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레드삭스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 밤비노의 저주를 깨뜨린 이후 2007년과 2013년, 2018년에도 최정상에 올랐다. 그러면서 2004년 우승까지 84년이나 걸렸던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2000년대 최다 WS 우승
4 - 보스턴
3 - 샌프란시스코
2 - 세인트루이스 휴스턴 다저스
하지만 최근 보스턴은 이 위용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영광을 함께 했던 선수들이 떠나면서 동력을 잃었다. 팀 투자가 현저히 줄었고, 투자를 강행해서 데려온 선수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 사이 같은 지구 경쟁 팀들은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암흑기가 길었던 볼티모어도 리빌딩을 끝내고 신흥 강호로 올라섰다.
보스턴 성적 변화
2022 : 78승84패 .481 <지구 5위>
2023 : 78승84패 .481 <지구 5위>
2024 : 81승81패 .500 <지구 3위>
보스턴은 2022-23년 연속 5할 승률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지구 최하위였다. 지난 시즌에는 겨우 5할 승률을 맞췄지만, 포스트시즌 진출은 또 좌절됐다. 그리고 '라이벌' 뉴욕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준우승 소식을 눈과 귀로 접해야 했다.
양키스의 부활이 자극제가 됐을까. 이번 겨울 보스턴은 명예 회복을 다짐했다. 그동안 팀에 소홀했던 존 헨리 구단주가 분발을 촉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수뇌부에서도 "팀을 바꿀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오겠다"고 공언했다. 크렉 브레슬로 야구 운영 최고 책임자(CBO)는 오프시즌 계획에 관해 아래와 같이 밝혔다.
"I'm trying to build the best roster that I possibly can and we need to be willing to pursue any path that gets us there(최고의 로스터를 구성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를 위해 어떠한 경로가 주어지든 기꺼이 따르겠다)"
과제
지난해 보스턴은 시즌 중반부터 성적이 무너졌다. 6월25일까지 43승36패로 순항했지만, 이후 38승45패로 미끄러졌다. 승률 .458는 리그에서 세 번째로 나빴다.
같은 기간 성적 하락은 불펜 난조에서 비롯됐다. 보스턴 불펜은 6월25일까지 선전했다. 새로 부임한 앤드류 베일리 투수코치가 내세운 '포심 패스트볼 최소화 전략'이 효과를 봤다. 같은 기간 불펜 평균자책점 3.47은 리그 5위에 해당했다.
6/25일 기준 포심 최소 투구
3020 - 탬파베이
2917 - 세인트루이스
2779 - 필라델피아
2472 - 샌프란시스코
1944 - 보스턴
이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간파당했다. 아무리 포심 의존도를 낮추는 추세라고 해도 포심 없이 타자를 제압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회심의 작전이 빗나간 보스턴 불펜은 힘없이 쓰러졌다. 6월25일 이후 평균자책점이 5.25로 치솟았고, 9이닝 당 피홈런도 1.45개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모두 메이저리그 최하위였다.
6/25일 이후 불펜 ERA 하위
4.75 - 화이트삭스
4.94 - 볼티모어
4.99 - 토론토
5.06 - 콜로라도
5.25 - 보스턴
공교롭게도 안 좋은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부상자가 하나둘씩 쏟아졌고, 선발진의 이닝 소화력이 떨어지면서 부담이 가중됐다. 이로 인해 보스턴은 지난 시즌 34명의 투수를 내보내야 했다. 보스턴이 한 시즌에 이보다 더 많은 투수를 활용한 건 2021년뿐이었다(37명).
우타자가 부족한 타선도 고민이었다. 보스턴은 주포 라파엘 데버스를 포함해 재런 듀란과 요시다 마사다카, 윌라이어 아브레유, 트리스턴 카사스 등 좌타자들이 즐비했다. 덕분에 좌타자들의 생산력은 문제가 없었지만, 우타자들이 그 균형을 맞추지 못했다. 31홈런을 때려냈던 타일러 오닐이 팀을 떠나면서 이 부분도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2024 보스턴 좌/우타자 도합 성적
좌 : .259 .329 .445 110홈런 [wRC+] 113
우 : .243 .306 .400 84홈런 [wRC+] 94
중점
보스턴의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스토브리그 초반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손을 본 곳은 역시나 불펜이었다. 베테랑 좌완 아롤디스 채프먼(36)을 1년 1075만 달러에 영입하면서 빈약했던 좌완 불펜을 충원했다.

지난해 채프먼은 직전 시즌보다 구속이 떨어졌다. 포심 평균 구속이 2023년 99마일, 지난 시즌에는 97.8마일이었다. 그러나 점점 비중을 높인 싱커 평균 구속은 99.8마일에 달했다. 스플리터도 완성도를 높이면서 기존 포심과 슬라이더에 4가지 구종을 골고루 던지는 투수로 변신했다. 스타일의 변화를 줬지만, 탈삼진 능력은 여전했다.
NL 불펜 9이닝 당 최다 탈삼진
14.30 - 아롤디스 채프먼
14.09 - 페르난도 크루스
14.09 - 에드윈 디아스
13.87 - 제레미아 에스트라다
물론, 채프먼은 볼넷도 피하지 못했다. 9이닝 당 볼넷 수가 5.69개로 매우 많았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피칭이 채프먼 경기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보스턴은 스트라이크 존만 꽂으면 타자들이 채프먼의 공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유가 있었다. 지난해 보스턴은 투수들이 스트라이크는 잘 던졌다. 스트라이크 비중이 전체 4번째로 높았고(65.5%)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던진 비중은 가장 높았다(50.8%). 스트라이크 존 설정은 잘 수행했는데, 존에 들어온 공에 대한 헛스윙률이 전체 4번째로 낮았다(16.2%). 투수들의 구위가 약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보스턴은 그 다음 행보에서도 구위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트레이드 마감시한부터 '뜨거운 감자'였던 시카고 화이트삭스 개럿 크로셰를 데리고 온 것이다.

크로셰는 지난해 선발 전환 첫 시즌을 보냈다. 32경기 6승12패 평균자책점 3.58을 기록했다. 후반기 12경기 6패 평균자책점 5.12로 부진했지만, 후반기는 그럴만한 사유가 있었다. 수술 복귀 후 얼마 되지 않아 선발 도전을 했기 때문에 이닝 관리가 필요했고, 화이트삭스 팀 사정상 계속 트레이드 소문에 휩싸이면서 오롯이 경기에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2024 좌완 선발 포심 평균 구속
97.2마일 - 개럿 크로셰
96.8마일 - 타릭 스쿠벌
96.0마일 - 매켄지 고어
95.9마일 - 블레이크 스넬
95.5마일 - 기쿠치 유세이
크로셰의 매력도 채프먼과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구위다. 지난해 좌완 선발 투수들 중 가장 빠른 포심을 던졌다. 전체 레퍼토리의 절반 비중을 넘게 차지한 포심은 피안타율도 1할대였다(.198). 평균 회전수 2,500회 또한 크로셰의 포심 구위를 대변한다(리그 평균 포심 회전수 2,297회). 백스핀이 걸리는 포심은 회전수가 많을수록 공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져 타자들에게 공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일명 하이 패스트볼이다.
커터 장착으로 더 까다로운 투수가 된 크로셰는 지난해 선발 투수 중 헛스윙률 최다 1위였다(33.1%). 구위에 목말라 있는 보스턴에게 최적화된 투수였다. 이에 보스턴도 유망주를 4명이나 보내는 출혈을 감수했다. 이 가운데 포수 카일 틸(23)은 보스턴이 아낀 유망주 중 한 명으로, 전체 포수 유망주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대주다.
과감한 결단을 내린 보스턴은 우완 워커 뷸러도 추가했다(1년 2150만). 지난해 두 번째 토미존 수술에서 돌아온 뷸러는 정규시즌 과도기를 겪었지만(16경기 1승6패 5.38) 포스트시즌에서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피칭을 선보였다. 첫 등판 5이닝 6실점 이후 10이닝 무실점으로 다저스의 우승을 견인했다. 특히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는 마지막 투수로 등장해 한 점차 세이브를 따냈다.
당시 뷸러는 "추운 날씨에서 공을 던지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추위로 유명한 켄터키주 출신답게 쌀쌀한 날씨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미 동부에 위치한 보스턴은 이 모습과 함께 뷸러의 구위가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점을 눈여겨봤다.
지난해 보스턴 투수진의 포심과 싱커 평균 구속은 각각 94.2마일, 93.4마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신규 영입한 저스틴 윌슨과 채프먼, 크로셰, 패트릭 산도발, 뷸러가 합작한 포심 평균 구속은 95.8마일, 싱커는 96.6마일이다. 더 이상 힘의 승부에서 밀리지 않는다.
한방
보스턴은 스토브리그 중반까지 마운드 개선에 공을 들였다. 그러자 타선 보강을 너무 등한시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노렸던 선수들을 다른 팀에게 뺏기면서 타선 보강에 애를 먹었다. 세인트루이스 놀란 아레나도 트레이드 협상도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스토브리그 막판에 보란듯이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최대어 중 한 명이었던 알렉스 브레그먼(30) 영입에 성공했다. 3년 1억2000만 달러 계약으로, 연평균 4000만 달러를 맞춰줬다. 브레그먼이 요구한 옵트아웃을 매년 넣어준 대신, 디퍼(지불유예)를 매년 2000만 달러씩 산정함으로써 사치세에 잡히는 금액을 3170만 달러 정도로 낮췄다.

브레그먼은 보스턴이 처음부터 마음에 뒀던 선수였다. 중심타선에 배치할 수 있는 우타자이자, 보스턴의 최대 불안요소인 수비 안정을 가져다줄 내야수였다. 휴스턴에서 보여준 리더십도 보스턴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 통산 펜웨이파크 성적이 21경기 타율 .375 7홈런 15타점, OPS 1.240으로 훌륭했던 점도 고무적이었다.
인연도 각별했다. 보스턴은 2012년 드래프트 29라운드에서 브레그먼을 지명한 바 있다. 하지만 브레그먼은 낮은 순번의 지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루이지애나 주립대로 진학해 그곳에서 자신의 주가를 높였다. 보스턴은 2015년 드래프트에서도 브레그먼을 뽑으려고 했다. 그러나 전체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휴스턴이 먼저 브레그먼을 낚아챘다. 눈앞에서 브레그먼을 놓친 보스턴은 전체 7순위 지명권을 앤드류 베닌텐디에게 썼다.
브레그먼도 보스턴이 특별했다. 브레그먼의 할아버지가 '보스턴 레전드' 테드 윌리엄스와 절친한 사이였다. 윌리엄스가 워싱턴 세너터스 감독을 맡던 시절에 구단 법률 대리인이 브레그먼의 할아버지였다. 브레그먼은 자연스럽게 보스턴을 자주 접했고, 자신도 야구를 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가 '보스턴의 리더' 더스틴 페드로이아였다.
브레그먼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다시 FA 시장에 나올 것이 유력하다. 그만큼 당장 동기부여가 강하다. 기자회견에서 거듭 강조했던 부분도 '우승'이었다.
"I'm a winning player. This is a winning organization. Those players are winning players. We have winning coaches here. I plan on winning here(나는 이기는 선수다. 이 팀은 이기는 구단이다. 이 선수들도 이기는 선수들이다. 여기에는 이기는 코치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우승할 계획이다)"
전망
최근 메이저리그는 온통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 집중돼 있다. 다저스가 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다저스를 쫓는 지구 내 다른 팀들도 발맞춰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에 쏠린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못지않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도 흥미로워질 전망이다. 리그 챔피언 양키스가 후안 소토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이러한 양키스를 본 보스턴이 마침내 각성했다. 젊은 선수들의 기량 발전이 기대되는 볼티모어와 반등을 노리는 토론토, 여기에 김하성이 합류한 탬파베이가 우승을 두고 다툰다.
AL 동부 예상 성적 (팬그래프)
87승75패 - 양키스
85승77패 - 보스턴
83승79패 - 볼티모어
82승80패 - 토론토
82승80패 - 탬파베이
<팬그래프>는 스토브리그를 알차게 보낸 보스턴을 지구 2위로 예상했다. 그러나 1위 양키스부터 공동 4위 토론토와 탬파베이까지 모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최대 격전지답게 최하위 팀들도 5할 승률이 넘을 것으로 내다본다.
보스턴은 아직 해결 과제가 남았다. 어제 데버스는 계속 3루수를 맡고 싶다고 못박았다. 수치상 당연히 데버스가 수비 이동을 해야 되지만, 주축 선수의 자존심을 챙겨주는 식으로 가야 한다. 자칫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모양새가 될 경우 분위기가 어색해진다. 이 때문에 데버스가 흔들린다면 보스턴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과연, 보스턴은 아쉬웠던 날들을 뒤로하고 비상할 수 있을까. 날개를 펴는 과정은 보스턴의 귀환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보스턴의 날갯짓이 어디로 향할지 궁금하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