민들의 아픔이 쓰러진 벼 포기처럼, 땅에 떨어진 과실처럼 절망으로 드러누웠습니다. 도시인들의 거실에는 아름다운 농촌 풍경화가 걸려 있겠지만 이곳 들녘에는 알곡도 맺지 못한 것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 연탄은 발로 차도 괜찮지만 농촌을 발로 차면 큰일 납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슬픔과 그리움으로 밥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허기진 것은 슬픔이 아니라 고통입니다. 슬픔은 기꺼이 내어줄 수 있지만 곳간과 밥상은 내어줄 수 없는 절대절명의 목숨입니다. 가을 하늘이 저토록 푸른 것은 낭만을 위한 게 아니라 쭉정이가 되지 말고 알곡을 맺으라는 게 하늘의 뜻입니다.
자식도, 곡식도, 농토도 다 내주었건만 이젠 목숨까지 내 놓으라고 합니다. 핸드폰을, 자동차를 수출하기 위해서는 농업개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더 이상 경쟁력 없는 농업에 연연하지 말라고 눈총하며 농촌 포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무슨 차를 타십니까. 외제차 고급승용차... 농민들은 경운기를 몹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농민들은 한・칠레 FTA(자유무역협정)를 비준할 경우 한국 농업은 붕괴된다며 반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농어촌특별세법, 부채특별법 등 농민지원 특별법을 제시하며 설득하고 있지만 농민들은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나라 농촌 초토화에 앞장 선 농업당국을 신뢰할 없다는 것입니다.
전기환 전농 정책위원장은 "WTO(세계무역기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초국적 자본이 세계 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수탈기구"라면서 "세계무역기구는 UR협상을 통해 각국의 시장개방확대와 GATT체계에 없었던 강제규정까지 만드는 등 초법적 수탈기구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분통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 들녘이 허허벌판이 되기 전에 농민들의 가슴은 허허벌판입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농토에는 희망의 깃발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농가마다 "한・칠레 FTA 비준반대", "WTO협상 결사반대"가 분노의 깃발로 꽂혀 있습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강제 이농 혹은 야반 도주뿐이라고 합니다.
밥은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밥은 목숨이라고 했습니다. 하늘과 목숨을 가지고 흥정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옛 어른들이 "밥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고 했듯이 WTO는 한 나라의 하늘과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는 안됩니다. 왜 농민운동가가 목숨까지 끊으며 저항했는지 새겨봐야 합니다.
▲ 밤이 늦도록 일하고 돌아가 누운 아버지들은 밤새 신음합니다. ⓒ2003 최도영씨 제공 지금은 누드의 시대입니다. 돈만 된다면 옷도 벗어 몸도 주고 사랑도 주는 벌거숭이 시대입니다. 하지만 밥은 벗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가 아무리 엉망진창일지라도 목숨을 내어주고 화려한 2만불 시대로 가자는 주장은 협상이나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가 장악한 세계 질서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남의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내 시장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물론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거래를 해선 안됩니다. WTO가 아니라 그 할애비가 강요해도 옷은 벗을 수는 있어도 몸을 내어줄 수는 없다고 당당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 허수아비가 쓰러진 것을 보면서 쓰러진 아비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습니다.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농촌들녘에서 예전에 불렀던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몸과 몸을 부딪쳐 춤을 추며 부르던 그 노래가 잊혀지거나 힘을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배달에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손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밝은 태양 솟아오르는 우리 새 역사삼천리 방방골골 농민의 깃발이여찬란한 승리의 그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민중가요 "농민가" 가사 "전문") ▲ 볏단을 쌓는 농민. 혹시 형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나라가 망하든 백성이 피폐해지든 자신들의 안위에 전전긍긍했던 착취 계층은 100년 전에도 있었고 100년 후인 지금도 건재합니다. 나라가 망하든 농민이 죽어가든 상관없이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지배계층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입니다. 100여년 전 동학농민의 분노와 희망을 담은 이런 노래를 새겨봅니다.
붉은 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보국안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한울북 울리며흙 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유도 불도 누 천년의 운이 다했다 농민들의 흐느낌이다검은 강물 햇살에 잠겨 억눌림의 설움이 받쳐척양척왜 기치가 높이 솟았다 개벽고 울리며주린 배를 움켜잡고서 죽창 들고 일어선 그날태평곡 격앙가를 볼 것이다 농민들의 아우성이다한울도 울고 땅도 울었다 가렴주구의 설움이 받쳐제폭구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성주소리 드높이며초근피죽 한 사발에 울고 울었다 갈가마귀 울부짖던 그날춘삼월 호시절을 볼 것이다 농민들의 불망기이다저 흰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검은 해가 비로서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햇불이 탄다하늘아래 들판의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는 무엇이었나갑오년의 핏발 어린 외침은 우리 동학 농민피다("동학농민가(東學農民歌)" 가사 "전문") ▲ 코스모스가 핀 가을 들녘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가을들녘에서 두 노인을 만났습니다.
이학순(77・전남 광양시 옥곡면) 할머니는 "8남매 전부를 도회지로 내 보내고 혼자서 살고 있다"며 "올해는 태풍이 과일을 사그리 망가뜨렸다"며 망연자실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김판수(78) 할아버지는 "자식 6남매 중 큰아들을 빼고 전부 도회지에 나가 살고 있다"면서 "큰아들도 농사일보다는 대처에 나가 일을 하고 있다"며 일손 부족의 어려움을 토로했습니다.
아이 울음 소리가 끊긴 농촌, 그 곳에는 노인들만 덩그라니 남아 있습니다. 농도(農道)인 전남의 청・장년 인구는 12만 4천여명으로 지난 71년 84만 4천명에 비해 85.5%의 인구가 줄어든 것입니다. 머잖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농촌은 적막강산이 되고 일손을 잃은 농촌은 끝내 폐허가 될지 모릅니다.
▲ 이학순 할머니는 자식 여덟을 도회지로 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우리가 먹거나 버린 것은 밥이 아니라 노인들의 피땀입니다. 자식들 대처에 다 내보내고 일손이 없어 새벽부터 밤늦도록 허리 굽도록 일해 생산한 쌀이 어찌 그냥 쌀이겠습니까? 피땀으로 지어 내놓은 곡식을 정부당국이 얼마에 값을 매길지 농민들은 불안합니다.
농촌이 병든 것은 농약 때문이 아닙니다. 근대화의 과정과 현대화를 거쳐 첨단화로 내빼는 동안 농촌은 희생양으로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습니다. 그리고 오 천 년의 근간인 농촌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농촌의 아비, 어미들이 늙고, 병들고, 찌들고, 누추해진 것은 자식들 때문인데도 자식인 우리들은 모른 척 하며 살고 있습니다.
▲ 등짐 진 할아버지. 칠십 평생 져 온 이 무거운 짐을 누가 대신 질지... ⓒ2003 오마이뉴스 조호진 최영신 선생님을 그만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일제 치하의 농촌에 뛰어들어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병이 들어 숨진 농촌 계몽운동가이었습니다. 그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입니다.
교사들이 농・어촌을 떠나고 있습니다. 교장・교감으로 승진을 꾀하는 선생님들은 벽지점수를 얻기 위해 농・어촌을 자청하지만 대부분 교사들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수험생들은 농・어촌 많은 지역의 교육대학 지원을 꺼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법원이 "현직교사도 타 지역 임용시험 응시가 가능하다"고 판결한 이후 농어촌 교사들이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농어촌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섬 처녀도 농촌 누이도 다 떠난 붕괴된 농어촌에서 누군들 근무하고 싶겠습니까.억지로 희망을 부추길 수도, 부추긴다고 희망으로 일어설 수도 없는 농촌 들녘에서 분노의 한숨을 내어 쉽니다. 저기, 버려진 땅의 짐을 지고 가는 누추한 아버지들의 굽은 등을 망연자실 바라봅니다. 아, 쓰러져 일어설 힘이 없는 가을 들녘입니다.
/조호진 기자 (tajin@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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