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밤, 관악산은 야경이 아름답다

2003. 5. 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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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가 한없이 파먹고 들어가 신음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관악산은 넓은 품으로 서울과 경기 일대 시민의 허파 노릇을 톡톡히 해낸다.

허파 노릇도 노릇이거니와 능선과 정상에서 문득 뒤돌아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라 설악과 지리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설악과 지리가 자연을 배경으로 절경을 이룬다면 관악은 도시를 배경으로 삼는 게 다르다.

연주대에 서면 오른편으로 한강 이남의 복잡한 도로와 고층 건물이 모형인 양 훤히 보이고 왼편으로는 잘 정돈된 과천의 길과 집, 경마장이며 동물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복잡한 심산이 드는 묘한 대조일 터이지만 한가한 일요일 오후 눈요기로는 그만이다. 그리고 토요일 밤은 그 절경을 색색이 빛나는 야경으로 담아내니 이것이 또 기막히다.

아직은 밤공기가 차가운 때라 여벌의 옷가지를 챙기고 약간의 먹을거리도 넣은 배낭을 매고 사당에 도착. 모이기로 한 사람들이 조금씩 늦어 예상했던 시각보다 30분 늦게 산을 향해 걸어갔다. 편의점에서 부족한 물품을 사고 아스팔트 따라 한적한 주택을 지나쳐 관음사 도착.오랜만에 만나 이야기 꽃을 피우는지 걸음이 늦는 이들을 기다리며 잠시 배낭을 벗고 한숨 돌렸다. 선선한 바람은 적당히 불고 관음사 주차장에 핀 아카시아는 향기는 짙지 않아도 그 선명한 흰빛은 어둠 속에서 환하다. 웬일인가 싶어 검은 하늘을 올려다 보니 안개에 낀 달이 밝다. 그러고 보니 보름이 며칠 전이었다. 이대로라면 등을 켜지 않고도 산길을 잃지 않겠다.

다시 일행이 모여 산을 올랐다. 길은 관음사 담을 빙돌아 났는데 담을 타 넘은 빛이 운치 있다. 길은 험하지 않고 표지판이 보이지 않아도 길찾기가 어렵지 않을 만큼 잘 닦여 산행은 수월하다.

그래도 따로 짐을 챙겨 온 누나는 산길 걱정에 자꾸 어디쯤에서 오르기 힘든 비탈이 나오는지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금을 챙겨 왔다. 사람 키만한 가야금을 들고 어떻게 산에 오를 용기를 내었는지 놀랍기 그지 없건만 당장은 한 손으로 그 무게를 감당하니 더 놀랍다.

가야금 든 누나를 가운데 두고 저녁 때를 잘못 맞춰 허기에 쓰러질 듯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챙기는 형을 뒤에 두고 쉬며 가며 산을 계속 올랐다. 관음사에서 야영장까지 이어지는 길은 험하지 않고 흙길과 바윗길이 적당히 섞여서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 오늘의 산행을 이곳으로 선택한 이유인 야경을 볼 수 있는 목 좋은 곳이 여럿 있다. 처음 만나는 다소 가파른 바윗길을 올라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사방이 트인 자리에 모여 배낭을 벗고 뒤를 돌아보니 불빛 천지다.

멀리 서울을 가르는 한강이 촘촘히 박힌 강변로 불빛을 따라 유유히 흐른다. 길고 정돈된 불빛은 어둠에 묻힐 뻔한 강을 살리고 그 강은 조용하고 차분해서 바라보는 이의 눈길을 빼앗는다. "저게 한강이야?" 마치 한강을 처음 본 것처럼 탄복하는 우리.굽이굽이 흐르는 모양이야 지하철 지도로 매일같이 본다지만 언제 그 실제 모습을 조망할 기회가 있겠는가. 이토록 아름다운 강을 우리는 곁에 두고도 모르고 산다. 서울의 자연은 산만이 아니고 강이 있어 아름다운데 이렇게 산에 와서야 그 아름다움을 안다. 자연은 자연끼리 통하는 구석이 있나 보다.

조용한 한강에 비하면 사당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불빛은 색색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도시에 갇혀 있을 때 그 화려함은 행인을 위압하고 혼란스럽게 하지만 산에서 바라보는 네온사인이며 고층 건물의 밝은 창은 밝은 꽃망울처럼 터지고 고운 색실로 이어진다. 내가 걸어온 곳이 저렇게 곱구나. 그 선명한 색에 마음은 흐뭇하다. 이대로 주저 앉아 시간을 보내도 좋겠지만 시작한 걸음이 늦어 갈 길을 재촉한다.

며칠 비가 와서인지 샘은 물이 넉넉하다. 갈증에 타는 목을 시원하게 적시고 빈 수낭과 수통을 채워 키가 큰 나무에 가린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 보니 다시 바윗길. 두 번째 샘에서 곧장 오르는 흙길이 있건만 다시 한 번 야경을 보겠다고 부러 그 길로 걷는다.

가야금을 준비한 누나 걱정이 많다. 등에 매나 옆구리에 차나 소중한 가야금을 온전히 들고 오를 걱정이 앞선다. 누런 달을 배경으로 어둠 속에 버티고 선 바위는 큼직한 것이 오르려는 이의 마음을 내리 누른다. 수차례 이 곳을 찾은 형을 선두로 주저주저 오르니 또 오를 만하다. 길었던 흙길에서 벗어나 달보고 걸으니 신난다.

바위 꼭대기. 긴 깃대 위에 태극기가 나부낀다. 사위가 뻥 뚫려 산 아래 펼쳐진 사방천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부러 찾을 가치는 충분하다. 왼편으로 산 깊숙이 치고 들어온 서울대가 차가운 불빛을 내고 있고 아까 봤던 도시는 더 넓게 보여 시원하다. 어느 곳 하나 바람 막아줄 곳 없으니 으슬으슬 춥기도 하지만 모여 사진 한 방 찍으니 다들 즐겁다.

한참 동안 바람 맞으며 야경에 흠뻑 취했다가 바로 아래 보이는 야영장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분지라 야경도 없고 바람도 없이 심심하지만 하룻밤 자연에 몸을 뉘일 곳으로는 적당하다.

배낭에 나눠 담았던 음식을 꺼내고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오래간만에 움직인 다리를 쉬며 술 한잔과 과일 한쪽을 나눈다. 그 사이 후발대로 좇아 온 이들이 왔고 이야기는 길어지고 웃음은 커진다. 어느 새 달도 지고 사위는 조용하기만 하다.

그때 힘들게 가야금을 들고 온 누나가 가야금을 꺼내 안족을 끼우고 연주를 준비한다. 자연과 마주한 이날에 더 없는 즐거움이자 호사의 시작. 언제 가야금 소리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겠나 했더니 산에서 듣는다.

난생 처음 듣는 12줄의 떨림. 문득문득 불청객인 양 들었던 소리가 기억나기도 하고 처음인 소리도 있겄만 하나같이 그윽하고 청초한 소리라 마음에 담는다. 민요 소리가 나오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따라 부르며 흥을 돋운다.

"새타령" "아리랑".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얼쑤. 우리가 한국 사람임은 음악으로도 충분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중간에 한 토막이 기억 나지 않는다고 그 야밤에 자는 사람을 전화로 깨우게 한 "산도깨비"도 인기 절정이다.

"달빛 어스름 한 밤중에 깊은 산길 걸어가다 머리에 뿔 달린 도깨비가 방망이 들고서 에루아 둥둥 깜짝 놀라 바라보니 틀림없이 산도깨비 에고야 정말 큰일났네."창이라도 한 소절 알았다면 뒤 이은 기막힌 조화였으련만 부르지 못하니 아쉬울 뿐이었다. 소리와 자연과 사람들은 그렇게 밤 늦은 줄도 모르고 즐거웠다./강현호 기자 (cirang@orgio.net)<hr noshade color=#FF9900>덧붙이는 글home.freechal.com/sannuri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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