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일기> 외로운 오소리

한동철 2002. 11. 19.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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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 완전히 산에 미쳤습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산행을 했습니다. 덕분에 아내는 김밥싸는 실력이 달인의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어쩌면 아내는 집에서 빈둥빈둥대는 나를 보는 것보다는, 산으로 보내는 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산행은 좀 독특합니다. 절대로 등산객들이 북적이는 산은 타지 않습니다. 대신 사람이 뜸하고 고즈넉한 외진 산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정상보다는 7부 능선 비탈길을 하루 종일 쏘다닙니다.

비탈길을 다니노라면 일반 등산보다 훨씬 힘이 듭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와 함께 얻는 게 있습니다. 더덕이며 잔대와 도라지를 캐옵니다. 그렇다고 그런 걸 캐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정리하고, 건강을 지켜볼 요량으로 산행을 하다가 하나씩 캡니다. 흔히들 나같은 사람들은 약초산행꾼이라들 합니다. 뜻맞는 동호인 너댓이 일행을 이루기도 하지만, 단독 산행도 즐겨 합니다.

지난 10월 중순, 우리 약초산행꾼들은 강원도 인제 지동계곡으로 산행을 갔습니다. 서울에서 족히 네 시간은 걸리는 장거리 원정이었습니다. 그 날도 가을비가 촉촉히 내렸습니다. 그렇다고 산행을 마다하고 되돌아올 우리들이 아니었습니다.

인적이 뜸한 곳에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날 우리들의 목적은 산삼보기였습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산삼을 몇 뿌리 캔 이력이 있는 아마추어 심마니도 끼어 있어서 희망을 가졌습니다. 흔히 산삼은 산자락의 북쪽 방향에서 발견됩니다.

북쪽 방향 산자락에 흩어져 산삼찾기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올라갈 수록 가을비는 싸락눈이 되었습니다. 배낭이며 옷이 젖었습니다. 그런데다 산비탈이라 미끄럽고 젖은 낙엽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푸욱푸욱 빠졌습니다.

그 계곡에서 참 잘생긴 한국 소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모두가 50년은 넘게 자란 미끈한 재목들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고궁이나 절간을 증축하거나 지을 때에 쓰일 법한 나무들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진눈깨비를 맞으며 산자락을 헤맸습니다. 그런데 내 눈앞에서 오소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몸집은 웬만한 발발이만 합니다. 오소리란 녀석은 성격이 느긋합니다. 숲에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아주 불쾌한 모습이었습니다. 흘낏 흘낏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 언저리 어딘가에 오소리 보금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일행 한 사람이 5-6년 생은 됨직한 상황버섯을 하나 땄습니다. 상황버섯은 죽은 뽕나무에서 돋은 것을 으뜸으로 칩니다. 그 사람은 죽은 산뽕나무 등걸에 붙어서 자라던 상황버섯을 따고는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습니다. 산삼 못지 않게 약효가 좋은 약재입니다.

나도 그 아래에서 3년생 상황버섯을 하나 땄습니다. 기껏 더덕이나 도라지 몇 뿌리만 캔 다른 일행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떡다리 버섯이나 참나무 상황버섯도 좀 땄습니다. 하여튼 오랫만에 큰 수확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소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느 아늑한 바위 틈새 굴 속에서 낮잠을 자던 오소리가 난데 없이 나타난 사람들 때문에 가을비를 맞으며 다시 산속을 헤매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군데군데 멧돼지가 뒹군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멧돼지는 워낙 냄새를 잘 맡고 예민한 나머지 우리 일행이 산을 오르기 전에 어디론가 피한 게 틀림 없었습니다.

하산을 했을 때엔, 등산복이며 신발이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온몸이 떨렸습니다. 하루종일 헤맨 산자락은 구름이 드리워져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일행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서울로 향했습니다. 오소리가 무난히 겨울나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거대한 계곡에서 만난 단 한 마리 산속 친구 오소리가 요즘도 눈에 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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