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장인 김철씨 축구화 사랑 40년

2003. 5. 15.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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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스포츠화는 ‘쿨’하다. TV 광고이지만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은 ‘에어 조던’을 신고 수십미터를 뛰어 올라 덩크슛을 성공시키고 호나우두(레알 마드리드)는 나이키가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 준 크롬색 축구화를 신고 공장을 날아다니며 슛을 날려 배를 박살낸다. 사람 신는 축구화가 이렇게 멋들어지고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여기 2평 반의 어두침침한 공간. 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 운동장 주위 금성축구화수선점. 전혀 ‘쿨’하지 못한, 오래 신어 헤지고 땀에 젖은 수백켤레의 축구화가 켜켜이 재여져 있다. 사람 신는 신발의 진짜 모습이다.

축구화 수선 40년 인생의 ‘장인(匠人)’ 김철씨(56)는 그 신발들에 ‘재생의 숨’을 불어 넣는다. 김씨는 축구화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완전 분해한 뒤 모양을 바꾸고 발 크기에 따라 늘이거나 줄이기도 한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축구화 밑창을 가는 것. 축구 선수의 경우 새 축구화를 들고 와 발에 딱 맞게 고쳐 가는 일도 많단다.

함북 부령 출신의 김씨는 ‘6. 25 사변’ 때 가족들과 함께 월남,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운동화 수선 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 때문이었다. “완전히 머슴이었지, 뭐. 주인 애 봐주고 물 긷고…. 도망칠까봐 기술도 잘 안가르쳐 줬어.”김씨는 1963년부터 2년간 축구화, 역도화, 권투화 등 특수 신발 제조ㆍ수선 기술을 익힌 후 동대문 운동장 주변에서 축구화 수선을 ‘전공’으로 삼았다. 젊은 시절 남들이 학력을 물으면 “명동대학 대다리과”나왔다고 했단다. ‘대다리과’를 졸업했다는 것은 구두 밑창 깎는 기술을 가졌음을 이르는 뜻.축구화 수선으로 따지면 김씨는 ‘대다리과’ 석좌 교수 정도는 됐을 법하다. 60년대 중반 이후 그라운드에 족적을 남긴 웬만한 선수라면 모두 김씨의 손을 거친 축구화를 신었다.

이회택, 박이천, 차범근, 황보관, 황선홍, 유상철, 윤정환, 이천수, 최성국…. 헤아릴 수 없을 정도. 그러다 보니 선수들의 이름만 대도 김씨의 입에서 신발 크기가 튀어 나온다.

차범근 280, 유상철 최윤열 270, 황보관 265, 윤정환 서정원 김대의 255(이상 ㎜)…. 김상식의 경우는 특별 케이스. “발이 딱 278㎜이야. 275를 신으면 작고 280을 신으면 크고. 늘 새 신발을 들고 와 줄여 가지요.”옛날 이야기를 묻자 ‘서경, 정신’ 등 60년대 수제 축구화에서부터 70년대 이후 들어오기 시작한 아디다스, 아식스 이야기까지 끝이 없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대회에서 우승하면 세관에서 잡지 않았나봐. 그래서 선수들이 아디다스 축구화를 사들고 오는데 아낀다고 목에 걸고 다녔지.”인터뷰 중간중간에도 수시로 손님들이 찾아 들었다. “앞코를 납작하게 해주세요.” “밑창을 갈아 주세요.” 등등…. 김씨는 “내가 힘든 만큼 남들은 편할 것”이라고 웃음 지으며 다시 장갑을 끼고 낡은 축구화를 집어 들었다. ‘장인’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배호준 기자 dangran@daily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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