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은 이름 그 자체가 브랜드가 된 창업자의 스토리를 들려드리는 콘텐츠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맛집 열풍 불고온 요리콘텐츠, 3스타가 뭔데?
대한민국에 다시 요리와 미식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흙수저, 금수저를 연상시키는 계급전쟁을 표방하는 흑백요리사라는 프로그램 때문인데요. 많은 화제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내로라하는 요리고수들의 실력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누구냐도 관심사였습니다.
대중적으로도 너무 유명한 ‘설탕요정’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와 함께 등장한 안성재 쉐프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인지도와 달리 모든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바로 지금은 휴업 중이지만 올해 기준 대한민국 유일의 미쉐린 가이드 3스타 식당의 오너쉐프였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왜 요리 이야기냐고요? 당연히 오늘의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의 주인공이 바로 맛집의 바로미터 ‘미쉐린 가이드’를 발간하는 타이어 기업 미쉐린의 창업자가 앙드레 미슐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두가지 의문이 들 겁니다.
창업자 이름이 미쉐린이 아니고 미슐랭이냐는 것과 미쉐린 가이드를 발간하는 기업이 왜 요리와 무관한 타이어 회사인가라는 점. 지금부터 미슐랭의 창업 이야기로 그 궁금증을 해소해드리겠습니다.
화가와 고무공장 상속녀의 아들, 공학도로 성장하다
앙드레 미슐랭은 1853년 1월 16일 프랑스 남동부 클레르몽페랑이란 지역에서 줄스 미슐랭과 아델 바비에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줄스 미슐랭은 프랑스를 대표한 에칭과 석판화 화가였습니다.
평소 손재주가 좋고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앙드레 미슐랭은 수학과 과학에 특히 관심이 많은 소년이었습니다. 리세 루이르그랑을 졸업한 그는 파리로 유학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공계 고등교육기관(그랑제콜)인 에콜 상트랄 파리를 졸업합니다. 에펠탑과 자유의 여신상을 설계한 귀스타프 에펠 역시 해당 학교를 나왔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고무와 만나다
졸업후 파리에서 성공적인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이어가던 그. 어릴적부터 꿈꾸던 파리지앵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3살이던 1886년, 그의 삶을 180도 뒤바꿀 ‘별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의 외가에서 가업처럼 이어오던 고무 사업을 인수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 아델 바비에는 고무 공장의 상속녀였습니다.
1832년, 에두아르 도브레와 그의 사촌 아리스티드 바비에는 클레르몽페랑에서 고무 농기구 제품을 판매하는 회사 ‘바르비에 도브레’라는 회사를 창업합니다. 창업 아이템을 고무로 정한 데는 도브레의 아내 덕이 컸는데요.
아내 엘리자베스 푸그-바커라는 고무가 벤진에 녹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화학자 찰스 매킨토시의 조카였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삼촌이 만들어줬던 통통 튀던 고무공을 남편의 작업장에서 직접 만들었고 이는 클레르몽페랑 지역에 고무가 들어온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도브레는 고무 호스, 고무 벨브, 고무 조인트 등 고무를 활용한 각종 농기구를 개발하고 생산해 지역에서 이름을 알렸습니다. 좋은 품질과 기술 덕에 그들 제품은 국제 무역 박람회와 전시회에 소개되는 등 나름 명성을 날렸습니다.
도브레의 사촌이자 공동 창업자인 아리스티드 바비에에겐 딸 아델 바비에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의 주인공 앙드레 미슐랭의 어머니죠. 즉 아리스티드 바비에는 앙드레 미슐랭의 외할아버지입니다.
하지만 도브레와 바비에가 각각 1863년, 1864년 사망하면서 회사 운영은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창업자 두명이 동시에 없어져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죠. 졸지에 고무 회사의 상속녀가 된 아델 바비에는 20여년을 버텨왔지만 결국은 아들에게 SOS를 칩니다.
귀향을 결심한 아들, 굳건한 동업자와의 동행
사실상 파산 수순에 들어가던 어머니의 회사를 보며 앙드레는 고심끝에 귀향을 택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업을 잇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클레르몽페랑으로 돌아간 앙드레는 가장 먼저 자신의 6살 터울 동생 에두아르를 회사의 전무이사로 불러들입니다.
1859년생 6월 23일생인 에두아르는 미술과 공학에 관심이 큰 청년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예술적 감각을 더 타고난 건 동생 에두아르였죠. 파리에서 건축을 공부하면서 예술적 영감이 충만한 건축도로 성장했고 머릿속에는 항상 상상력이 넘치는 여러 사업 아이디어가 풍부했습니다.
두 형제가 의기투합해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무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고무의 물성과 특징을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며 사업을 되살릴 방안을 고심했습니다. 일단 그들은 회사 이름부터 미슐랭 앤 코(Michelin et Cie)로 바꿨습니다.
도브레가에서 시작했던 사업을 이제는 미슐랭가에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었죠. 둘은 역할부터 나눴습니다. 형 앙드레는 경영과 판매를 담당했고 에두아르는 제조와 연구 운영 전반을 관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기의 기업들이 그러하듯 두 형제 역시 회사의 성장을 위한 사업 다각화와 신사업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나갔습니다.
우연히 찾아온 손님, 펑크난 자전거가 준 기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1889년 어느 날. 한 손님이 펑크가 난 자신의 자전거를 가져오며 고무타이어를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고무는 다룰 줄 알았어도 타이어에 대해서는 특별한 지식이 없던 그들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수천년전부터 이어오던 바퀴의 역사.
하지만 바퀴의 혁신은 생각보더 더뎠는데요. 나무로부터 시작해 금속으로 재질이 바뀌었을 뿐 딱딱하고 불편한 바퀴의 역사가 오래 이어졌습니다. 오죽하면 이동수단에서 가장 피로도가 높은 부품이 바퀴기 때문에 피곤하다(Tierd)와 어원이 같은 타이어(Tire)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사실 진짜 타이어의 어원은 프랑스에서 시작했는데요. 수레나 마차 바퀴를 하나로 묶어주는(Tie) 바퀴의 링에서 기원한 것이 바로 타이어입니다.
그리고 19세기, 딱딱하고 피곤한 바퀴의 혁신이 시작됐는데요. 바로 고무라는 신소재를 바퀴에다 감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온 것입니다. 세계 최초의 고무바퀴는 1839년 찰스 굿이어에 의해 발명됩니다. 타이어 브랜드 굿이어를 만든 그 인물입니다.
다만 말 그대로 바퀴에다가 고무를 접착하는 방식이 처음 개발된 고무 타이어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1888년 영국의 수의사 존 던롭은 아들이 자전거를 탈때마다 엉덩이가 너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던 중 축구공을 바라보며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고무에다가 공기를 주입해 바퀴를 감싸면 훨씬 안정적이고 푹신한 바퀴를 만들 수 있겠단 생각이었죠. 이렇게 세계 최초의 공기입 타이어가 발명됐습니다.
던롭의 아이디어로 딱딱함으로 대표되던 바퀴의 역사는 뒤바뀌는데요. 1889년 미슐랭 형제를 찾아온 그 펑크난 자전거가 바로 던롭이 발명한 공기주입형 고무 타이어였던 겁니다.
발명의 기회 된 모방, 교체식 타이어의 탄생
이를 본 미슐랭 형제는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이런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깜짝 놀란 그들은 접착식으로 붙어있는 고무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특기를 살리기로 합니다. 이리 저리 연구해본 그들은 또 하나의 혁신을 시도하는데요. 바로 공기주입형 고무 타이어를 접착식이 아닌 교체식으로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특히 동생 에두아르는 분리 가능한 타이어를 개발한 장본인인데요. 결국 15분이면 펑크난 타이어를 교체해 금방 새 자전거처럼 달릴 수 있는 교체형 공기주입식 타이어를 발명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들은 1891년 자신들의 교체형 고무 타이어에 대한 특허를 등록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명품은 곧바로 이목을 끌게 됩니다. 마침 그 해에 새로운 자전거 대회가 개최되는데요. 파리에서 프랑스 서부 해안가 도시 브레스트까지 왕복으로 달리는 파리-브레스트 자전거 레이스가 그 주인공입니다. 편도 거리만 600km, 왕복 1200km에 달하는 엄청난 거리탓에 자전거도 자전거지만 과연 타이어가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경기였습니다.
미슐랭 형제는 당시 스타 자전거 선수였던 샤를 테롱에 접근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전거에 자신들이 개발한 탈착식 고무 타이어를 사용하도록 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1위. 던롭의 타이어를 사용한 2위 선수보다 8시간 앞선 압도적 우승을 차지합니다. 자전거 수리시간이 사실상 승패를 결정했습니다.
두번째 승부수, 자동차 타이어를 노리다
샤를 테롱의 우승 소식은 프랑스 전역에 퍼졌고 이와 함께 미슐랭 타이어의 명성 역시 드높아졌습니다. 이 후 사이클 선수 1000여명 이상이 이들 형제를 찾아 타이어를 사갔습니다. 그리고 미슐랭 형제는 이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자동차 산업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자동차 산업이 성장할수록 바퀴와 타이어 산업 역시 성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자동차 바퀴는 4개. 자전거보다 2개나 더 많았습니다.
미슐랭 형제는 이번에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1895년, 이번에는 자동차 경주 대회를 노립니다. 바로 파리와 보르도를 왕복하는 자동차 경주였죠. 미슐랭은 푸조사의 자동차 리클레어에 공압 타이어를 장착합니다. 이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공압식 타이어를 장착한 차로 기록됩니다.
다만 일전의 자전거 대회와 달리 이번 자동차 대회서는 수모를 당했는데요. 바퀴가 무려 22번이나 찢어지는 등 무거운 차체를 버티기엔 아직 기술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미슐랭 형제는 공압식이 아닌 런플랫 타이어를 193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합니다.
자동차의 대중화, 미슐랭의 전성기를 이끌다
이후 미슐랭은 본격적인 타이어 회사로서의 면모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했고 미슐랭의 역사는 잘 알려진 대로 자동차 산업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하게 됩니다. 특히 미국에서 포드를 필두로 본격적인 자동차 대량 생산이 시작되며 미슐랭은 미국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슐랭의 미국식 발음인 미쉐린은 여기서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미국의 미쉐린이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한국에서도 미슐랭이 아닌 미쉐린 타이어로 공식적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즉 미슐랭이 미쉐린이고, 미쉐린이 미슐랭입니다. 그래서 미슐랭 가이드 역시 한국에서는 미쉐린 가이드라고 공식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첫번째 의문점은 해결했습니다.
검은색 타이어 회사의 마스코트가 흰색인 이유
그리고 여기서 잠깐. 그 유명한 미슐랭의 마스코트, 비벤덤, 일명 미쉐린맨이 요맘때 탄생합니다. 1894년 미슐랭 형제는 프랑스 리옹에서 열린 국제 전시회에 참여합니다. 동생 에두아르는 그곳에 쌓여있는 타이어 더미를 보고 상상력을 발휘합니다. 저 자전거 타이어 더미에다 손과 발을 붙이는 것이었죠.
디자이너 오갤럽에게 이를 제작해달라고 부탁한 그들은 결국 1898년 미슐랭의 마스코트 비벤덤을 선보이게 됩니다. 비벤덤은 라틴어로 ‘건배, 한잔합시다’ 라는 뜻인데요. 타이어 회사로서의 미슐랭의 이미지를 잘 담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타이어는 죄다 검은색인데 왜 타이어로 만든 비벤덤은 흰색일까요? 사실 비벤덤이 탄생할 당시 타이어는 천연고무의 원래 색깔인 흰색 또는 회색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벤덤 역시 흰색으로 탄생했는데요. 20세기 초반 재미있는 것은 현재 타이어가 전부 검은색인데 비해 당시 천연고무로 제작했던 자전거 타이어 중 다수가 흰색이거나 회색이었기에 비벤덤의 색깔도 흰색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1912년 굿리치라는 회사에서 탄소 소재인 검정색 카본 블랙을 섞어 내구성을 10배 이상 향상시키면서 모든 타이어 회사가 검정 타이어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지금은 포동포동한 아기같은 비벤덤이 탄생 당시에는 무척 위압적이고 날씬한 타이어들이 겹겹히 쌓여 만들어졌는데요. 이 역시 자동차 타이어가 아닌 자전거 타이어로부터 영감을 얻은 탓에 날씬한 타이어를 쌓아올린 이미지라는 점입니다.
고객 최우선 경영철학으로 탄생한 빨간 소책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이제 마지막 궁금증을 해결할 순서입니다. 왜 타이어 회사 미슐랭이 맛집 리스트를 잔뜩 모은 책을 펼쳐낸 것이냐는건데요. 미슐랭 형제는 공학도였지만 감성이 풍부한 예술가적 기질도 타고났습니다. 이들의 사업 아이템인 타이어는 자동차를 위한 핵심 부품이었죠.
그리고 그 자동차는 이동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바로 여행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기존 상류층의 전유물이던 초창기 자동차 산업과 달리 포드를 필두로 중산층이 구입할 수 있는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주말과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을 압축해 여가시간으로 돌려준 핵심 역시 자동차였죠.
미슐랭 형제는 이처럼 차를 구입하고 이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장소를 모험하고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앙드레 미슐랭은 타이어의 유지·관리 방법과 타이어 상점의 위치, 그리고 호텔, 주유소 등의 정보를 담은 빨간 책자를 내놓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1900년 탄생한 이 소책자가 바로 ‘미슐랭 가이드(Guide Michelin)’입니다. 타이어를 구매하는 고객에게 무료로 제공된 일종의 서비스였습니다.
초창기에 운전자와 여행객들을 위한 정보를 담는데 집중했고 이는 금방 입소문이 나며 회사의 인지도를 높이고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이 후 이들은 1908년 본격적으로 여행 정보를 제공하는 사무실을 열었고 1910년엔 미슐랭 도로 지도를 발행했습니다. 나날이 미슐랭 가이드의 인기가 높아지자 1922년 미슐랭 가이드는 유료로 판매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26년부터 호텔과 식당에 별점을 부여하는 레드 가이드와 지역의 관광정보를 제공하는 그린가이드가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3스타 미슐랭 식당은 레드 가이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미슐랭 가이드는 미식의 상징으로 자리잡으며 1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고객 생각한 미슐랭의 마음만큼은 3스타
물론 미슐랭 레스토랑에 대한 논란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미식의 기준이란 사람마다 가지각색인데 과연 미슐랭 별점이 미식의 절대적 기준이 되냐는 것인데요. 식당에 등급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죠. 특히 프랑스에서 시작한 미슐랭의 역사 특성상 서구 중심적인 미의 관점이 강요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미슐랭 가이드에 선정되기 위해 행해지는 여러 루머나 이슈도 과거 있었던만큼 이를 절대적 기준으로만 삼기보단 말그대로 ‘가이드’, 즉 참고용 지침서 정도로 봐야한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이번주에는 장안의 화제 프로그램과 관련된 창업자의 이야기를 살펴봤는데요. 세계 1위 타이어회사가 만든 미식 가이드북. 맛집의 기준은 제각각이지만 타이어를 만들며 그 차를 운전하는 고객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 봤을 땐 미슐랭 형제는 제 마음속의 3스타입니다.
*국내서는 미쉐린 가이드가 공식 용어입니다. 다만 창업자 이야기에 집중하기 위해 미쉐린은 미슐랭으로 통일해 작성했습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 오리저널 시리즈를 연재 중입니다. 아래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