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2년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출범을 알리는 역사적인 원년 개막전이 열렸다. 삼성과 MBC의 맞대결이었지만, 경기 전 프로야구 선수 전체를 대표해 선서를 한 이는 당시 OB(두산) 소속인 윤동균 전 일구회 회장이었다.
“그때 선수들 가운데 최고령이라서 내가 선정된 거다. 내 뒤로 선수들이 팀별로 쭉 줄을 섰는데, 그 첫 줄에 있는 이들은 선수가 아니라 경호원이었다. 어쨌든 우리나라 프로야구 시작을 알리는 자리에 내가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은 있다.”
윤동균 전 회장은 초창기 두산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화수분 야구’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여전히 두산 야구를 상징하는 말은 ‘뚝심’이다. 이기기 어려운 경기라도, 끝까지 버티고 버텨 끝내는 승리를 거두는 뒷심을 발휘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었다. 윤 전 회장은 뚝심을 조선백자에 비유한다.
“고려청자는 화려하고 섬세하다. 반면, 조선백자는 처음 볼 땐 밋밋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 맛이 우러난다. 소박하면서 단아하다. OB 야구도 그렇다. 삼성이나 MBC(현 LG)처럼 화려한 스타는 없지만 끈끈한 팀워크로 전체가 하나가 돼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야구를 한 게 뚝심이라는 말로 표현된 게 아닐까 싶다.”
최고령으로 원년 우승의 주역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윤동균 전 회장의 나이는 만 33살. 팀 동료 김우열과 함께 최고령 선수였다. 지금이야 40대 선수도 여럿 나오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선수가 아닌 지도자를 맡을 나이였다.
당시 OB 타격 코치였던 이광환 전 감독은 “선수로서는 환갑, 진갑이 다 지난 나이였다. 하지만 뛸 선수가 부족해서 창단 멤버로 뽑았는데 두 선수가 없었으면 OB가 원년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업야구 시절 홈런왕을 밥 먹듯이 한 김우열은 전기리그 홈런왕을 차지했고 윤동균은 홈런, 도루를 제외한 타격 전 부문에서 10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타율에선 프로야구 유일한 ‘4할 타자’ 백인천에 이어 2위(0.342)를 기록했다.
“전기리그가 끝났을 때 타율 부문에서는 백인천 감독님이 0.403으로 1위였고, 나는 0.372로 2위였다. 후기리그에서 따라잡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기회가 안 오더라고. 백 감독님이 여름에도 지치지 않고 4할대 타율을 유지하는 걸 보고 기대 자체를 안 했다. 타율왕은 놓쳤지만 원년 우승을 차지한 것에 위안을 삼고 있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할 때 OB는 중하위권 전력으로 평가됐다. 김영덕 감독조차 우승할 거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동균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오랫동안 실업야구에서 뛰며 각 선수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마운드가 좀 약하지만 구천서, 신경식 등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좋아 나랑 김우열, 김유동 등 베테랑이 자기 몫을 하면 우승에 도전할 수 있을 거로 봤고 실제로 우승했다.”
OB는 22연승을 거둔 ‘불사조’ 박철순이 마운드를 굳건히 지키고 신구 조화를 이룬 타선이 맹위를 떨쳐 ‘우승 0순위’로 꼽힌 삼성, MBC 등을 따돌리고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김영덕 감독은 내심 후기리그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기념비적인 원년 우승을 확정 지으려고 했지만 야구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9월 29일 삼성과 치른 시즌 최종전에서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1-2로 지며 사실상 후기리그 패권은 삼성으로 넘어갔다. 패배 이상으로 뼈아팠던 것은 에이스 박철순이 번트 수비 도중 허리를 삐끗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한국시리즈 출전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 결과,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무명의 강철원이 호투를 펼쳐 3-3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선 마운드가 와르르 무너지며 0-9로 크게 졌다.
“누가 봐도 그땐 삼성의 우승을 의심치 않았다. 구단에선 서울에서 열리는 3차전에 대비해 합숙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당시 이광환 코치님이 베테랑을 모아 ‘평소 하던 대로 해야 한다’며 서울로 안 올라가고 대구 수성못 근처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후에 들었지만, 그때 이 코치님 안주머니에는 사직서가 있었다고 하더라. 우승을 못하면 그 책임을 질 생각이었던 거지. 그게 계기가 돼 3차전부터 4연승을 거뒀다. 다들 유니폼을 벗을 각오로 뛴 거다.”
OB를 원년 우승으로 이끈 윤동균 전 회장이지만 유달리 상복이 없었다. “1982년에 타율 2위, 최다안타 4위, 득점 3위, 타점 9위, 출루율 3위, 장타율 5위 등에 올랐지만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그땐 수비율로 수상자를 결정했으니까. 대신에 베스트10에 뽑혔거든. 한국시리즈에서도 첫 안타를 치는 등 타율 0.407을 기록해 내심 시리즈 MVP를 기대했지만 김유동이 만루 홈런을 쳐 막판에 뒤집혔다.”
KBO리그 첫 은퇴 경기의 주인공
1982년 KBO리그에 최고령 선수로 시작한 윤동균 전 회장은 이후로도 팀의 간판선수로 활약하며 8시즌을 뛰고 유니폼을 벗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경기도 생애 마지막 경기였다. 1988년 8월 17일, 잠실야구장은 평일인데도 1만 6천여 명의 관중이 들어찼다. 관중 대다수는 윤동균 전 회장의 선수 생활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잠실야구장을 찾은 것이다.
OB가 롯데에 4-2로 앞선 6회 말 선두 타자 김형석이 유격수 실책으로 나가자 관중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환호성과 박수 속에 곰을 연상시키는 윤동균 전 회장이 담담하게 왼쪽 타석에 들어섰다. 볼 카운트 1-2에서 롯데 선발 김시진은 타자 몸쪽으로 강속구를 뿌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휘둘렀고 타구는 좌중간으로 쭉쭉 뻗어 나갔다. 홈런성 타구는 마지막에 힘이 떨어져 펜스를 원바운드로 맞췄고 타자 주자는 2루를 밟았다. 그 순간 관중은 일제히 일어서서 손뼉을 치며 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윤동균! 윤동균! 윤동균!”
“한국 프로야구 첫 은퇴 경기였다. 사전에 내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경기를 잠시 중단하고 은퇴식을 하기로 롯데와 합의돼 있었거든. 그래서 2루타를 치고 대주자로 교체될 때 바로 더그아웃으로 간 게 아니라 후배들이 늘어선 가운데 2루에서 홈플레이트로 걸어 들어왔다. 또 내 애창곡인 조영남의 ‘제비’가 울려 퍼졌고. 지금 생각해도 참 멋진 은퇴 경기였다.”

당시로서는 은퇴할 나이에 프로에 데뷔해 만 40살까지 활약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는 “김성근 감독님 덕분”이라고 밝힌다.
“동대문상고(현 청원고) 시절엔 타자가 아니라 투수였다. 노히터를 한 적도 있다. 그건 그렇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기업은행에 들어갔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투수 코치였는데 내가 제구력은 없지만 볼이 빠르니까 투수로 키워 보려고 했다. 그래서 김 감독 집에 잡혀 들어가 하숙 아닌 하숙을 했다. 매일 혹독한 훈련을 하기 위해서. 오전 5시만 되면 뒷산에 올라가 훈련하고 출퇴근도 함께했다. 그러니 술 마실 틈이 없었으니까. 그 덕분에 선수 생활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윤동균 전 회장은 1988년을 끝으로 현역 은퇴한 뒤, OB 코치를 거쳐 1991년 7월 감독대행에 올랐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는 제1호 감독이 된 것이다. 1993년에는 가을에는 TV만 보던 OB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켜 그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 1994년 9월 프로야구사상 초유의 집단항명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했다. 감독 통산 성적은 198승 210패 11무. 이후 KBO 경기운영위원장, 규칙위원회 운영위원 등을 맡았다.
* 이 칼럼은 프로야구 OB모임인 사단법인 일구회의 협조를 받아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